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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40화 (40/265)
  • 달의 몰락(17)

    * * *

    “카르멘 비제! 정신 차려. 유피테르는 그것까지는 모른다고! 당신과 내가 계약한 것 정도만 알고 있단 말이야.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질 거야?”

    에키드나는 아무리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카르멘의 새로운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랬다. 유피테르에게 준 영상 구슬에는 두 명이 계약했다는 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유피테르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계약은 계약대로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키드나의 말이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카르멘은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피테르가 펼친 고유 결계가 마치 그의 것과 비슷해서 자신이 벌인 그 일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아들이 알 수는 없었다.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답지 않은 실수였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서 빠져나갈까.’

    정신을 차린 카르멘은 상황을 체크했다. 유피테르가 고유 결계를 쳐서 마법은커녕 마나를 사용하지도 못했다. 그 고유 결계가 자신의 것과 너무나도 비슷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지만, 이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아르테미스의 피를, 나이아드의 마나를 잇고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가 참 길지 않았느냐?. 아들아. 날 당황하게 하다니 정말로 대단하구나.”

    “꽤나 여유로우시네요. 아버지. 그대로 울부짖었다면 더욱 인상적이었을 텐데 말이죠.”

    남들이 보았다면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라고 할지 몰랐다. 그러나 폭력과 무관심의 대명사인 카르멘과 마족을 학살한 유피테르의 정체를 알고 본다면 이것만큼 무서운 대화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남을 칭찬하는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어떻게든 고유 결계에서 도망가려고 머리를 쓰고 있는 카르멘을 보며 조소했다. 이건 그가 준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복수라고 해서 그냥 죽이면 만족할 수 없었다. 힘들게 보낸 어린 시절은 고작 이 정도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

    고유 결계는 완전한 게 아니었다. 일부로 한 부분에 틈을 만들어 놓았다. 그걸 발견하고 도망칠 때, 진정한 절망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당신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어. 그 대가를 받을 차례야.’

    유피테르가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카르멘은 계속해서 결계의 약점을 찾고 있었다. 더는 에키드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싸움이었다.

    에키드나에게서 자식 놈이 무엇을 했는지 들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저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서드 서클을 바라보는 자신을 이길 리 없었다. 아니, 절대로 질 수 없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역시 네놈이 날아봤자다….’

    계속해서 결계를 둘러보던 카르멘은 드디어 한 부분의 마법식이 꼬여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하지만, 부족한 아들놈이라면 충분히 할 실수였다. 마나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히든카드가 있었다.

    탐욕의 지팡이 아바라치아.

    마법을 흡수하는 이 아티팩트라면 결계 자체를 무효화하는 건 무리일지라도 약점을 찔러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아티팩트였으니까. 인류 최강인 그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아바라치아. 네 진정한 모습을 보여라.”

    카르멘이 명하자, 아바라치아는 이름값에 맞게 고유 결계 속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잊혀진 시대 때부터 존재한 아바라치아 고유의 마나는 유피테르가 펼친 결계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그러자 미세한 틈으로부터 결계에 금이 가며 부숴지기 시작했다.

    “유피테르의 고유 결계를 부쉈다고? 말도 안 돼. 믿을…수 없어.”

    에키드나는 그걸 지켜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작, 인간이 유피테르의 고유 결계를 부술 줄이야. 저 고유 결계에 얼마나 많은 마족들이 죽어 나갔는데, 고작 세컨드 서클의 카르멘이 결계를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달의 저주

    유피테르가 예상했던 대로 고유 결계가 부서지자 숨겨놨던 마법이 펼쳐졌다.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을 펼치는 듀얼 캐스팅이었다. 숨겨진 마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카르멘은 피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만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자의 한계였다.

    슈욱.

    달의 저주가 그대로 카르멘의 오른팔과 왼쪽 눈에 작렬했다. 얼음 속성을 잔뜩 머금은 마법은 그의 오른팔과 왼쪽 눈을 그대로 얼려버리고서 깨트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젠장! 설마 그 틈이 일부러였다는 말이냐.”

    엄청난 고통에도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카르멘이 소리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에키드나 역시 몸이 굳어버려 움직이지 못했다. 인류 최강 조디악의 일원이었던 카르멘이 단 한 번의 마법으로 팔과 눈을 잃어버렸기에.

    전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다쳐 오히려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카르멘은 넘어진 후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건 예상 못 하셨나 봐? 인류 최강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아직 그 버릇 못 고치셨네. 자기에게만 너그러운 성격을 말야. 그리고 에키드나.”

    유피테르는 상처 입은 카르멘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끝을 낼 생각은 없었다. 무엇을 꿈꾸고 있던 간에 완성되기 직전에 망가트리는 게 가장 통쾌한 복수였으니까. 고작 이 정도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빼앗긴 게 너무나도 많았다.

    “초대 가주가 만든 결계석 가져갔지? 그거 내놔. 돌려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어떡할래?”

    카르멘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곧이어 에키드나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가 찾고 있던 초대 가주의 결계석을 에키드나가 먼저 손에 넣었었다. 그래서 선택지를 주었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결계석을 남기고 뒤를 도모할 것이냐.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줘요. 유피테르.”

    “뭐 좋아. 실컷 고민해봐. 늦으면 늦을수록 거기 있는 네 동료 아마 죽을 거다?”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말에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그녀가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는 결계석은 계획에 꼭 필요한 아티팩트였다. 이걸 넘겨주면 지금까지 노력한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쓰러져있는 카르멘의 부상도 심각했다. 유피테르가 진심으로 마법을 쓴 것이라면 자신의 계약자는 곧 죽을 것이다. 잘려나간 부위는 재생할 수 없도록 없애버렸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사용해야만, 카르멘은 마법사로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계석은 다른 아티팩트로 대신해도 되었다. 계획을 위해선 그가 꼭 필요했다.

    “표정을 보니 이미 결정했나 보군?”

    “받아요. 이게 바로 유피테르 당신이 찾던 결계석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 마법을 발동해 결계석을 꺼내 유피테르에게 던져주었다. 꽤나 묵직했지만, 마족은 신체 능력 자체도 인간과는 급이 달랐다. 그녀가 던진 결계석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대로 유피테르의 손에 떨어졌다.

    “그래 잘 받았어. 이제 마음대로 해.”

    유피테르는 만족스러운 듯 손에 있는 결계석를 던졌다 받기를 계속했다. 드디어 그가 원하던 4개의 아티팩트 중 하나를 찾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먼 길을 지나왔지만, 결과가 중요했다.

    그사이 에키드나는 카르멘에게로 뛰어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피테르의 마법이 카르멘의 육체를 좀 먹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그의 존재는 세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일단 도망치도록 하죠 카르멘. 어차피 다른 아티팩트를 먼저 찾으면 문제없어요.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요.”

    “헛소리 그만해. 저 결계석이 없으면 제대로….”

    “너무 자기 멋대로인걸? 카르멘. 우리가 진짜로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해?”

    “적어도 계획에 있어서 내 말을 따라주기로 하지 않았나. 네가 가진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내가 필요로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카르멘은 결계석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결계석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키드나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죽지만 않으면, 무엇이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키드나 식 특제 마법 ― 그림자의 포옹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만 하는 것 같네. 유피테르.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빌어먹을 신의 뜻인 걸까?”

    에키드나는 그 말을 남기고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유피테르는 그런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키드나는 그야말로 통제되지 않는 괴물이었다.

    “당신은 절대로 아버지가 될 수 없어. 되어서도 안 되었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카르멘을 생각하며 유피테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카르멘의 생각과 다르게 유피테르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거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모르는 것은 없었으니까.

    마족이라는 공포의 존재가 사라지자 마리안느가 엄청난 속도로 유피테르에게 뛰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정신을 차린 사리아가 부축을 리네아와 카테리나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다. 유페미아는 늘 그렇듯 마지막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유 오빠. 이제, 모두 끝난 거예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나요?”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유피테르는 글썽글썽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안느를 보며 고민했다. 오늘은 마리안느의 생일이었다. 적어도 이날 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해야 할 날이었다.

    가문이 무너진 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아르테미스의 왕관은 유피테르와 더 이상 상관이 없었으니까. 물론, 가주 카르멘 아르테미스의 배신은 엄청난 가십거리로 평생 이어질 것이지만 다른 이슈로 덮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쪽에는 황제가 사랑하는 유페미아가 있었으니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리투아 제국에서 황실과 황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니까.

    “그래, 마리. 악몽 같은 오늘 일은 모두 잊자. 어려운 일인 건 알지만 이런 기억은 남겨둘 필요가 없어.”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잊자는 말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보다 더 괜찮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처받은 어린 새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주기에는 그 역시 너무나도 짙은 수라장에 헤쳐온 사람이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달랐을지도 몰랐지만, 현재의 그에게는 그 이상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 오늘 일은 잊고 앞을 보고 나아가야지. 일단 돌아가자. 모두 꼴이 말이 아니네.”

    카테리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얼음성 본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너무나도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났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달의 몰락’이 유피테르라는 단 한 존재에 의해서 마무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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