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37화 (37/265)

달의 몰락(14)

* * *

“귀찮게 하지 말고, 본체로 와라. 리테리아.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도발에 걸려든 에키드나를 보고 이미 추적하기를 포기한 카르멘이 리테리아를 협박했다. 사실 그의 말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옳았다. 호위 마법사들의 상처는 당장이라도 신관들에게 치료받아야 할 정도였다.

“제가 나선다는 건 무언가 승리할 방법이 있다는 거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나 보죠?”

“그런 블러핑은 통하지는 않는다. 카테리나가 도망갈 시간을 벌고 있는 건가?”

카르멘은 리테리아의 생각을 바로 알아채 버렸다. 그녀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카르멘은 추적 마법을 걸어 놨기에 어디로 도망가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우선순위는 리테리아가 먼저였다.

“정확히는 대공자가 이곳에 도착할 시간을 벌고 있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하나 정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미궁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은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시점에서 그 사람은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리테리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카르멘이 점점 두려워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기에.

“딱하기도 하군. 아르테미스의 늙은 암 여우도 힘 앞에선 무력한가.”

날카롭지만 잘생긴 얼굴에 짓는 비웃음은 분명 잘 어울렸다. 마치, 이런 표정을 짓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았다. 밤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달은 그런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비추어주었다.

“당신은 어찌 되었든. 아르테미스 가문의 가주였잖아요.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모두를, 카테리나와 마리안느를 배신하다니…. 아니, 아니죠. 당신은 원래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었죠.”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리테리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랬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카르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최고 명령권자인 가주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상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그 뒷면이 있는지 면밀하게 확인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다른 단장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그녀를 놀릴 때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만 고립되는 상황을 노린 걸지도 몰라서 더욱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자를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으니까. 물론, 이로 인해 아르테미스의 늙은 여우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그런 말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리테리아 오르비스.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건 ‘동료’와 ‘가문’ 이었으니까.

“진실을 알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이 가문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후훗. 내가 알려주었거든, 이 미친 달의 가문의 진실을.”

카르멘은 쓰게 웃었다. 그런 표정은 리테리아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카르멘이라는 사람은 적어도, 저런 식으로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생에서 쓴맛을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아까처럼 비웃음을 짓는데 카르멘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카르멘을 보며 에키드나 역시 웃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마족이야말로 모든 사건의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진실? 항상 거짓을 말한다고 소문이 난 마족이 진실을 입에 담는다고?”

리테리아는 에키드나가 웃는 것이 싫었다. 아니, 그냥 에키드나라는 존재가 증오스러워서 분을 삭일 수 없었다. 저 마족이 아니었으면 그녀의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죽어 나가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런 식으로 개죽음당하라고 굴린 동료들과 후배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민하면서 만든 훈련 과정은 ‘생존’을 위해서였다. 극한의 임무 속에서 더 많이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전 경험을 미리 경험시켜주려는 것일 뿐이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단 하나의 판단이, 상황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항상 최고의 컨디션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테리아가 에키드나를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는 도중, 에키드나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황홀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유피테르를 외치며 그림자를 통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드디어드디어드디어, 유피테르가 왔어. 빨리 그쪽으로 가야겠네.”

“잠깐. 에키드…!”

카르멘 역시 기분파인 에키드나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마법의 범위에 있어서 같이 사라져버렸다. 서클의 장벽은 카르멘과 에키드나의 사이에서도 유효한 것이었으니까. 카르멘이 날고뛰어도 에키드나의 밑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시간을 좀 끈 건가. 그래도 생각한 만큼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했잖아. 너무 손핸데. 이 정도면 부탁받은 일은 해낸 거지 뭐. 이제 뒤는 맡기겠다고 대공자.’

얼음성 결계 속 어딘가에서 리테리아는 담배를 깊게 머금으며 달이 미소를 짓고 있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도착했다고 느껴지는 마지막 카드, 조커(Joker)에게 뒷일을 맡기고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할 일을 다 하고 조용히 휴식 시간을 갖는 노병처럼.

시간을 잠깐 거슬러 올라. 에키드나가 유피테르를 찾으러 사라지기 바로 전. 카테리나가 텔레포트에 성공한 바로 그 시각.

유피테르는 마나 감지를 헷갈리게 하는 ‘어릿광대의 꿈’속에서도 크게 헷갈리지 않고 카테리나와 마리안느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테리아와 미리 이야기되어 결계가 그를 아군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리나의 반응은 저쪽이고. 마리안느와 나머지 아이들도 아직은 괜찮고. 그리고 빌어먹을 아버지와 에키드나까지?’

마나의 반응을 그대로 추적해보니, 카테리나 일행은 얼음성 본성 주변에 있는 카테리나의 개인 훈련장에 와있었다. 바로 코앞이었다. 유피테르가 던전을 돌파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지, 1 단장이 펼친 결계의 효과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카테리나의 훈련실은 인증을 받지 않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리안느보다 먼저 훈련실의 마스터 인증을 받은 사람이 바로 유피테르였다. 있을 자리를 빼앗은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던 카테리나가 훈련을 도와주기 위해 반 억지를 써서 등록시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잘한 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리나의 가능성을 내가 밟은 것일지도 모르잖아.’

유피테르는 카테리나 전용 훈련실의 인증 절차를 하나씩 완료해가며 중얼거렸다. 인증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마나 패턴을 입력하고 미리 등록된 목소리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정도였다.

카테리나가 직접 고안하고 리테리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훈련장의 결계는 인증된 사람에게는 천사였지만, 인증되지 않는 자에게는 거침없는 벌을 준비했다. 침입자를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는 얼음의 조각상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마치, 꽁꽁 얼어붙어 영원한 빙하를 연상시키는 유피테르의 방처럼.

인증이 완료되고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겁에 질렸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목소리. 약간의 경험만 있더라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물론, 유피테르 역시 듣는 순간 알아챘다.

소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서 누구보다 그립고 반가운 목소리였다.

“누구죠!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대체 어떻게 비밀번호를…!”

“오랜만이네. 리나.”

리나,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은 각자에게 달랐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잔뜩 움츠려있던 한 소녀, 카테리나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그 소녀는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아직 성장해야 할 소녀였을 뿐이었다.

좀 더 본격적으로 행동한 건 귀여운 모습으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마리안느였다. 마리안느는 유피테르의 등장에 안도감을 보이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그에게 안겼다. 유피테르도 거부하지 않고 그런 그녀를 안아주었다.

“유 오빠. 진짜 무서웠어요. 너무 많은 일이, 믿고 싶지 아는 이리 마나여. 덩말로 무서워떠요.”

“그래. 안단다. 내가 왔으니 이제 안심하렴.”

울먹이는 마리안느는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을 보였다. 울먹이느라 애교하는 것처럼 발음이 뭉개졌지만, 유피테르는 자상하게 막내 동생을 다독일 뿐이었다. 마음속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배신이란 아직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녹발의 소녀 리네아 역시 포션을 먹이던 손을 멈추지는 않으며 병을 치료할 희망을 찾아낸 신관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사리아의 상처에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을 해소할 수 없었지만, 유피테르의 모습을 확인하자 안도감을 느꼈다.

감각이 예리했던 리네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피테르의 마나에서 무언가 신성한 느낌을 받았었다. 자신이 둔해서 사리아 언니를 다치게 한 죄는 없어지진 않겠지만 유피테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유페미아는 리네아가 마음의 짐을 덜기를 바라며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일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일 뿐이었다.

거대한 폭풍, 해일, 지진은 마법의 힘으로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카르멘 아르테미스의 배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배신하여 자신들을 공격한 건 적어도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유페미아는 리네아가 자책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녀에게는 울면서 사리아를 치료하는 리네아를 설득할 힘이 없었다.

“정말로, 제가 보고 싶었긴 하세요? 유피테르 오라버니. 일주일 전부터 얼음성에 계셨다더니 마리하고만 이야기하고 치사해요. 왜 저를 만나주지 않으신 거세요. 제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천재로서 델포이 아카데미를 호령했던 카테리나는 지금은 오라버니에게 응석 부리는 여동생에 불과했다.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기에는 헤어짐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남매가 헤어져 있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없어지자마자, 후계자 자리를 넘기려는 카르멘과 가문의 문제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가문 원로들의 모습은 카테리나에게 죄악감만 더 키워줄 뿐이었다.

자신이 하나뿐인 오라버니의 있을 자리를 뺏어 버렸다. 오라버니는 이런 자신에게 환멸이 나,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 아닐까? 다시는 오라버니의 차를, 상냥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지낼 수는 없는 걸까?

부(不)의 감정은 전염되고, 점점 거대해져만 갔다. 긍정적인 것과는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은 점점 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했다. 이는 카테리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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