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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45화 (45/265)
  • 떠오르는 초승달(5)

    * * *

    그러나 유피테르의 생각과는 다르게 헤르만은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난과 굴욕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왔기 때문에 원로원장에 오를 수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카테리나 님에게로 넘겨라. 쓸모없는 자식.”

    실종 기간 무언가 한 수를 배워와 빌어먹을 가주를 막았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그가 활약해서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고작 그것뿐이었다. 저주받은 대공자라는 소문이 떨어트린 가문의 명예는 그 정도로 회복할 수 없었다.

    황실을 제외한 귀족들 중 아르테미스 가문은 늘 최고여야만 했다.

    그는 리투아 제국에서 최강으로 군림하는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을 탐내는 것이지, 나락으로 떨어진 배신자의 가문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가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저 망할 대공자부터 쳐내야 했다.

    헤르만이 내던진 종이는 일종의 성명서였다. 거기에는 유피테르가 아르테미스 가문의 후계자 지위를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부분의 원로들은 대공자의 능력 부족을 의심하기에 카테리나 아르테미스에게 후계자 지위를 넘기라고 되어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경험이 부족한 카테리나를 원로원의 입맛대로 주무르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뻔히 보여 유피테르는 웃었다.

    “아무리 몰락했더라도 이곳은 공작 가문이야. 귀족 의식이 강한 리투아에서 대공자의 지위만 있으면 평생 쉽게 살 수 있는 거 모르나?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고작 이것뿐이라면 그냥 뒷방 늙은이들과 다를 게 없는데?”

    유피테르는 코웃음을 치고는 제안서를 헤르만에게 집어 던졌다. 그 손길에는 충분한 마나가 담겨 있었다. 종이는 빠르게 날아가 퍽 소리를 내며 얼굴로 직격했다. 그리고서는 주르륵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종이가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집무실 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하…. 이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모를 줄이야.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호랑이의 자식이라고 다 같은 맹수는 아니라는 건가?”

    다른 이가 아니라 유피테르에게 무시를 당한 건 참을 수 없다는 듯, 헤르만의 눈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끌어 올린 마나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유피테르를 압박했다.

    그러나 헤르만보다 훨씬 강한 카르멘과 에키드나를 격퇴한 유피테르에게 그 압박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일 뿐이었다.

    헤르만은 퍼스트 서클의 끝을 보고 있는 마법사였다. 아르테미스 직계의 사람이라 혈계 마법인 얼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세컨드 서클 마스터에 가까운 카르멘과 서드 서클 이상으로 보이는 에키드나 앞에서도 당당했던 유피테르였으니, 헤르만의 협박 같지 않던 협박이 그에게 먹힐 리 없었다.

    준비한 방법이 고작 힘으로 겁박하는 것이라는 판단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적진에 혼자서 올 때는 항상 최악의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서 와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죽음만이 용감한 자를 기다릴 뿐이었다.

    “실망인데. 고작 이 정도가 원로원의 경지라고? 이런 실력으로 최강의 가문을 논하다니 웃음조차도 안 나오는군. 뭔가 이상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아?”

    “네 놈이 뭔데 나를 평가하느냐? 이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걸음마를 뗀 놈이 감히!”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아마 당신도 알 거로 생각하는데?”

    “…?”

    뜬금없는 유피테르의 말에 헤르만도 잠깐 행동을 멈췄다. 경계심을 그대로 유지하고서 대공자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허튼소리를 하면 이 자리에서 실력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가주를 잡은 것은 우연이겠지. 본 사람 모두가 애들이었고…. 그런 게 사실일 리가 없어. 다들 미쳤군.’

    “새 와인은 새 통에. 이미 버린 시큼한 와인은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간단하지? 옛말은 틀린 게 없다니까?”

    고인 물이 되어버린 세대는 이만 빠지라고 암시하는 그 말에 헤르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유피테르에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감히!”

    헤르만 식 암살 마법 ― 얼음의 칼날

    원로원장은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후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유피테르에게 다가가 찔렀다. 그의 양손은 깨지지 않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도를 쥐고 있었다.

    헤르만 아르테미스.

    그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을 누비며 이름을 떨치거나 엄청난 공을 세운 사람은 아니었다. 이름도 칭호도 없는 그가 원로원장에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누구보다 적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적들을 암살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구를 암살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전대의 가주 리스트만이 알고 있다고 소문만 무성했을 뿐. 하지만 아르테미스를 적으로 돌린 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로 하나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강력한 힘을 보유한 달의 가문을 감히 노리는 자는 없었다.

    리스트에서 카르멘으로 이어지는 최강의 가주들. 제국을 넘어 대륙에 맹위를 떨치는 4개의 마법사단. 소리소문없이 활동하는 암살자를 적으로 돌리기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제국의 북쪽에 있는 달의 가문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엄니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맹수였다.

    “소문만 무성했던 이름 없는 암살자가 당신이었구만?”

    지금 비밀스럽게 유지되어 쉽게 정체를 알지 못한 무명(無名) 암살자의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주변을 얼어붙게 했다. 냉기는 대상의 판단력을 흐트러지게 해서 불필요한 행동을 유도했다. 지독한 얼음의 기운 속이었기에 존재감을 확실하게 지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들킬 확률을 현저하게 줄이고, 암살 확률을 확실하게 높였다.

    “꽤 효율적인 전법이네.”

    유피테르는 헤르만의 전투 방식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움직임에 군더더기도 없었고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들어갈 때와 뺄 때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 많으면 곧 죽는 법이다. 애송아. 어른의 세계라는 걸 가르쳐주마.”

    자신 있는 말투와는 다르게 헤르만은 초조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으니까. 순간적으로 발끈해서 먼저 공격한 건 분명히 실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겁을 주면 이 애송이는 어느 정도 타협을 시도해야 정상이었다.

    “애송이는 과연 누굴까? 이 정도로는 마리안느도 이기지 못하겠는데?”

    초조한 헤르만과 달리 유피테르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헤르만이 대인전에 충분한 자신감을 느끼고 있더라고 해도, 가정이 진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의 조건이 필요했다.

    반드시 첫 공격에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암살자의 한계였다.

    이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헤르만은 그냥 빠르게 움직이는 표적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장점이 사라진 마법사는 더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고 나갈 수 없었다. 지금 유피테르와 대립하고 있는 헤르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가지고 있는 패가 참여한 모두에게 보이는 상황에서 카드 게임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첫 공격이 막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상대하기 수월하다고 생각한 헤르만은 점점 초조해져서 전혀 유효타를 맞추지 못했다. 암살자에게 시간은 금보다 귀한 것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고, 이는 곧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무나도 쉽게 공격을 예측해서 피하는 유피테르를 보고 결국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대체… 넌 어떤 마법을 쓰는 거냐. 시동어도 없이 싸운다고?”

    헤르만으로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지닌 마법사라면 얼음 마법으로 대항했어야 했다. 리스트도, 카르멘도 심지어 자신도 얼음 마법을 기반으로 독특한 전투 방식을 확립했다.

    이는 아르테미스의 긍지이자, 남들보다 한발 먼저 달려갈 수 있는 특권이었다. 혈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같은 출발선에 선 것이 아니었으니까.

    얼음 마법은 속도 자체를 ‘감속’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그 어떠한 강력한 마법도 느리게 다가온다면 어린아이들도 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위력이 약해짐에도 시동어만으로 싸우는 이유는 속도와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저 애송이는 마나 그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마법이 마나가 유피테르를 두려워하는 듯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강제로 움직여보려고 해도 위력이 줄어들더니 이내 없어져 버렸다.

    “고작 이 정도가 이름 없는 암살자의 힘이라면 아르테미스라는 이름도 그저 허명일 뿐이겠네. 실망인데. 아니, 이만큼 가문을 썩게 만든 카르멘이 오히려 대단한 건가.”

    유피테르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집무실에 피해를 주지 않고자 헤르만의 공격을 흘려내고만 있었다. 첫 공격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지만, 그다음 공격부터는 날카로움이 부족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헤르만은 결국 눈앞에 있는 빌어먹을 대공자가 자신의 예상을 상회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다했다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전력을 다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쯧. 그래 졌다. 졌어. 네 놈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군.”

    결국, 헤르만은 손에 있던 얼음의 칼날을 해제하고서 항복했다. 꽤나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이 위험하다고 계속 경보를 알려왔다. 이 선을 넘으면 그는 지금까지 이룬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일단 앉아봐.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가문 시스템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개 있으니까. 당신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인걸?”

    유피테르는 간단하게 손을 움직여서 난장판이 된 집무실을 청소했다. 그의 마나에 이끌려 부서졌던 것들은 한곳으로 모였고, 그나마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원래 자리로 이동했다.

    “역시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그 모습을 보고서 헤르만은 작게 탄식했다. 청소 마법은 익히기만 한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걸 사용한 것이 신의 저주를 받았던 유피테르라는 것과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두 개의 사실은 그가 가진 혼란을 더욱 크게 만들 뿐이었다.

    제로 서클의 마법이라도 시동어 없이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강이라는 칭호에 걸맞던 카르멘 역시 무영창 마법만 가능했을 뿐이었다. 카르멘조차 넘을 수 없었던 마법의 한계가 그의 아들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헤르만은 원로원의 정보 조직을 통해 얻은 정보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대공자는 카르멘보다 심연 속에 사는 괴물이었다. 늘 그를 살려주었던 감이 제대로 경고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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