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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42화 (42/265)
  • 떠오르는 초승달(2)

    * * *

    “오늘은 딱히, 예정이 없을 텐데 누구지?”

    유피테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의 일정은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제이스란은 이런 분위기는 싫다고 도망쳤고, 기회주의자였던 세레인은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 분은 둘도 없는 공자님의 친구라고 주장하시고 계시고. 다른 분은 황실에서 오셨습니다.”

    친구?

    그 말에 유피테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주받은 공자라고 해서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이한 것들을 좋아하는 귀족도 있었으니까. 이 타이밍에 찾아온 둘도 없는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예상이 가지를 않았다.

    “유피테르― 내가 왔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다시 찾아온다고 그래 놓고서 너무해.”

    ‘또, 여자예요? 오라버니 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신 거죠’

    굉장히 밝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카테리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족 에키드나에 이어 또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한 여성이 등장했으니까. 오라버니의 외모가 사람 같지 않은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은 수준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잠시 기다려주십….”

    “야호, 유피테르. 따, 딱히 널 보고 싶어서 온 것 아니니까.”

    세바스찬의 만류에도 목소리의 주인은 강행 돌파를 해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 방 안에 있던 유피테르 일행은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테리나가 예상했던 대로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였다. 힌트가 많았기에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들어온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 문제였다. 그건 성국의 신관들만이 입는 옷이었으니까.

    심지어 아무 신관이나 입을 수 없는 옷을 그 여자는 입고 있었다.

    “서… 성녀 프레이야?”

    카테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흰색 신관복과 펜던트는 세아니아 대륙의 마법사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는 특징이었으니까. 성녀 프레이야는 엄청난 신성 마법과 특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딩―동. 맞았어. 성국 크레이타의 성녀 프레이야라고 해. 용케 알고 있네?”

    “다, 당신을 모르는 마법사는 없을 거예요. 아마?”

    “우와. 성녀님이야?”

    자신을 알아본 카테리나의 행동이 기뻤는지 프레이야는 자랑스러워했다. 카테리나는 오라버니를 찾아온 사람이 무려 성녀라는 것에 놀랐고, 마리안느는 이야기로만 듣던 성녀를 보고서 신기해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나 레이야.”

    “조금 차갑다? 유피테르. 다시 만나러 온다고 하더니 왜 오지 않는 거야.”

    “이런저런 일로 바빴으니까. 너도 꽤 바쁜 몸이지 않아?”

    “내 명령은 절대적인 법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유피테르 이 바보 멍청이!”

    프레이야와 유피테르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절친한 친구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들에게 벌어지는 연애 전선을 읽었는지 아리엘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프레이야에게서 같이 온 손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 같은 금발과 금안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으니까. 리투아 제국의 황실이 움직인 것이다. 그 시선을 눈치를 챘는지 금발 금안의 남성이 정체를 밝혔다.

    “자네가 유피테르인가. 반가워. 난 유리스 드 리투아야. 부족한 몸이지만 제2 황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지.”

    “유리스 황자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입니다. 얼음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유페미아는 편안히 부른 그였지만, 차마 2황자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2황자라고 해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굳이 황실에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카르멘과 에키드나마저도 리투아 제국 황실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동생에게 들은 것과 비슷하게 엄청난 얼굴이군. 그런 얼굴이면 살기 피곤하지 않나?”

    무언가 황실의 메시지를 들고 왔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유리스 황자의 첫 마디는 뜬금없는 외모 칭찬이었다. 유리스 황자의 외모 역시 보통이 아니었기에 유피테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참았다.

    “칭찬은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버서커 성녀야 원래 그렇다 하더라도 유리스 황자님께서는 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난 왜 그런 취급이야. 유피테르 정말로 나한테 죽고싶어?”

    “아르테미스 가문의 가주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네.”

    “가주 선정의 문제입니까. 황실의 입장도 이해합니다만, 아직 그 부분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유피테르와 유리스 황자 모두 날뛰고 있는 프레이야를 가뿐히 무시하고서 대화를 이어갔다. 황실에 있어서는 4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의 가주 자리가 비어있는 건 큰 문제였다.

    현시대는 그나마 평화로운 시기였다. 제국 간의 전쟁도 적었고, 던전이 막무가내로 늘어나지도 않았다. 이러한 평화 속에서 아무 징조도 없이 ‘달의 몰락’이 일어났으니 황실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잊혀진 시대처럼 마족이 전면적으로 활동한다면 현재의 인류는 멸망할지도 몰랐다.

    “내가 듣기로는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자네가 가주를 맡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던데.”

    “하하, 칭찬이 과하시네요. 저는 가주를 맡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마나도 사용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대공자인데 말이죠.”

    “그런 사람이 마족과 조디악의 일원을 물리쳤나?”

    유피테르는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했지만, 유리스 황자는 단호했다. 어떤 정보를 듣고 왔는지 넌지시 유피테르가 가주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다. 유리스 황자의 금색 눈동자 속은 거절은 거절한다는 뜻으로 가득했다.

    ‘그때, 소리만이 아니라 영상도 차단했어야 했는데….’

    카테리나의 훈련장을 나올 때 그는 더미 영상으로 바꾸려다 마음을 바꿔 영상은 보이되 소리는 들리지 않도록 마법식을 수정했었다. 그를 걱정하는 카테리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자신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여동생에게 해답을 주고 싶었다.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고 싶었다. 유피테르가 ‘그녀’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카테리나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의 유피테르에게는 카테리나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 잘 보였으니까.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 버렸네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아, 동생이 극찬한 차를 나도 맛보고 싶은데?”

    유리스 황자는 유피테르의 태도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은지 먼저 백기를 들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극찬한 차 맛을 한번 느껴보고 싶었기에. 그의 여동생은 생각보다 차에 대해서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런 여동생이 달의 몰락에서 간신히 살아온 이후 차 맛을 보고 싶어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가 황제께 조르는 걸 몇 번이고 봤으니까. 그 맛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 레이야 그래서 넌 왜 온 거야? 넌 아직 신성 기관 소속일 텐데?”

    유피테르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면서 잠시 동안 잊혀졌던 프레이야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의 집무실에는 유피테르가 자랑하는 비장의 티포트 컬렉션이 있었다. 카르멘이 마시던 것과는 비교과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래 봐도 나는 대륙 모든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검의 성녀거든? 마족이 나타났으면 조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검의 성녀 프레이야. 이게 그녀를 부르는 칭호였다. 단순히 후방에서 보호받는 성녀가 아닌 전장을 헤치며 승리를 부르는 발키리. 그게 프레이야 다르크였다. 세계를 구축한 창조신 레아를 받드는 그녀는 신성 왕국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신관이었다.

    “마족…. 에키드나인가. 뭘 원하지?’

    “네가 봤던 그 마족에 대한 모든 정보. 왜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 같은 거?”

    창조신 레아를 받드는 신성 제국 크레이타는 신에게 반기를 들은 마족을 누구보다 증오했다. 신관들과 그들을 이끄는 교황, 성녀에게 있어서 마족은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나 다름없었다.

    교황은 평소, 잘 나타나지 않는 마족이 나타났으니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여겼다. 대공자 유피테르와 친분이 있는 성녀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사자인 성녀는 그저 유피테르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을 뿐이었지만.

    “에키드나를 상대한다라… 솔직히 넌 상대도 안 된다고 몇 번 말해. 네가 성녀고 신성 속성이라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고작 퍼스트 서클이잖아. 에키드나는 적어도 서드 서클 이상이라고.”

    “그, 그 정도 핸디는 성검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프레이야가 검의 성녀라고 불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검 오를레앙 덕분이었다. 검의 선택을 받는 자만이 크레이타의 성녀가 될 수 있었다. 성국의 아카데미인 신성 기관에 다닐 때, 그녀는 검의 선택을 받았고 성녀로서 다양한 일을 해내며 이름을 떨쳤다.

    “성검에게 물어봐. 난 모르겠으니.”

    유피테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차를 타는 일에 집중했다. 무려, 황자에게 선보일 차였지만 긴장감은 없었다. 각자의 취향에 맞도록 여섯 명이 마실 차를 완성한 그는 조심스럽게 모두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이게 소문의 그 차인가. 잘 마실게. 아 그리고 여동생을 잘 부탁할게.”

    푸흡ㅡ.

    유리스 황자의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프레이야가 마시던 차를 뿜었다. 그나마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아무도 분수를 맞지 않았다. 단지, 마리안느가 신기한 것을 본 것처럼 박수를 쳤을 뿐.

    유페미아 황녀가 달의 가문의 소녀들과 친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유피테르와 저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으니까.

    “무, 무슨 둘이 겨, 결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시네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며 프레이야가 유리스 황자에게 물었다. 절대로 농담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아니 들어야만 했다. 저기 있는 유피테르는 그녀가 먼저 발견한 원석이었으니까. 다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아, 아직 말 안 했나. 유피테르 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유페미아와 약혼이 추진되고 있다네.”

    유리스 황자는 빙긋 웃으며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혼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터트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처음 듣는 것이라는 표정으로 유리스 황자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당사자인 유피테르조차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 한 사람. 아리엘 드 리투아를 제외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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