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초승달(3)
* * *
“아, 약혼이 추진되고 있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구나 아들.”
“어, 어머니?”
아리엘은 빙긋 웃으며 약혼이라는 이름의 폭탄이 농담이 아니라고 확인 도장을 찍어버렸다. 그건 아르테미스를 가주로 만들려는 어머니의 계략이었다. 황녀와 약혼한다면 첫째 아들이 가주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벽을 부술 수 있었으니까.
“여동생은 좋다고 말하더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유피테르 군.”
“그렇게 말하셔 난감합니다만. 게다가 유페미아 황녀를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유피테르는 유리스 황자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솔직히 놀랐기는 했지만, 이전부터 어머니가 황실과 연락을 하는 모습을 몇 번 봤으니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다른 고위 귀족과 결혼해서 지지층을 만드는 건 가장 기본적이 방법이었으니.
“유, 유피테르? 정말 그 애랑 약혼하려고?”
“오라버니. 유페미아 황녀는 정말 좋은 아이긴 하지만….”
“와아! 축제다. 축제인 거죠 유 오빠?”
유피테르가 확실히 거절하지 않자 아리엘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테리나의 경우에는 유페미아 황녀가 엄청 상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친구와 약혼 상대는 완전히 다른 거니까. 유페미아가 새언니가 되어버리는 상황은 조금 애매했다.
마리안느는 어른들의 대화가 재미가 없어 졸고 있다 약혼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도 그럴 게 멋진 오빠인 유피테르와 친한 언니인 유페미아 황녀가 약혼한다니. 상상만 해도 좋았다.
“네가 생각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 아이는 심성이 참 착한 아이더라. 이참에 나쁘지 않지 않니?”
“아뇨, 유페미아가 정말로 착하고 좋은 아이라는 건 알지만, 약혼은 조금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은근한 어머니의 말에도 유피테르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절대로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페미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녀’가 있었다. 절대로 ‘그녀’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녀’야말로 지금의 그가 살아갈 수 있는 근원이었으니까.
“어머, 혹시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는 거니? 왠지 느낌이 오는걸.”
어머니는 위대했다. 그녀는 약혼을 돌려서 거절하는 유피테르의 표정만 보고서 아들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추측하는 데 성공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녀의 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요. 한 번 본 거로 약혼은 조금 빠르고 위험하다고 생각되어서요.”
“그래, 이번에는 그런 거로 할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렴.”
유피테르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머니의 직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황실에서 다양한 암투를 목격한 아리엘의 눈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더 공격하지 않고 멈추었다.
이런 건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그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제 약혼 이야기는 그만. 그만하고! 정말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일단, 약혼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느낀 아리엘이 유피테르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태도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진지했다. 장난이 어느 정도 섞인 분위기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얼마든지. 뭐가 궁금한 건데.”
“마족이 다시 한번 대전쟁을 일으킬 것 같아?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대전쟁. 약혼으로 인해 불타올랐던 분위기를 단숨에 내리꽂는 주제였다. 아리엘 역시 이런 주제로 분위기가 나빠지는 걸 느껴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묻지 않을 순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추고 있는 저 은색으로 빛나는 대공자야말로 마족을 가장 잘 알면서 동시에 마족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으니까.
“대전쟁… 은 아닌 것 같은데. 차기 마왕은 아직 선출되지 않았고, 공작급의 마족에서도 에키드나만 움직인 거니까. 카르멘이 인간치고는 강하긴 하지만. 결국, 인간 중에서 일 뿐이지.”
카르멘이라고 부른 유피테르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한때는 아버지였던 사람이었지만, 가문을 떠난 이후 그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카르멘을 우러러보는 사람이 없었기도 했고.
“자네는 꽤나 성국의 사람과 친한 듯 보이는군?”
성녀와 거리낌 없이 마족을 주제로 이야기하자, 유리스 황자가 흥미를 느끼고서 물어보았다. 성국의 인물들은 친해지기 어려운 인상을 주고 있었는데, 성구 크레이타의 고위층 중 하나인 성녀와 소꿉친구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성국에 잠시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교황님과 성녀와 친해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럼. 나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부하 같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유피테르가 간략하게 친해진 경위를 소개했다. 그 말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아리엘이 직접 긍정했다. 성녀가 직접 인정했기에 발언의 신뢰도는 최고치로 올라갔다. 고위 신관으로 갈수록 거짓을 말할 수 없었으니까.
신성 마법은 다른 마법과는 다른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고위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신성 마법이 애초에 창조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성국은 설명했다.
“대전쟁은 쉽게 이야기할 주제가 아닌데. 무슨 징조라도 본 거야?”
성녀나 교황은 창조신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꿈일 때도 있었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일 때도 있었다.
“아직 계시는 없는데, 아르메 제국에서 마족의 활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학생 하나가 보고해 왔어.”
“아르메의 학생이라면 델포이 아카데미? 신성 기관에서 다른 곳으로 첩자라도 보내는 거야?”
“첩자라니, 말이 심하네?”
리투아의 파르테논, 아르메의 델포이, 크레이타의 신성 기관은 모두 특별한 강점을 지닌 아카데미였다. 파르테논은 이론에 기반한 마법 공학을, 델포이는 퀘스트로 인한 실전형 마법사를, 신성 기관은 크루세이더를 배출하는 목적을 지니고 아카데미 생들을 육성했다.
“델포이라면 제가 학생회장으로 있는 곳인데요…? 그런 이야기는 딱히 들리지 않았어요.”
델포이 아카데미로 넘어간 유피테르와 아리엘의 대화에 카테리나가 참여했다. 델포이 현직 학생회장으로 있는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으니까.
“아. 그곳에 1학년 중에 신성 기관 출신이 몇몇 있어. 딱히 밝히지는 않았을지도?”
아리엘이 황급히 말을 돌렸지만,
“정말로 첩자라도 보내는 거야? 전쟁은 신성 대륙에서 시작하는 거였구나?”
“이거이거 무서운 정보를 들었군요. 황자로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군요. 저희도 대비를 해야겠군요. 대공자?”
“그렇습니다. 황자님. 오랜만에 영토를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르테미스 가문을 재건하는 데 부족한 돈은 그걸로 보상하도록 할까? 성국이 상대라면 준비를 철저하게 시켜야지.”
유피테르와 유리스 황자의 합동 공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들은 거대한 바다로 되돌아간 물고기들처럼 신이 나 아리엘을 놀렸다. 무려 성녀의 당황한 모습을 볼 기회였으니까
“그, 그만하라고! 너 정말 피를 보고 싶은 거야?”
“진정하라고. 그래서 마족이 활동하는 게 사실이라면 델포이에 가서 조사라도 해달라는 거야?”
아리엘은 합동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치력 높은 둘의 공격은 생각보다 매서웠으니까. 벗어나기 위해 화가 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건 꽤 잘 먹힌 듯 유피테르는 태도를 바꿨다.
“어, 어떻게 알았어?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대단한데?”
“네 생각은 생각보다 뻔하니까. 델포이로 가고 싶어도 학생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아직 찾지 못했다는 그거 말하는 거야? 꽤 오래 걸리네”
과거 아리엘이 유피테르와 만났을 때, 유피테르는 사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 찾는 것을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꾸어서 소중한 것을 찾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황도 차마 억누르기 힘들 정도의 마나를 가진 그는 다양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마족을 처리한 일들도 있었고, 이를 통해 성국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델포이에 가야 한다면. 학생이 아니라 단기 교수로 가보는 건 어떨까? 친구가 학장으로 있으니까. 추천서 정도는 써줄 수 있어.”
의외의 해결책을 제시한 건 어느새 다시 잠든 마리안느를 보살피고 있었던 아리엘이었다.
아리엘 역시 델포이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남매의 어머니는 델포이 아카데미의 학장과 아카데미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였다. 졸업 후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인연이란 졸업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무서워지는 것이었다. 델포이를 제대로 졸업하기만 하면 여러 국가의 요직이 보장되었으니까.
“추천서요?”
추천서라는 말을 듣고 유피테르는 귀를 의심했다. 황실에서 자란 그의 어머니 아리엘은 암투에 신물이 나서 불법과 편법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사이에 성향이 조금쯤 변할 수도 있었다.
유피테르의 의문은 당연하다는 듯,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있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피테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고운 손을 뻗어 유피테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야말로 사랑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유피테르는 그런 아리엘의 손길을 부끄러워하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이런 행동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싫지도 않았으니까.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거부하는 자식은 거의 없을 것이기에.
그게 어린 시절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단다. 내가 네게 해준 게 많지 않았잖니. 안 그러니? 네 아빠가 그러는 걸 제대로 막아주지도 못했고.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렴.”
“그건 그렇지만….”
유피테르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그의 어머니는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담겨있는 힘에는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한 행동이 그녀 역시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자 황실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단기 교수라는 달콤한 속삭임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근무해야할 기간이 명확하게 정해져있으니까. 아티팩트를 찾는 일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마족이 정말로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분명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말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