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몰락(10)
* * *
“마리에게 관심을 두지 말아 줄래? 거기 마족. 이제 구면이지 우리? 에키드나라고 했었나 아마.”
카테리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에키드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마리안느의 눈을 가리며 호위 마법사들의 뒤로 마리안느 일행을 전부 이동시켰다.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호위 마법사들은 마리안느 일행을 원형으로 둘러쌓으며 보호했다.
호위 마법사는 일행이 마법 장벽 안으로 빠르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이 확실히 안전한 것을 확인한 후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목숨을 걸 때라고 결심했다. 3 황녀가 평소 그들에게 고생한다며 따듯한 말들을 해주었기에.
황실 소속 마법사들에게 호위 임무는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었다. 언제라도 황실의 일원 대신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했으니까. 딱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호위 대상이 유페미아라면 모두가 먼저 나섰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유페미아 3 황녀는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천사 그 자체였으니까.
“아아. 리나. 이제 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줄 수 있니? 유피테르는 네게 줄 수 없어. 그는 나만의 것이어야 하니까.”
에키드나는 마리안느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지으며 카테리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테리나가 어떠한 답을 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확실히 말해주도록 할게. 오라버니를 만난다면 직접 하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말이야. 내게 있어 오라버니는 고마움을 되돌려줘야 할 ‘가족’이야. 걱정도 의지도 하는 그런 끈끈한 가족. 너는 꿈도 못 꾸는 거지 이런 건? 고작 짝사랑일 뿐이잖아?”
카테리나의 표정은 확고했다. 오라버니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었다. 아카데미의 친구들에게서도 브라더 콤플렉스가 조금 느껴진다고 놀림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결코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어린 시절의 존경심이 불타오른 것에 불과했다.
어린아이가 커서 부모님과 결혼하며 평생 살 거라고 하는 그런 것이었을 뿐이었다.
“시시해라…. 너는 카르멘을 닮지 않았네? 재미가 없어.”
“그만. 에키드나. 아직 리테리아를 찾지 못했어. 그쪽이 더 시급하다.”
에키드나는 김이 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르멘은 그녀가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기 전에 제지했다. 유피테르의 이야기를 하는 에키드나는 그야말로 어디로 샐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카르멘은 왼손에 들려있던 아바라치아를 살짝 휘둘렀다. 그러자 얼음 화살들이 수없이 만들어지며 카테리나 일행을 위협했다. 화살의 날카로움은 그야말로 잘 관리된 검과도 같았다. 단숨에 마법 장벽을 찢을 것만 같았다.
“저를 아주 간절히 찾으시나 보네요. 가주님? 평소에는 잘 찾아주시지도 않으시더니 말이죠.”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에키드나 편의 것도, 카테리나 일행에도 포함되지 않은 제3의 목소리는 단숨에 분위기를 주도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랏빛 머리가 인상적인 리테리아 오르비스였다. 실제 나이를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젊은 외모를 한 그녀는 마법사단의 단복을 입고 있었다. 단복의 등 쪽에는 1 마법사단 단장의 마크가 수 놓여 있었다.
대치 상황에 끼어든 그녀는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리테리아 역시 오른손에 결계 마법을 강하게 해줄 아티팩트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던전을 공략하고 얻은 그 스태프는 아바라치아 급은 아니었으나 꽤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이 사람도 이쁘네? 이 가문 사람들은 다 인간이 아닌 외모를 지닌 거야? 역시 미친 달의 가문인 건가아.”
“집중해라. 에키드나.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고비다. 저건 환영이야.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하나?”
에키드나는 어째서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미의 화신인 것이냐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카르멘은 에키드나에게 집중하라고 촉구했다. 그에게 있어 리테리아의 생각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하필 지금 타이밍에 나타난 거냐. 리테리아.’
리테리아아 역시 인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 서클 유저였지만 그녀의 결계 마법은 범위와 환영 효과 때문에 마나 소비가 엄청났다. 평소에는 단원들과 그녀의 아티팩트가 마나 소비량을 보조해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은 확실히 에키드나와 카르멘을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카르멘은 그 점을 이용할 수 있는 책사였다. 그녀를 지원할 마법사단은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가 해준 이야기가 진실이었네요? 가주님, 정말로 당신이 가문을 배신해버릴 줄이야. 아, 이 모습은 환영이랍니다. 공격하셔도 소용없어요.”
리테리아의 모습은 잔잔하게 느껴질 정도의 바람에도 흔들렸다. 카르멘의 말처럼 그녀는 정말로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영이었다. 카르멘에게 심통이 난 에키드나가 그림자로 송곳을 만들어 리테리아를 노렸다. 그러나 환영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마법이 그대로 리테리아를 통과해버렸으니까.
“역시 유피테르인가요? 유피테르에게서 들었나요? 내게 전해준 말은 있나요?”
에키드나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은근히 물었다. 유피테르라는 이름은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 활력소와 같았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으니까. 그것이 유피테르의 앞이든 앞이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저, 유피테르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에키드나는 행복할 뿐이었다.
“에키드나, 유피테르에게 뭔가 알려주었나?”
에키드나가 ‘그’를 유피테르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고 카르멘은 설마 했다. 리테리아는 분명히 ‘그’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고작 그 말만 가지고 누군지 확정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그들에게는 주의해야 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다. 물론, 유피테르, 리테리아도 그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위험한 힘을 지닌 자들이었지만, 세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율자와 같은 다른 조디악이라거나, 항상 방심할 수 없는 리투아 제국의 황제가 나선다면 ‘달의 몰락’은 실패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마족이라면 치를 떠는 신성 제국의 사람들도 있었다.
달의 몰락은 그들이 가진 큰 그림의 극히 일부였기에,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유피테르가 리테리아에게 무언가 정보를 주었다면, 신성 제국이 올지도 몰랐다.
‘신성 제국이 나타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유피테르에게는 아주 자그마한 단서를 주었을 뿐이야. 그걸로 계획을 알았다면, 그게 인과의 흐름이었던 걸지도오.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여신의 뜻이라구.”
에키드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열심히 변명했다. 평소, 그렇게 증오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여신의 뜻이라고 말하면서까지 카르멘의 화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관계는 동료이면서도 미묘했기 때문에 위태로웠다.
나이도, 마나도, 생명체로서의 존재감도 에키드나가 훨씬 우월했지만, 계획의 주도권은 카르멘이 쥐고 있었다. 황실을 제외한다면 리투아 제국 최고 가문이라고 불리는 아르테미스 가문을 여기까지 키운 게 바로 카르멘이었으니까.
심지어, 에키드나에게는 최악의 단점이 있었다. 상황마다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점과 유피테르에게 집착한다는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단점이. 카르멘은 이런 그녀가 계획의 주도권을 잡게 할 생각은 없었다.
“후….”
카르멘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에키드나의 이런 점을 알고는 있었다. 그가 서클과 세계의 진실에 한발 다가갔을 무렵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미안해. 카르멘.”
“그만, 그만! 지금 필요한 건 사과가 아니라 리테리아를 죽이는 거다.”
계속된 사과에 카르멘은 결국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에키드나가 유피테르에게 단서를 주었고, 그로 인해 리테리아라는 변수가 움직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변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아픈 결론이 날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진다면 여신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1 단장? 혹시 이 상황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나요? 믿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님이….”
이 대화에 흐름에 함께 못한 건 카테리나 일행뿐이었다. 도망치는 데 급급해 방향을 전혀 읽을 수 없었으므로. 그래서 환영으로 나타난 리테리아에게 물었다. 적어도 그녀는 에키드나와 카르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맞아. 가주님은 가문을 넘어 무려 인간을 배신했지. 인류가 마족에게 협력한 건 잊혀진 시대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일이지만…. 아마 이 일은 역사서에 기록될걸? 지금, 역사의 현장에 있는 거라고 거기 아가씨들도. 아, 카테리나 아가씨. 당신의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더군.”
리테리아의 환영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태도는 가벼웠지만 말 속에 담긴 뜻은 무거웠다. 그런 그녀를 보고 카르멘은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리테리아. 널 찾아서 없앴다면, 이제 이곳에서 우릴 상대할 사람은 없다. 어차피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 이 자리에 없던 자들은 그저 마족의 침공으로 아르테미스 가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하겠지.”
“도망친 사람들은 어쩌고? 이 결계가 생성되기 전에 재빠르게 내뺀 사람들도 꽤 있던걸? 귀족들의 그런 꼴을 보여준 건 재미있지만 말이야. 당신답지 않게 무른걸.”
리테리아는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유로웠다. 환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라 그녀의 표정을 읽기도 어려웠다. 결계 마법을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엄청난 마나를 다른 방법으로 보충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카르멘은 조금씩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초조함은 적이다. 어차피 다 예상대로다.’
카르멘은 암시를 통해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다. 평소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믿음.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 시각을 가졌다는 우월감. 한계를 넘고 싶다는 욕망. 이 모든 감정이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
그렇게 암시를 계속하자 카르멘은 마음이 편안해지며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보이지 않은 것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들이 떠올랐다. 어차피 인간을 벗어나는 것이니 더러운 방법도 고민할 필요 없었다.
설령, 마족 같다고 비판받을지라도,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인류의 배신자’ 보다 지독한 나락은 없을 것이기에.
“아 그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한 명을 잊으면 섭섭하다고 가주? ‘그’가 오고 있다고. 당신을 찾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