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초승달(4)
* * *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의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달라고 할 순 없어요.”
유피테르가 가문을 버렸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모든 걸 버린 건 아니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쓸 거라고 결심하긴 했다. 그러나 인간의 길을 완전히 버려버린다면 다시 만난 ‘그녀’가 슬퍼할 것이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유피테르는 원하지 않았다.
“단기 교수는 정교수와 다르게 학장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채용할 수 있다. 어차피 한 학기 정도니까.”
“맞아요. 저도 아카데미에서 오라버니를 보고 싶어요.”
유리스 황자가 유피테르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짚어주었고, 카테리나는 꼭 델포이 아카데미로 와달라고 말했다.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강의력을 증명받고 곧 이어질 교류전 ‘마블링’에라도 참여한다면 뜬소문을 모두 없앨 좋은 기회였다.
“그래. 네가 직접 가서 보고 무언갈 알려준다면 든든하지. 너라면 설령 마왕이 나타난다고 해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까.”
프레이야도 유피테르가 델포이 아카데미로 떠나는 것에 동의했다. 마족에게 ‘두려움’ 그 자체인 그가 직접 델포이로 가서 확인해준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니까. 자신이 가고 싶었지만, 밀린 임무가 너무나도 많았다. 성녀는 너무 바빠 괴로운 직책이었다.
유피테르의 아카데미 행을 유일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마리안느였다.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리엘의 손길이 없어지자 눈을 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오빠의 아카데미 행을 듣고야 말았다.
“유 오빠는 여기서 나랑 더 놀아줘야 해. 다른 곳에 가는 건 반대야! 반대라구. 왜 날 버리구 가는 거야.”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마리안느는 첫째 오빠가 얼음성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워낙 잘해주기도 했고, 아버지의 배신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믿을 수 있으면서도 든든한 힘을 가진 사람을 원했다.
단지 불안할 뿐이었다.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장 이뻐해 주던 아빠가 주저하지 않고 마법을 날렸으니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메이드들의 죽음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유피테르에게 쪼르르 달려가 온몸으로 그를 가리려 노력했다. 절대로 그를 아카데미로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긴 시위였다. 귀여운 외모와 자그마한 몸짓으로 그것마저도 귀여워 보였지만 말이다.
“이리로 오렴 마리.”
아리엘이 그런 그녀를 불렀음에도 소용없었다. 마리안느는 완강하게 버텼다. 오빠가 가문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제발 자신의 말대로 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안해. 이 정도로 도와준다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정말로 가야만 하는 거예요? 여기서도 정보를 얻을 방법은 업써요?”
어머니가 베풀어준 호의를 무시할 수 없었고, 마족의 활동도 신경이 쓰였기에 유피테르는 거의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마리안느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세레인은 그녀의 딸 마리안느를 혼자 두고서 가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대로 유피테르와 카테리나가 아카데미로 향한다면, 그녀는 얼음성에 혼자 남게 되었다. 외톨이가 된 마리안느는 매일 울며 지내면서 잠도 못 잘 것은 뻔했다.
“매일매일 영상구슬로 연락하고 돌아올 때 선물도 사 올게.”
“그럼 같이 가고 싶어요! 유 오빠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자나요.”
유피테르가 타협을 시도해도 마리안느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녀는 그의 힘을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교수’로서 활동할 때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마족을 상대하며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지도 몰랐다.
그에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막내 여동생까지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
“오빠를 보내주렴. 델포이 아카데미로 가는 건 평화를 위해서란다.”
아리엘이 결국 울음을 터트린 마리안느를 안아주며 타일렀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예상한 걸 아니었다. 이 귀여운 아이가 눈물을 흘리게 할려고 델포이 아카데미 행을 제안한 것도 아니었다.
“이 문제는 조금 고민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저 아이가 극도로 반대하니까 말이야.”
“그래, 어쩔 수 없지. 아이를 울리는 건 성국의 교리에 어긋나는 거기도 하고.”
“조금 더 다른 방법을 고민해 본 다음 할게. 괜찮지 마리안느?”
유리스 황자가 먼저 말을 꺼내자, 델포이 아카데미 이야기를 꺼냈던 프레이야가 공감했다. 유피테르 역시 마리안느에게 바로는 가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며 안심시켰다. 결심이 섰다고 해서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저, 정말이지? 나 안 버릴 거지?”
친어머니 세레인, 친아버지 카르멘 모두에게 버림받은 마리안느는 울먹였다. 그녀는 더는 가족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귀여워해 줬던 모두가 등을 돌리는 경험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으니까.
배신자의 막내딸.
그게 지금의 마리안느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수식어였다.
“그럼, 오빠 언니들 쉬도록 이만 나갈까?”
아리엘이 마리안느를 달래며 집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마리안느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유피테르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아리엘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오빠를 믿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럼. 방으로 쉬러 가도록 하지. 차는 잘 마셨네. 정말로 황실을 담당하는 차 선생으로 들이고 싶을 정도로군.”
“나도 좀 피곤하니까 이만 돌아갈게. 푹 쉬어.”
유리스 황자는 유피테르가 타준 차를 음미하며 극찬했다. 황실 교사로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기에 그의 말은 제국 최고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말한 유리스 황자는 손님에게 배정된 객실로 떠났다. 그 이후로, 성녀 프레이야 역시 쉬러 갔다.
“오라버니, 델포이 아카데미 건은 잘 생각해주세요.”
손님이 오기 전부터 이야기하고 있었던 카테리나는 유피테르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차피, 모든 문제는 그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모두가 떠난 집무실에는 고독함만이 유피테르와 함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이 나타난 타이밍이 이상했다. 마치, 유피테르를 나락으로 끌어들이려는 것만 같았다. 에키드나가 보여준 영상 구슬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카르멘과 계약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델포이에 마족이 등장한 건 사실일 것이다. 마족들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그에게는 마족들이 아무리 준비해도 박살 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후계자니까.
생각을 이어가던 중, 마나 감지에 살기가 느껴졌다. 단단한 마나로 뭉쳐진 악의는 분명히 그를 노리고 있었다.
“기척이 너무 뻔한데. 황실에서 사람이 와서 내가 가주가 될 거라는 소문이라도 돌았나 봐?”
“아무리 네가 카르멘의 공식 후계자라고 해도 원로원장인 내게 그런 표현을 할 수는 없을 텐데? 교육이 잘못됐구먼. 쯧쯧. 이러니 가문이 흔들리지.”
올백 머리를 한 은색 머리카락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인지 백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희었지만, 유피테르를 가만히 응시하는 노인의 눈동자 속에는 탐욕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난 은퇴한 원로들로만 이루어진 회의체. 원로원. 그를 향해 욕망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 노인이 바로 원로원장이었다.
원로원은 아르테미스 가문 명예의 전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테미스 직계나 방계가 주를 이뤘지만, 산하 귀족 출신에서도 공을 세우면 충분히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산하 귀족 출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가문의 재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세바스찬 아크타이온은 벌써 차기 원로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일선에 있으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아직까지는 유피테르 담당 집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정 교육 같은 건 당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닐 텐데? 고작 원로원장인 당신이 대공자인 나에게 하대할 수 있나? 그런 법은 내 기억 속에서는 없는데?”
“쯧.”
유피테르는 혀를 차는 원로원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로원장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들 중 으뜸이었다.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대공자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다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메이드를 매수했다.
매수된 메이드는 유피테르가 먹을 음식에 강력한 독을 탔다. 세바스찬의 힘으로 그 음식을 먹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인물을 좋아할 순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꽤나 깊이 뇌리에 박혔으니까.
“바실리스크의 독. 이에 대해서 생각나는 건 있나? 헤르만?”
“바실리스크는 마법사에게 악몽 같은 존재 아닌가. 주로 던전 수호자급으로 볼 수 있는 몬스터지. 소싯적에 한 번 정도 본 적이 있다. 눈을 마주치면 돌처럼 굳어버린다는 석화의 마안을 가지고 있는 희귀한 존재를 여기서 왜?”
“연기력으로 원로원에 들어간 건가? 연기로 유명한 헬레나가 본다면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하겠어?”
“재수 없는 애비를 고대로 닮아서 싹수도 없군. 너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용건을 말하지.”
헤르만이라고 불린 원로원장은 카르멘과 유피테르를 동시에 모욕했다. 그러나 유피테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카르멘은 그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남이라고 하기에는 가까웠고,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카르멘 비제라는 사람은 고작 그 정도였을 뿐이었다.
헤르만은 그런 유피테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 번 더 혀를 차고서는 품에 들고 있던 종이 하나를 책상으로 집어 던졌다. 내던진 종이는 살랑살랑 흔들리며 천천히 날아가 유피테르의 앞에 조용하게 착지했다.
“집단 항의서? 이걸 선물이라고 가져온 거야? 개인적으로는 좀 더 도움이 되는 걸 가져오는 게 어떨까? 명색이 원.로.원.장 이면서?”
유피테르는 떨어진 종이를 빠르게 훑고서 평소 자랑스럽게 여기는 직책을 한 글자씩 끊으며 헤르만을 놀렸다. 아무리 가문의 정식 후계자인 대공자라고 해도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의 모욕은 쉽게 참기 힘들었다.
대공자는 그저 허울뿐이었다. 가문에 많은 공을 세운 헤르만보다 뭐 하나 뛰어난 것이 없었다. 신의 저주를 받아 마나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꼬맹이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