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38화 (38/265)
  • 달의 몰락(15)

    * * *

    “당연히 보고 싶었지. 리나야.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고통을 유피테르가 모를 리 없었다. 유피테르는 애초에 자신밖에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과거의 그는 상처받기 싫어서 누구에게나 상냥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할 일도 없었으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무능력했던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애초에 칭찬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기대를 갖지 않는 만큼,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었다. 여동생 카테리나 역시 남들보다 보다는 관심을 가질 뿐, 그녀에게도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자리를 뺏는 것으로 상처를 받고 있을 때도 차를 타주는 것밖에 해줄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여동생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몰랐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돌아오신 거네요. 오라버니.”

    카테리나는 유피테르가 무사히 귀환한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외모는 기억 속의 얼굴과 많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추억과 마찬가지로 오라버니는 여전히 상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차를 우릴 때도, 자신을 간호해줄 때도, 그리고 자신이 힘든 시간표에 불만을 털어놓을 때도. 오라버니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는 그 미소에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직 오라버니만이 자신을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닌 카테리나라는 사람으로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카테리나는 천재라는 칭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상황이 겹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일찍 성숙해진 그녀는 공작 가문에서 아끼는 딸의 위치를 분명히 알았고, 쏠리는 기대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노력할 때, 천재였던 그녀는 그 이상으로 노력했다.

    천재라고 칭송받는 그녀에게도 힘들고 투정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다양한 꿈을 꾸고 싶었던 소녀였기에. 그럴 때마다 유피테르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큰 힘이 돼주었다. 비록 그것이, 유피테르가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남매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행동했음에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신비한 관계였다.

    유피테르는 계속해서 오라버니라고 되뇌며 현실을 믿지 못하는 카테리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손길에 끌리듯 카테리나는 유피테르의 품에 폭 안겼다. 품 안에 있던 마리안느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다가오는 카테리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리안느는 유피테르의 품을 독점할 생각은 없었고,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카테리나 역시 소중한 언니였다. 소중한 사람들의 재회는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처음 보는 카테리나의 모습에 유페미아와 사리아 그리고 리네아 모두 눈을 동그랗게 하고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항상 그녀들에게 조언을 해주던 ‘언니’의 모습이 아닌 ‘여동생’으로서의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카테리나는 그렇게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다. 게다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무언가 특별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일단. 진정하렴. 리나. 사리아라고 했나. 저 아이부터 치료해줘야겠어. 아, 그리고 마리안느, 유페미아, 리네아?”

    유피테르는 여동생을 떼어놓고서 사리아에게 다가갔다. 워낙 고가의 포션을 쓴 것인지 사리아는 목숨의 위기에서 벗어난 듯싶었다. 그래도 출혈이 계속되고 있어서 신관의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응. 유 오빠?

    “무슨 일이시죠. 유피테르 님?”

    “오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사리아 언니를 부탁드려요.”

    유피테르에게 이름이 불린 마리안느와 일행은 자연히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사리아를 지켜보던 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싶어 그들은 마음을 졸였다.

    “지금부터 보는 일을 음…. 비밀로 간직해줄 수 있니?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너희들을 믿어도 되겠니?”

    “그럼요!”

    유피테르의 말에 마리안느는 기운차게 대답했고,

    “당연하답니다. 황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이 정도로 말씀하신다면 기대가 되네요.”

    유페미아는 대공자가 대체 무슨 마법 같은 일을 벌일 것인지 기대감에 잠겼다.

    “빨리, 언니를 구해주세요. 유 오빠.”

    리네아는 그저 사리아가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피테르가 무엇을 보여줄지보다 그가 언니를 고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유피테르 식 신성 마법 ― 완전한 치유

    유피테르는 신성 마법을 이용해서 사리아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카테리나와 유페미아 그리고 리네아는 호흡하는 걸 잊을 정도로 놀랐다. 오직, 마리안느만이 신성함이 느껴지는 따스한 빛을 보고서 웃었을 뿐이었다.

    신성 마법의 효과는 확실했다. 출혈도 멎었고 고통에 힘겨워하던 사리아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저 곤히 자고 있는 듯 보였다. 유피테르는 입고 있던 로브를 사리아에게 덮어주었다. 그가 애용하는 그 로브는 얼음성의 마법과 비슷하게 온도를 유지해주는 기능이 있었으니까.

    “오라버니, 어떻게… 고위 신성 마법을? 그건 성국에서도 일부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아카데미에서 배웠는데.”

    그가 쓴 신성 마법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카테리나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델포이가 실전을 중요시하는 것 맞았지만, 이론을 무시하는 곳은 아니었다.

    “저 마법이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카리나 언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리안느가 카테리나에게 물었다. 가문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그녀에게는 카테리나나 제이스란과 같은 재능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수재(秀才)라는 레벨 언저리였다.

    애초에 후계자 선정에서 몇 발 물러서 있는 마리안느에게 굳이 조기교육을 시키려는 마음도 없었다.

    “신성 마법은 성국의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마법이야. 교황의 인장을 받은 자만이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란다. 마리.”

    마리안느의 질문에 대답해준 건 유페미아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연약한 몸 때문에 다양한 신관을 만나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났던 일부의 신관만이 고위 신성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성국 크레이타.

    그들은 스스로를 ‘마법사’가 아닌 ‘신관’이라고 불렀다.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그들은 ‘신’들을 모셨으니까. 성국 크레이타는 신의 지시를 받았다는 교황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신관들은 혈족 마법과 비슷한 느낌의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국의 신관이 되면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치유와 비슷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성국의 신관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치유력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 유 오빠는 엄청난 사람이었네요! 너무너무 좋아요. 유 오빠.”

    “그래, 오라버니는 옛날부터 특별한 사람이었지. 오라버니야말로 진정한 마법사라고 나는 늘 말해왔었어.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마리안느는 유피테르가 고위 신성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신성 마법은 그만큼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의 첫째 오빠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해한 듯했다. 카테리나 역시 막내 동생의 의견에 동의했다.

    “쉿. 잠시만 조용히 해줄래.”

    사리아가 치료된 후, 훈훈한 분위기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 유피테르가 갑자기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입구를 향해 있었다.

    “오라버니?”

    카테리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무언가 문제가 있냐는 듯 되물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해봤지만, 전혀 짚이는 곳이 없었다. 의견을 구하기 위해 다른 소녀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 역시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의문은 바로 들려오는 한 여성의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바로 해결되었다.

    “유피테르? 이곳에 있나요오? 에키드나에요.”

    “에키드나? 어떻게…. 아니, 이 정도는 마족이니까 당연한 건가.”

    카테리나는 훈련장의 보안실에 비친 영상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에키드나가 보였으니까. 그녀는 수정 구슬을 향해 손을 흔들며 유피테르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친구 집에 놀러 온 아이 같은 태도였다.

    “으으으. 그 마족이에요. 카리나 언니.”

    에키드나가 한 여러 행동을 똑똑히 기억하는지, 마리안느가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었다. 왜 책에서 마족이 인간과 절대로 같이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지 오늘이야말로 알 수 있었다.

    절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오라버니가 함께 계시잖아?”

    “마, 맞아요. 유 오빠가 최강이에요!”

    마리안느는 카테리나를 안아주며 진정시켰다. 그녀 혼자서는 에키드나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에키드나 그리고 리테리아가 계속해서 말한 ‘그’,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가 함께 있었다.

    고위 신성 마법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걸 볼 때, 오라버니는 상상치도 못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리안느는 유피테르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카테리나에게 이제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무도 없는 건가요? 그럴 리 없는데. 이곳에서 분명히 유피테르의 향기가 나는걸. 유피테르. 리나?”

    에키드나는 대답이 없자 유피테르와 리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스토커 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을 만도 했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는 유피테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도저히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키드나를 향해 그는 통신 기능을 켰다.

    “약속을 잊은 건가? 내 앞에 너무 자주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

    통신 영상 구슬 너머로 유피테르와 에키드나가 다시 만났다. 유피테르의 태도는 싸늘했다. 유피테르와 마족 간의 약속은 이렇게 쉽게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후계자인 유피테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와아….”

    “엄청나네요? 저분이 정말로 유피테르 님이신 건가요?”

    그들을 대할 때와는 명백하게 달라진 모습에 소녀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마리안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다과회에서도, 사리아와 훈련할 때도 그리고 지금 그들을 구해주러 왔을 때도 유피테르는 상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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