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47화 (47/265)

떠오르는 초승달(7)

* * *

헤르만과의 일대일 대결 후, 승리한 유피테르는 항의서를 그대로 거부하고 제안서를 원로원에 보냈다. 그걸 본 원로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입니까 원로원장!”

“카테리나 님을 가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소이까?”

원로원은 하나가 되어 분개했다. 원로원장은 돌아온 대공자에 대한 소문을 믿지 말라고 말하며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했었으니까.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가문을 그들의 수중에 넣어오겠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헤르만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미안하오. 대공자는…. 그는 생각보다 더 괴물이었소.”

“아니, 그런 사과로 이게 해결될 일이오? 대공자가 가주가 된다면 이 가문은 멸망할 것이외다.”

“그렇소. 그런 저주받은 자는 최강의 가문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한두 개입니까? 그걸 대공자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원로원장 헤르만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지금 항의하고 있는 원로들은 모두 그의 의견에 따라 대공자를 어렸을 때부터 괴롭히려던, 아니 죽이려던 사람들이었다. 유피테르가 가주가 된다면 원로원에는 피바람이 불 게 뻔했다.

돌아온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는 그의 아버지만큼 강해 보였으니까.

“후후, 다들 그러지 말고 진정하세요. 우리끼리 싸운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적이 누군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라구요.”

교활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부 원로원장 헤세의 말에 원로들은 싸움을 멈췄다. 헤세의 말이 틀림없었으니까. 한배를 탄 원로들끼리 싸워봤자 다른 세력의 배만 불려주었다. 그런 것은 원로원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원로원이 원하는 건 단 하나. 리투아 제국 최강의 가문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이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헤르만은 유피테르가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요청한 것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로원들은 그 내용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으며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원로원들이 모여서 계략을 꾸미고 있을 때, 유피테르와 얼음성에 남은 가족들은 마리안느를 간신히 설득하고 있었다. 그가 델포이 행을 결심한 것에 카테리나와 아리엘은 누구보다 기뻐했지만, 마리안느의 반대라는 큰 산을 넘으려 온갖 방법을 사용했다.

“마리안느. 네가 좋아하는 리투아 건국 기념 스페셜 인형 세트 사줄게.”

“마리. 유피 오빠는 델포이에 가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용사님이 되어야 한단다. 마리도 좋아하는 유피 오빠가 더욱 유명해지면 좋지 않을까?”

“오라버니께서 평생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마블링 시기에 축제도 여니까. 그때 언니한테 오면 같이 놀 수도 있단다.”

“아, 아라써…. 대신 유 오빠 꼭 보러 가꺼야. 축제도 보러 가꺼야!”

가족들의 열성에 마리안느는 결국 포기했다.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워 오라버니를 실망시킨다면 영영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으니까. 그녀는 소중한 사람이 더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달의 몰락은 한 소녀의 생각을 어른스럽게 만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마리안느의 허락을 얻어 낸 가족들은 유피테르가 델포이 아카데미로 가기 위한 조건들을 하나씩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리엘은 통신을 통해 아카데미 단기 교수로 재직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실히 보장받았다. 델포이 아카데미의 학장 ‘피티아’와 오랜 이야기 끝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낼 수 있었다.

“얘, 오랜만이다. 뭐 추천서? 네가 써주는 거라면 믿을 만하긴 한대…. 그 아이라면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반대할 수도 있어. 아무래도 모의전 정도는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추천서 이야기를 들은 피티아는 실력이 확인되지 않은 유피테르를 교수로 임명하기에는 어렵다고 했다. 파르테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실력을 중시하는 델포이에서 학생보다 약한 교수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티아. 내가 보장한다니까 말이 많아? 일단 보고서 판단해. 영 마음에 안 들면 그때는 포기할 테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대했다. 그럼 네가 직접 실력을 확인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로 밀어붙여서, 적어도 테스트를 볼 수는 있게 만들었으니까. 일단 테스트를 한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쳐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 정도로 아리엘은 유피테르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 카르멘보다 그의 아들이 훨씬 믿음직하다고 느껴졌으니까.

다음으로, 후계자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했다. 후계를 이을 만한 자식이 3명이나 있는데 언제까지나 가주 대행으로 가문을 이끌어갈 수는 없었기에.

“저는 아르테미스 가주 자리를 포기합니다. 유피테르 오라버니가 그 자리에 훨씬 어울리시는 분이에요. 모두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들리나요? 전 가주 자리에 관심 없습니다. 새로운 마도 엔진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도 바쁩니다. 그런 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해주세요. 그럼 이만.”

카테리나는 원로원들을 모은 후 가주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제이스란 역시 영상 구슬을 통해 유피테르를 지지한다고 전했다.

이러한 발언을 가주 대행 아리엘과 원로원장 헤르만 그리고 1 마법사단의 리테리아가 보증했다. 가문의 3대 기구가 차기 가주 직으로 유피테르로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유피테르는 가문의 일원 모두가 인정하는 공식 후계자가 되었으며, 간단하게 축하연도 열렸다.

“가주 대행. 대공자를 가주로 만들고 싶은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원로원은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야 고마운데 대체 왜…?”

카테리나와 제이스란이 포기 선언을 하기 전, 아리엘은 갑자기 원로원장인 헤르만이 찾아와서 유피테르를 가주로 만드는 것에 힘을 실어준다고 이야기하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장을 주축으로 원로원 모두가 목숨을 걸고 반대하던 일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는 유피테르가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까지 연결하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헤르만이 암살자의 성향을 완벽하게 살려서 누구도 모르게 유피테르를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그런 헤르만을 손쉽게 제압하기도 했고.

카테리나와 제이스란을 후계자로 삼으려던 세력들은 그걸 보고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탈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아르테미스 가문은 난파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갔다. 시간은 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흘러 유피테르가 델포이 아카데미로 떠나는 아침의 해가 밝았다. 공식 후계자가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이었지만 공작 가문치고는 초라한 배웅식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직 얼음성의 복구가 한창이었으며 사용인들과 마법사단이 제대로 충원되지 않았으니까. 인성 면접, 실무 면접 등을 거쳐야 했기에 그렇게 빠르게 모집할 수 없었다. 이 기회에 물갈이를 해버리자는 유피테르의 의견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속도는 더욱 더뎌졌다.

가문과 제국을 그리고 인류를 배신한 불명예스러운 아르테미스의 고통을 분담할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득이 없다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잊혀진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불변의 진리였다.

“드디어, 네가 아카데미로 가는 모습을 배웅해 줄 수 있게 되었구나.”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복구된 얼음성 입구 앞에서 아리엘이 유피테르를 안아주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끌어안는 모습은 그야말로 훈훈한 광경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가족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끈끈한 가족의 정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녀의 첫째 아들이 파르테논 아카데미로 갈 때에는 그 누구도 배웅하지 못했으니까. 패배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라. 그게 카르멘의 명령이었다. 달의 가주는 자식에게마저 너무나도 차가운 사람이었다.

아리엘의 옆에서 마리안느의 손을 잡고 있던 카테리나의 얼굴에는 감격한 표정이 가득했다. 드디어 가슴 속에 있던 짐을 내려놓았으니까. 오라버니를 정식 후계자로 확정시켰고 델포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초빙해 과거의 악소문을 없앨 기회도 얻었기에.

“텔레포트 게이트 작동이 힘들다고 해도 조금 무리하면 가능한데…. 굳이 걸어서 델포이까지 가시겠다구요? 위험하기보다는 늦지 않겠어요 오라버니?”

조금은 걱정된 카테리나가 물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학장에게 인정받으려면 절대로 늦어서는 안 되었다. 오라버니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늦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델포이의 학생회장으로 있는 그녀는 피티아가 어떠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교수보다 말하기 힘든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그녀의 성격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공포 그 자체였다.

“걱정하지 마렴 리나. 과거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이곳에서 델포이까지 멀다고 해도 못 갈 정도는 아니야. 여차하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도 가능해. 말 정도라면 충분하지.”

유피테르는 흔히 귀족 자제들이 사용하는 마차나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이 결정에 카테리나가 과거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어떡하냐고 우려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피테르가 사라진 일은 그야말로 트라우마였으니까. 의외로 요양까지 떠났던 아리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온 아들의 강함을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고 믿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가볼게? 델포이에서 만나자 리나.”

“잠시만 유피 오빠! 준비한 게 이써!”

헤어짐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실천하려는 유피테르를 불러세운 건 마리안느였다. 그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 듯 카테리나의 뒤에서 유피테르를 빼꼼히 보고 있었다.

첫째 오빠가 정말로 떠나려 하자 큰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아장아장한 걸어가 손을 달라고 했다. 유피테르는 마리안느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그녀가 시킨 대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리안느는 소중하게 품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유피테르의 손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올려놓자마자, 자신의 역할은 다했다는 듯 깡총 뛰어 뺨에 뽀뽀하고 쪼르르 카테리나의 뒤로 도망갔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부끄럼을 타는 귀여운 눈 다람쥐 같았다.

유피테르는 손을 오므려보았다. 무겁지는 않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잡혔다. 다시 주먹을 펴 확인해보니 그건 목걸이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초승달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게 선물? 하지만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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