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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32화 (32/265)
  • 달의 몰락(9)

    * * *

    “저거 죽여도 상관없지? 너무 시끄러운데. 감지에 집중하는 데 방해야.”

    에키드나는 카르멘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녀가 본보기로 귀족 몇 명을 죽이는 것은 계획에 있던 일이지만, 남아 있는 귀족들을 죽이는 것은 다분히 즉흥적인 일이었다. 카르멘은 아르테미스 가문을 완전히 버렸기에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웠던 막내딸 마리안느의 모습이 잠깐 떠올랐지만, 카르멘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마음대로 해라.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애들아. 나와서 같이 놀자.”

    에키드나 식 그림자 마법 ― 그림자 동굴의 축제

    에키드나가 양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만세 하자, 그녀의 그림자에서 여러 동물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그람자의 마법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 것처럼, 그들의 모습은 모두 반투명한 검은색이었다.

    사자, 호랑이, 곰과 같이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부터, 미노타우르스, 본 드래곤 같은 몬스터도 튀어나왔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카르멘의 마법으로 탄생한 얼음 새였다.

    에키드나의 그림자 속에 있어서 그런지, 새는 푸른색과 검은색의 중간 정도 되는 색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짹짹아, 잘 부탁해.”

    그동안 이름도 생각했었는지 에키드나는 그녀를 잘 따랐던 새에게 짹짹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새를 쓰다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시끄러운 벌레들 좀 조용히 만들어 주지 않을래? 사사, 어흥, 곰곰아 부탁해. 아 짹짹이는 여기에 남아줘.”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이 붙여진 이름에 경악하고, 포기해버린 얼음 새의 등을 사자와 호랑이, 곰이 다가와 다 안다는 표정을 하며 두드려주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마법 생물들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로운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검게 변해버린 얼음 새는 선배들의 다독임에 자신감을 회복했는지 당당한 모습으로 에키드나의 옆에 다가가서 그녀를 지키듯 섰다.

    이름을 포기하고 용기를 얻은 얼음 새를 본‘사사’라고 불린 사자와 ‘곰곰’이라고 불린 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미 귀족들을 향하고 있는 미노타우르스와 본 드래곤의 행렬에 참여하러 뛰어갔다.

    미노타우르스는 두 개의 뿔을 자랑하며 귀족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날카로운 도끼는 언제라도 적을 두 동강 낼 수 있어 보였다.

    본 드래곤은 나타난 그림자들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진짜 드래곤이었다면 얼음성 전체의 크기와 비슷했겠지만, 뼈로 만들어진 이 드래곤은 진짜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림자로 만들어진 뼈는 더욱 기괴해서 공포를 자아냈다.

    본 드래곤이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얼음성의 건물들과 정원, 조각품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얼음성이 입는 피해는 결계의 힘으로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 아르테미스가 자랑하는 그 결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에키드나가 마법으로 엄청난 피해를 줬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수호 결계는 세 가지의 엄청난 능력으로 유명했다.

    첫 번째로 외부의 침입을 24시간 동안 감지하고 허가되지 않는 사람이 얼음성으로 들어오는 걸 완벽하게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리투아 제국의 북부에서 베어버릴 것만 같은 추위를 살기 좋은 날씨와 적절한 온도를 바꾸어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이 얼음성이 입은 피해를 복구해주는 것이었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깃발이 꺾인 적은 없으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마법이었다.

    에키드나에게 시끄러운 벌레들이라고 칭해진 귀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에게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리테리아의 결계로 인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고, 자신들을 먹이로 보는데 분명한 그림자의 괴물들이 눈앞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으니까.

    “아니, 마법사 뭐 하고 있어. 저거 어떻게 해봐! 마법사잖아. 저 정도는 물리칠 수 있는 거 아니야? 뭐 못 한다고?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거야?”

    기본적인 생활 마법이나 마나탄 정도는 손쉽게 쓸 수 있다고 평소에 자신하던 귀족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호위 마법사를 애타게 찾았고,

    “아니, 잠시만. 말로…. 말로 하자니까. 돈이 필요한 건가? 돈이라면 여기 보석이 있네. 이 정도라면 자작인 내 몸값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 날 어서 보내주게.”

    귀족들을 쳐다보지 않고 짹짹이를 쓰다듬거나 타면서 놀고 있는 에키드나에게 돈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귀족도 있었다.

    에키드나는 간절함이 가득한 외침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난 고작, 남작이네. 아직 그렇게 높지도 않다고. 인질이나 그런 거로 사용하려면 백작이나 후작 정도는 써야. 아르테미스의 이름에도 격이 맞지 않는가?”

    심지어 인질의 급에 따른 가치를 논하며 자신은 빼달라고 요청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쟁 포로로서 더 높은 귀족이 가치 역시 높은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었기에.

    “아르테미스? 이제 난 카르멘이오. 어느 가문에도 속하지 않은. 굳이 따지자면… 카르멘 리벨리온일까.”

    귀족들의 평소의 가면을 벗어던진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카르멘의 얼굴에는 한심함이 가득했다.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하나 같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평소 연기하고 있던 모습이 사라진, 그 민얼굴은 추악함만이 남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니 보여줄 수 없었던 귀족들의 진정한 모습은 ‘선’이 아닌 ‘악’에 가까웠다.

    “리벨리온이란 이름은 빼줄래? 예비 아버님이라고 해도 당신이 쓰는 건 기분이 나빠. 그건 나와 티폰만이 사용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

    짹짹이 위에 올라탄 에키드나는 ‘리벨리온’이라는 성을 마음대로 붙인 카르멘에게 화를 내며 다가왔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그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리벨리온’ 이라는 성은 그녀에게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단어였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열렬하게 사랑하는 유피테르도 그 이름만은 사용하게 둘 수 없었다.

    “사죄하지. 그럼 내게 어울리는 성 하나만 붙여줄 수 있겠나? 그저 카르멘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겠으니.”

    카르멘은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잘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리벨리온’이라는 성이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인지 대략 들었으니까. 그래서 바로 사과하고, 그녀에게 새로운 성을 부탁했다.

    인생의 새로운 목적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에.

    “이 벌레들을 청소하고서 적당한 성을 붙여줄게. 이제 끝을 내자? 얘들아 부탁해.”

    에키드나의 명령에 따라 소환된 그림자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축제에 참여한 그림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귀족들을 무감각하게 도륙했다.

    괴성과 절규 그리고 절망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호위 마법사들은 그저 연약한 갑옷 정도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가려 애를 써봤지만, 그림자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다. 호위 마법사들은 에키드나와 카르멘에게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귀족들을 버렸지만, 그 판단은 너무 늦었다.

    그림자의 엄니는 그 누구에게도 평등했다.

    마지막까지 도망치려던 한 배불뚝이 귀족마저 미노타우르스의 도끼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본드래곤은 오랜만의 사냥에 만족한 듯이 포효했다. 물론, 진짜로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닌 마나의 떨림에 의해 공기가 진동했던 것이지만.

    그림자의 괴물들은 목적을 이룬 듯 이제는 고깃덩이가 된 귀족들을 무시하고 에키드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시체와 피바다를 뒤로하고서 에키드나와 카르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 적당히 마족다운 것을 하나 붙여주면 되려나? 비제는 어떨까? 간단하고 뜻도 괜찮아 보이는데.”

    비제, 마족어로 홀로 길을 걷는 자라는 뜻이었다. 에키드나는 비제의 의미를 카르멘에게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지금 카르멘이 가려고 하는 지독하게 외로운 길에 걸맞았다. 카르멘은 그녀가 추천해준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비제, 카르멘 비제라. 나쁘지 않군. 네 작명 센스는 믿을 수 없었지만 이건 생각보다 괜찮으니 다행이군. 아직, 리테리아는 못 찾았나?”

    “대체 리테리아라는 여우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 정도의 결계를 사용하는 거야? 계획에서 듣긴 했지만 너무한걸. 마족의 마나 감지로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니.”

    결계를 해제하고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마나 감지를 사용했지만, 마족의 방식으로도 리테리아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을 적으로 인식한 결계가 계속해서 환영을 만들어 에키드나의 마나 감지를 방해했다.

    리테리아가 세컨드 서클 유저라는 이야기를 카르멘에게 들었지만, 인간보다 강한 마족의 감각을 피하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족을 속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마족이 기피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 그리고 어째서 마족이….”

    그 두 명의 대화를 방해한 건 도망치고 있다가 우연히 그곳에 도착한 카테리나 일행이었다. 무도회장을 돌파해 나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리테리아의 결계에 갇혀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한계를 느낀 마리안느가 마음 편히 쉴만한 곳을 찾아 이동하다 이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카르멘이 있었기에 카테리나가 이곳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었다. 마족의 반응이 있어서 잠깐 의문을 가졌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순 없었다.

    설령 그곳이 마족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일지라도, 리테리아의 결계 속에서 싸우는 이상 카르멘이 진다는 것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인가. 생각보다 쉽게 일을 해결할 수도 있겠군.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그게 무슨 소리시지요. 아버님? 대체 저 귀족들은….”

    그 자리에 도착한 카테리나 일행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파티장에서 웃고 있었던 귀족들의 일부가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깃덩이로 변해있었기에. 그것을 보자마자 정신력이 강해 보이던 유페미아마저 몸에서 올라오는 구토감을 막을 수 없었다.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황녀라는 신분이 간신히 그것을 막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여러 퀘스트를 수행하며 단련된 카테리나와 군인 가문의 사리아는 시체에서 느껴지는 사자의 기운과 피비린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마리안느와 리네아는 달랐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이런 참상은 처음 보는 것이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리네아나 마리안느는 가문의 귀염둥이였을 뿐이었다. 마리안느가 또래보다는 영특했지만 그건 학습능력의 뛰어남을 말한 것일 뿐이었다.

    마리안느가 참상을 더는 보지 못하게 카테리나는 손으로 눈을 가려주었다. 리네아는 겁을 먹고서는 유페미아에게 안겨있었다. 유피메아는 리네아를 다독였지만, 떨리는 손을 숨기지 못했다.

    유페미아의 호위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느끼고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마족과의 조우는 죽음이라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주가 서 있는 위치 역시 에키드나의 맞은편이 아닌 바로 옆이었다는 것도 위화감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그들이, 지금은 마치 동료처럼 보였다.

    “어머, 내가 생일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마리안느.”

    그 대치 구도를 깬 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키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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