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39화 (39/265)

달의 몰락(16)

* * *

그 상냥함에 안심해서 소녀들은 먼저 다가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카테리나가 늘 자랑했던 상냥한 오라버니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피테르는 다정했고, 강했으며 동시에 맛있는 차를 타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특히, 유페미아와 리네아는 자신들의 가족과 비교하며 저런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다.

지금의 차가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우리의 약속에 만나러 오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유피테르. 이제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주었으면 하는데.”

“대체 저 쓸모없는 녀석이 뭐가 좋다고 난리를 치는 거냐. 에키드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애원하는 듯 말하는 에키드나의 뒤에서 강제로 끌려와 기분이 좋지 않은 카르멘이 말했다. 위치는 옮겼지만, 아직 그들은 리테리아의 결계 속에 있었다. 성국이나 황제가 지원군을 보내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고 있으니. 바보 같군.’

계획이 무너진 것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게 더 화가 났다. 저 마족과는 필요에 의해 동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모든 면에서 에키드나보다 그가 부족한 게 맞았다. 에키드나가 종잡을 수 없어 보여도 허투루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당신이래도. 감히 유피테르를 모욕해?”

에키드나는 아버님이자 동료인 카르멘이 유피테르를 욕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의 화를 보여주듯 나풀거리는 그림자의 마나가 훈련장 입구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마나의 폭풍이 얼마나 거센지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 훈련장 안에서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마족의 강대한 마나가 느껴지자 카테리나는 마리안느와 일행을 쳐다보았다. 저 정도의 마나는 위험했다. 내성이 없는 제로 서클은 마나가 주는 압력만으로도 기절하니까.

‘폭주하는 마나는 위험할 텐데…. 아니 오라버니가 뭔가 한 걸까?”

카테리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안에 있던 소녀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저, 통신 구슬 너머에서 날뛰고 있는 에키드나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유피테르에게로 향했다.

유피테르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역시, 존경스러운 그녀의 오라버니가 무언가를 한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포스러운 마나에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카테리나. 잠시 이곳에서 저 아이들을 지켜봐 주고 있으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올게.”

유피테르는 그 말을 하고서 훈련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밖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도록 마법식을 바꾸어 놓았다. 천재라고 불리던 카테리나조차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영상을 끊기게 한 것이 아닌 소리만 나오지 않도록 만들었으니까.

카테리나 전용으로 마련된 훈련실 밖.

문을 열고 나온 유피테르의 눈에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에키드나가 보였다. 그래도 동료라는 생각은 있었는지. 그녀의 마법은 카르멘이 아닌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 죄도 없던 얼음성의 건물들이 그림자 마법에 아파하고 있었다.

“에키드나 선물은 잘 받았어. 이런 깜찍한 일을 계획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에키드나의 폭주를 멈춘 건 다름 아닌 유피테르의 목소리였다.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렀는데도 그녀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유피테르….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

“에키드나. 정신 차려라. 갈 길이 멀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나. 리테리아는 어떻게 되었나.”

카르멘은 정신이 나가 있는 듯 보이는 에키드나에게 호통을 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미 그녀는 유피테르의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속도에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유―피―테―르.”

“에키드나. 그래서 대체 언제부터 저자와 계약을 했던 거야?”

유피테르는 카르멘을 턱으로 가리켰다. 에키드나에게 받은 영상을 지켜본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안에 들어있었던 내용은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 만약, 그가 카르멘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키드나! 설마 그걸 유피테르에게 보여 준 건가. 지금 제정신이야? 계약의 내용은 절대로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 아니었나!”

“에이, 유피테르는 남이 아닌걸. 당신과 나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 걸 몰랐어?”

계약자 에키드나가 자신의 아들에게 무엇을 보여줬는지 눈치를 챈 카르멘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내용은 절대로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계약 내용은 두 사람 모두 무덤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 자신의 본심을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너와 나의 사이가 조금 애매한 사이이긴 하지. 에키드나. 그래도 그런 이유만으로 약속을 어긴 걸 용서할 수는 없겠는데.”

유피테르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사실, 이쪽이 원래 그의 태도에 가까웠다.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던 ‘그녀’가 떠난 이후 어떠한 일도 무감각하게 느껴졌으니까.

마리안느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카테리나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어느 정도 꾸며진 것이었다. 지금 모습을 본다면 카테리나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고 하겠지만, 그건 아직 알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를 버린 세계에는 더는 미련이 없었다.

“그, 그치만….”

카르멘과 유피테르 양쪽으로 공격당하는 에키드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유피테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반기지 않을지는 꿈에서도 몰랐다.

“유피테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아아, 빌어먹을 아버지. 그렇게 원한다면 2차전을 하도록 할까? 집무실에서는 서로 힘을 제어했잖아?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아르테미스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보라고.”

카르멘은 아들이 계약에 관한 내용을 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해했지만, 유피테르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카르멘은 그 태도를 보고 유피테르가 쉽게 이야기해주지는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힘으로 알아내라 이건가. 옛날과는 꽤 달라졌구나? 에키드나 남자친구에게 차였으면 이리로 와서 돕기나 해라.”

“치잇, 알았어.”

순수한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카르멘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나와준 아들을 비웃으며 그는 에키드나를 불러 마법사단을 도륙했던 조화 마법을 펼쳤다.

카르멘 식, 에키드나 식 조화 마법 ― 얼어붙은 그림자의 춤

카르멘의 마나와 에키드나의 마나가 한곳에서 뭉치며 날카로운 낫이 유피테르의 주위를 둘러쌓았다. 얼음의 빙결과 어디서 공격할지 모르는 그림자의 속성이 합쳐진 그 마법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에키드나가 있는데도 그런 식으로밖에 마법을 쓸 줄 모르는 건가. 그러니 당신이 발전이 없는 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낮은 수준의 마법이 나오자 유피테르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류 최강이라는 카르멘이 에키드나의 짐이 되고 있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에게 아버지의 실력은 너무나도 하찮았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달빛 눈물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왜인지 유피테르에게만 웃어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모습은 사바트에서 보여주었다던 카르멘의 세컨드 서클 마법에 관한 소문과 비슷해 보였다. 그걸 본 카르멘은 경악했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네까짓 게 고유 결계라고? 이 자리에는 인간을 초월한 마족이 있단 말이다.”

고유 결계.

이전에 카르멘이 설명했듯 세컨드 서클의 경지에 있는 마도사가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투영한 마법이었다. 이 결계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법은 모두 무효화되고 마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무적에 가까운 마법이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고유 결계를 펼치려면 원하는 범위의 마나를 100% 지배하고 있어야 했다. 즉,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면 방해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기적인 성능에 비해서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역시 그때처럼 나오는구나. 유피테르.”

에키드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드나가 그를 무서워하게 된 그때와 비슷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의 유피테르는 마왕 티폰보다 더 마왕 같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신과 같은 무력을 자랑했다.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달빛을 잔뜩 머금은 마나가 결계를 펼치며 공간을 자신의 색으로 칠해갔다. 자연스럽게 카르멘과 에키드나의 조화 마법은 사라져갔다. 마치, 그것이 신의 의지라는 것처럼. 이 결계 안의 모든 마나가 유피테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럴 순 없다…. 네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그래선 마치….”

카르멘은 사라져가는 자신의 조화 마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피테르가 보여주는 그 광경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저건 마치 그가 자신의 마법을 뺏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뭘 기대한 거야 아버지. 적어도 난 당신이 뭘 했는지 알고 있다고. 자신의 죄가 밝혀지는 게 두려운 거야?”

“그럴 리 없다. 이건…. 무슨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거냐 리테리아! 당장 이리로 오지 못해?”

“와.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겠다? 뻔뻔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데?”

이것마저도 리테리아가 펼친 어릿광대의 꿈의 효과라고 생각하는지 카르멘은 자리에 없는 1 단장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봐도 그가 기다리는 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분명한 현실이었으니까.

“카르멘. 도망치죠. 이미 계획과는 상관이 없어지고 있어요.”

에키드나가 현실 도피를 넘어 자기 합리화 중인 카르멘에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지 카르멘은 리테리아를 찾고만 있었다. 에키드나는 처음으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카르멘과 계약한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미 유피테르의 고유 결계가 완성되어서 쉽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의 경지는 차마 에키드나도 도전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니까. 마족 특유의 감지로도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막다른 길이었다.

‘저 마법을 유피테르가 쓰는 걸 보며 과거의 죄를 마주하게 된 건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었어 카르멘? 그 정도로 각오라면 이만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서로를 위해서 말이야.’

카르멘 아르테미스에게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가 있었다. 카르멘과 에키드나만 알고 있는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원래는 카르멘 혼자만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계약을 통해 에키드나도 알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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