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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31화 (31/265)
  • 달의 몰락(8)

    * * *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 제가 마족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정도면 마음에 드십니까?”

    후계자 카르멘 아르테미스가 마족을 사냥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마족의 피와 마족이 들고 있었다는 아티팩트를 가져왔다.

    “아, 아무리 그래도 마족을 잡았다는 건 믿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티팩트라면 공작급의 마족인데. 아무리 천재라도 공자님 혼자서 잡을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가주님.”

    한 가신이 가주 리스트 아르테미스에게 진언했지만, 카르멘이 가져온 증거는 너무나도 확실했다.

    “아직 믿을 수는 없으니 신관을 데려와 확인해보도록 하지.”

    그 이후, 신관은 피와 아티팩트가 공작급의 마족의 것이 맞다고 증명해주었다. 신관이 그 두 개를 보는 순간 더러운 마족의 마나 향기가 풀풀 났으니까. 어느 신관도 같은 이야기를 해서 카르멘이 마족을 잡았다는 것은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문을 계기로 카르멘의 재능과 능력은 대륙 곳곳으로 펴졌고, 흔들리던 가주 후계자의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게 되었다.

    그의 강함에 대한 열망은 줄어든 듯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보다 더욱 크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희 같은 멍청한 것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절대로 모르겠지. 잘 가라.”

    카르멘 식 얼음 마법 ― 고독한 왕의 군세 : 종장

    카르멘은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조화 마법을 멈추고서 새로운 마법을 펼쳤다. 사실, 카르멘은 마법사단에 큰 흥미가 없었다. 리테리아가 말했듯 그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그의 옆에는 마족 공작 에키드나가 있지 않은가?

    3 마법사단의 조화 마법으로 꽤 수가 줄은 얼음 병사들은 다시 얼음의 마나로 돌아가며 거대한 구체를 만들었다. 거대한 구체는 단 하나였지만,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었다.

    아르망과 마법사단의 생존자들은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장벽을 부수려고 하던 조화 마법은 일단 멈췄지만, 카르멘의 새로운 마법은 그들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보통, 리테리아가 결계 마법으로 적을 가두고, 각 마법사단이 나서서 적을 토벌하는 식이었다. 카르멘이 최고 명령권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나서야 할 정도의 전장은 극히 적었으니까.

    가끔, 가주가 직접 나서더라도 얼음 궁전의 병사들만으로도 승리하기에 충분했다.

    “저건 나라도 조금 무섭네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듯 에키드나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는 저것과 비슷한 마법을 유피테르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저건 간단하지만, 분명히 위협적이었다.

    거대한 구체가 되어버린 얼음의 마나는 이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얼음 가시들을 뱉어냈다. 반으로 쪼개진 눈사람 같은 눈덩이는 자비 없이 주변을 초토화했다.

    “방어해! 최대한 강하고 여러 겹으로 장벽을 펼쳐!”

    아르망은 금이 간 결계를 복구하고 여러 겹으로 다시 만들었다. 부단장 역시 그런 아르망을 도왔다. 하지만, 그들의 마나는 거의 한계치에 불과해서 생각했던 것만큼 장벽은 튼튼하지 않았다.

    “젠장. 산 넘어 산이군.”

    부단장 역시 한계가 가까워진 걸 느꼈다. 아르망의 재치와 그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너지면 다른 단원들과 간신히 살아남은 르노아가 위험했다.

    계속 가시를 생산하는 거대한 구체는 결계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위력적으로는 조화 마법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계속 같은 곳을 집요하게 노리는 그 방법은 충분히 위험했다. 결계의 한 부분을 계속해서 두드리면 결국에는 뚫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고생했다. 아르망.”

    그게 아르망이 들었던 마지막 한마디였다.

    얼음의 구체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마법 장벽을 그대로 부숴버렸고 아르망을 그대로 직격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에서도 단원들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 걱정은 마지막 마법으로 남았다.

    아르망 식 석화 마법 ― 메두사의 눈

    석화 마법이 최대한 얼음 가시들을 얼리며 단원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몇몇 단원들은 단장의 희생에 눈물을 머금고 르노아를 데리고서 간신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3 마법사단 단장 아르망을 포함한 대부분의 단원이 사망하는 것으로 카르멘과 에키드나는 계획의 첫 번째 단계를 끝냈다.

    아르망과 부단장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 카르멘은 마법을 해제했다. 조화 마법과 얼음 마법이 만든 참상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였다. 마법사단의 시체는 얼어붙은 후 산산이 조각나서 더는 알아볼 수 없었다.

    에키드나야 원래 인간의 목숨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시체의 산을 보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인간은 오직 유피테르뿐이었다. 그 누구보다 유피테르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게 집착하고 있는 에키드나였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유피테르가 강한 만큼 그녀도 성장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가주, 아니 가주였던 카르멘의 태도였다. 누구보다 가문에 헌신했던 마법사단의 시체를 보고서도 그 어떠한 사죄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획의 두 번째 단계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단의 대부분이 무력화된 지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르멘은 얼음 궁전 마법을 해제했다. 마법이 해제되자 궁전을 만들었던 얼음 결정이 산산이 부서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얼음 결정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은은한 달빛을 잔뜩 머금었다. 그야말로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후후. 정말 아름답네. 유피테르가 곁에 있었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그것을 바라보는 에키드나의 머릿속에는 유피테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왕자님의 모습을 한 유피테르가 멋진 유니콘을 타고 와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놀라웠던 건 상상 속에서 미화되었을 게 분명한 유피테르의 얼굴이 실제 얼굴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고작 첫 번째 계단을 오른 거다. 방심하지 마라 에키드나. 1 단장 리테리아가 남았다. 그녀야말로 제일 성가실 거다.”

    그 상상의 나래를 부순 건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며 손을 내민 카르멘이었다. 에키드나는 에스코트 받는 레이디처럼 카르멘의 손을 잡았다. 카르멘은 얼음 마법을 사용해 거대한 새를 만들었다.

    얼음의 새는 유유히 날갯짓하며 그들을 땅으로 데려다주었다. 땅에 도착한 에키드나는 수고했다고, 새의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생명의 고동을 뿜고 있지 않은데도 새는 기분이 좋은지 더 쓰다듬어달라고 재촉했다.

    에키드나 역시 그런 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법으로 만들어진 새를 자신에게 달라고 카르멘에게 요청했다.

    카르멘의 입장에서 그 새는 어차피 다시 부술 것이었으므로 흔쾌히 수락했다. 에키드나는 드물게도 고혹적인 웃음이 아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얼음 새를 초대했다.

    ‘리테리아.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얼음 새와 놀고 있는 에키드나를 뒤로하고 카르멘은 계획을 점검했다. 아르테미스를 부수는 건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들이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주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인물은 두 명이었다.

    카르멘은 전술 부문에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리테리아를 꼽았고, 에키드나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유피테르를 선택했다.

    카르멘은 유피테르라는 말에 처음에는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리테리아에만 집중하자고 했다. 그러나 에키드나가 알고 있는 진실 중 일부를 알려주자 그 역시 공감하며 계획을 수정했다.

    “준비했던 던전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어. 생각보다 시간을 끌지 못했네? 아쉬워라. 역시 내 사랑 유피테르다워.”

    지금까지는 계획대로였지만, 앞으로도 계획대로 흘러갈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주의해야 할 인물에 대한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에. 그 둘을 죽이거나 최소한 무력화하지 않는다면 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리테리아와 유피테르가 계획에서 갖는 위치는 체스판에 놓인 퀸과 같았으니까. 폰을 아무리 많이 죽여봤자, 결국 여왕을 잡지 못하면 패배하지 않는가.

    ‘어차피 영상 구슬을 본 유피테르는 나를 쫓아오겠지?’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찾아올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리테리아를 우선 박살 내자고 말하며 에키드나는 마나 감지를 시작했다. 그녀의 마나가 넓게 퍼지며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찾았나?”

    “아니이, 생각보다 꼭꼭 숨었는걸? 무슨 광대라고 하는 결계. 당신의 말보다 더 귀찮다. 환영이 가지고 있는 마나가 실제랑 거의 같은 수준인걸.”

    리테리아를 찾았냐는 카르멘의 말에 에키드나는 리테리아의 결계 마법이 너무 방해되어서 어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꼬면서,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인간의 마법을 파훼하지 못해서 심통이 난 것이었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은 유피테르여야만 했다. 그것이 세컨드 서클을 이룬 천재 리테리아라고 할지라도.

    ‘고작 인간이 쓰는 마법인데 이렇게 정교할 줄이야…. 짜증 나네.’

    인간의 마법이 대단해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리테리아를 찾는 것은 맡겨달라고 에키드나는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각과 실제를 정확히 구분해내지 못했다. 태초의 마족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카르멘의 예상대로였다. 부단장 르노아가 리테리아는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고 했을 때부터 그녀를 의심했었다. 그가 사용한 것은 가장 빠르게 모이라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는 의심은 역시라는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의 결계 마법과 환영 마법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실제로, 카르멘은 어릿광대의 꿈이라는 마법을 처음 봤을 때 엄청나게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혼자서 펼치는 조화 마법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 마법은 아군에게는 최고의 결계이자, 적에게는 최악의 결계였다.

    리테리아를 어떻게 찾을지 고민하는 에키드나의 귀에 도망친 줄만 알았던 귀족들의 항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친 줄만 알았던 귀족들 역시 결계 범위에 들어와 있었다. 어릿광대의 꿈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던 것이다.

    “카르멘 아르테미스는 나와라! 어서 이 결계를 해제하라.”

    “아르테미스 가주. 당신은 제정신인가? 마도사라고 해서 우리를 가둬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얼른 우리를 풀어주고 무슨 상황인지 밝혀라!”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카르멘에게 결계를 해제하라며 화를 내는 귀족들도 있었고,

    “우리를 인질로 잡을 셈인가?”

    “인질로 잡을 거라면, 돈을 주겠네. 여기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보석이 있다네. 이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은가?”

    결계로 자신들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요구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거래를 시도하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도움 안 되는 마법사 같으니라고. 너를 얼마를 주고 고용했는지 알아? 내 친구는 벌써 이 빌어먹을 결계 밖으로 나갔다고. 그 마법사는 하는 데 왜 너는 못 해. 최선을 다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면 용서되는 줄 알아?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이곳에서 나가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 내가 누군지 알아?”

    부패한 귀족의 전형을 보여주듯 자신을 빠르고 안전하게 대피시키지 못한 호위 마법사를 심하게 질책하는 귀족도 있었다.

    평소에는 상냥한 척하거나 남들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던 귀족들도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는 본성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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