떠오르는 초승달(9)
* * *
뜬금없는 대답에 두 명의 소녀들에게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금 전과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순간을 놓칠 유피테르가 아니었다. 칼 같은 박자 감각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회색을 택하지. 난 과거를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유피테르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어떤 부끄러운 행동을 했든, 실수했든 간에 그건 현재의 자신이 견뎌야 할 무게였다.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었다. 부모도, 형제도, 사랑하는 연인일지라도.
그가 말한 회색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색이었다. 과거를 부정하려는 위선으로 뒤덮인 비겁한 하얀색을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검은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 있어야만 빛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고작 그게….”
“…당신의 대답?”
그러나 그녀들이 느끼기엔 회색이야말로 분명하지 않은 색이었다.
회색은 그저 섞인 색이었다. 그 색은 붉은색과 같은 정열도, 푸른색과 같은 시원함도, 녹색처럼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편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란 다채로운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색은
모든 것을 회피해버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선택해버리는
대답 자체에 또 다른 의문으로 대답해 버리는 색이었다.
“어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 애초에 이지 선다는 좀 그런 거 아냐? 적어도 5개 정도는 선택지를 줘야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했던 말은 소녀들이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유피테르는 변해버린 소녀들의 분위기를 보며 직감했다. 대답을 듣기 전과 듣고 난 후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미스테리했지만 우호적이었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으니까.
얼굴색도, 존재감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보고 있던 소녀들의 눈동자에 분노의 색이 점점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타인의 분위기와 표정에 민감했던 과거를 지닌 유피테르는 빠르게 그것을 잡아낼 수 있었다.
“아, 오해하지는 말아 달라고? 너희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나. 어쨌든 내 생각에 회색은 선택하는 걸 포기한 색이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소녀들을 앞에 두고서 유피테르는 왜 회색인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흑과 백의 소녀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유피테르가 이야기를 계속하게 놔두었다.
그녀들이 자신을 제압할 물리력을 가졌는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피테르는 편안한 태도로 손짓을 곁들어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색은 가능성을 지닌 색이야. 흰색 빛을 잔뜩 머금은 검은색이지. 검은색으로 점철된 아픈 과거를 지닌 사람이, 자신만의 새로운 색을 얻기 위해 나아가기 위한 두 번째 시작 지점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마나를 가지지 못해 멸시받았던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과거에 감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과거를 이겨낸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과거의 악몽이 그를 지배하기도 했으니까.
어린 시절에 받았던 트라우마는 그 어떠한 시기보다 생각 외로 끈질기게 버티기 때문에.
그녀의 가르침을 받을 때도 유피테르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과거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녀가 준 힘으로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을까? ‘마나’를 갖게 된다면 과거와는 다른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은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세계의 기억’은 그로서는 건들 수 없었으니까. 세계에 아로새겨진 자신에 관한 여러 기억을 모두 없애는 건 창조신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기억 조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마나에 간섭하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도 감히 신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과는 다르게 ‘그녀’는 가능하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 때문에 유피테르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사람의 욕심으로 세계를 바꾸는 일을 절대로 허락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헷갈려하는 유피테르에게 아, 그렇지만 그걸 진짜로 실행하라는 건 아니야, 정말로 하면 혼낼 거니까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그 후, 그녀에게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소중한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약속’했다.
“그런 거라면 합격….”
“…이야.”
회색에 대한 설명을 들은 소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이 공간에 왔을 때와 같은 환한 빛이 세상을 채워서 유피테르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빛과 함께 귓가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지금 시급한 건, 이곳에서 나가는 일이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면 델포이로 가는 계획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이 펜던트는 어디까지나 선물이었다. 애정으로 준 선물로 유피테르가 해를 입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마리안느는 견디지 못할지도 몰랐다.
빛이 없어졌다고 느껴지자 유피테르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유피테르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피테르 오라버니!”
“유 오빠! 괜차나?”
“유피!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했잖니.”
“아, 드디어 돌아왔네요. 딱히 대단한 일은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카테리나, 마리안느, 아리엘이 그에게로 헐레벌떡 다가오며 그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이상한 공간 속에서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고, 단순한 선문답에 대답한 것이 다였다. 유피테르는 가족들에게 몸에 문제가 없다며 안심시켰다.
애정과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유피테르는 현실로 돌아왔다고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마나와 상관없이 가족의 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 명은 한때 그가 가장 굶주려있던 것들을 잔뜩 채워주었다.
유피테르는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존재가 목걸이에 잠들어 있는 정령이라는 사실도 아리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거기서 기묘한 느낌을 주는 아이들을 봤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신성한 느낌인 거 같기도 하네요.”
“그건 펜던트에 깃든 고대의 정령들이야. 정말로 가주로 인정받은 거구나?”
아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카르멘에게 가주 인정 시험의 정령들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들었기에 아들의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인류의 정점이었던 카르멘조차 꽤 애를 먹었다고 털어놓았었으니까.
가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란 게 무엇인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 카르멘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녀도 선대 황제에게 황실과 4개의 공작 가문에 전해지는 아티팩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소중한 아들 유피테르가 시험 장소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카르멘은 무언가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유피테르는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리고 이는 유피테르가 공식적으로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마, 그곳에서 아무 일 없이 돌아와 진 걸 보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역시 유 오빠야!”
유피테르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긍정했다. 마리안느는 그 옆에서 무슨 일인지도 정확히 모름에도 행복한 표정으로 마음껏 기뻐했다.
‘가주’ 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아직 어린 마리안느가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유피테르조차도 가주가 무엇을 하는지 확실하게는 알지 못했으니까. 카르멘이 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높았으니까.
카르멘은 혼자서 다양한 일을 손쉽게 해치운 초인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가문을 운영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마도사’인 카르멘은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믿음직했으며 그의 판단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실제로, 리스트 아르테미스가 이끌던 시기보다 카르멘이 가주로 있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보유하는 걸로 평가하는 호사가들이 많았다.
“그래도 일단 가주라고 선포하기는 시기상 좀 그렇네요. 가문의 호위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해요.”
카테리나는 오라버니의 적들이 더 늘어날까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이 배신자의 가문이 되어 적이 상당히 늘어난 상황에서, 겉으로는 힘이 없어 보이는 오라버니는 암살의 표적이 되기 쉬웠으니까.
마법으로 인한 암살은 마도사 급이라도 위험하다는 게 상식이었다. 마법의 종류는 무궁무진했기에. 일부러 알리지 않은 마법들도 많았고, 이 중에서는 암살에 최적화된 마법들도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고위 마법사가 많다는 역사가 이를 분명하게 증명했다.
게다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절대로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의 결계는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복구할 수도 없었다. 오라버니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카테리나도 알았다.
그럼에도 걱정하는 건 가족의 특권이 아닌가. 델포이의 교수라는 자리는 굉장히 많은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곳은 아카데미의 형식을 띤 정글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일단 이곳에서 있던 일은 우리만 아는 사실로 하자. 다들 알아들었지요?”
아리엘은 카테리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가주가 누가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유리스 황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였다.
4대 공작 가문은 황실이 내려준 아티팩트가 직접 판단해서 가주로 임명하고, 가주 취임 파티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구조였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황제를 직접 만날 필요는 없었다.
아리엘은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 집사들 그리고 근무를 서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지금 본 사실을 함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곳에는 가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식 후계자를 배웅하는 것이기에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고 있었다.
“옙!”
당연히 가문에 남은 자들은 누구보다 의리가 있고, 대가 없는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녀의 말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본 신비한 현상을 통해 그들의 새 가주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이 가문은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유피테르에게 보게 된 것이다. 마치, 모습을 바꾸는 밤하늘의 달처럼.
얼떨결에 가주의 지위를 얻게 된 유피테르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델포이 아카데미로 여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