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30화 (30/265)

달의 몰락(7)

* * *

“역시 인간은 연약하군.”

얼음 궁전의 왕좌에 앉은 카르멘은 목숨을 걸고 힘들게 싸우는 자신의 전 부하들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에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며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당신도 인간인걸? 안 그래 아버님?”

에키드나는 그의 바로 옆이 아닌 뒤에서 카르멘에게 대답했다. 에키드나의 말처럼 카르멘 역시 결국에는 서드 서클의 벽을 넘지 못한 ‘인간’이었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인류 최강이 되었지만,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상대도 되지 않는 마법사단 때문에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카르멘은 왕좌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하는 감정은 역시나로 끝났다. 인간의 한계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더 이상 인간에게 볼일은 없었다.

“절망의 서곡을 연주하려면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지. 함께해 줄 텐가?”

“끝까지 부탁을 하지는 않으시네요 아버님. 재미없어라. 아아. 빨리 유피테르가 보고 싶네.”

에키드나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카르멘의 말을 따랐다. 그게 그들이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마족에게 있어 계약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것이었다.

“얼음과….”

“…그림자의 춤.”

카르멘 식, 에키드나 식 조화 마법 ― 얼어붙은 그림자의 춤

마법사단을 향해 시동어를 외친 건 카르멘 혼자가 아니었다. 에키드나 역시 카르멘의 마법에 맞춰서 마법을 펼쳤다.

조화 마법.

두 사람 이상의 마법이 조화롭게 섞여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합체 마법이었다. 이는 단순히 두 개의 마법을 따로 사용했을 때보다 몇 배 강력했다.

조화 마법을 사용하려면 두 사람이 주문 영창을 이어서 해야 했지만, 카르멘과 에키드나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동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마법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게 부조리한 경지의 차이였다.

얼음으로 된 낫이 무수하게 공중에 만들어지고, 그 위에 그림자의 힘이 살포시 덮였다. 그리고 자비 없이 얼음 병사들과 싸우던 마법사들을 그대로 관통했다. 단지, 그림자의 성질이 담긴 것만으로도 절삭력이 말도 되지 않게 올라갔다.

가주의 배신을 큰소리로 알린 르노아는 얼음과 그림자의 낫에 온몸이 난자당했다. 단원들을 위에 가장 앞에서 싸우다 제일 먼저 표적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싸우는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헤헤…. 미안해요. 단장님.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 주위에는 그녀가 흘린 피가 가득해서, 얼음 궁전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보일 정도였다.

그걸 보고 덜컥 겁을 먹은 몇몇 신입 단원들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나, 나는 죽기 싫다고 도, 도망가자!”

“힘들게 마법사단의 이름을 달았는데 죽는다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동료를 버리고 도망간 그들 역시 조화 마법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었다. 고작 퍼스트 서클에 불과한 그들이 조화 마법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외에도 르노아와 같이 싸우던 1 마법사단 단원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3 마법사단은 단장이었던 아르망이 부단장과 함께 마법 장벽을 펼쳐서 낫의 침공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3 마법사단의 부단장이 미리 경고해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를 회수해서 포션을 사용해. 내가 길을 만들겠다.”

아르망 식 석화 마법 ― 모아이

아르망이 병사들을 석화시켜 골렘으로 만들었다. 마치, 데메테르의 마법을 생각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골렘이 되어버린 병사들은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왕의 군세에 대항했다. 방금까지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아르망의 명령을 듣는 충실한 부하들이었다.

“막아! 길을 뚫어. 부단장님을 구해야지! 여기서 죽고 싶은 바보들은 없지?”

“좋아, 좋아, 조금만 버티자 거의 다 왔어. 마법으로 저 빌어먹을 얼음을 박살 내버려!”

아르망은 골렘들로 길을 만든 뒤, 단원들을 보냈다. 단원들 역시 재빠르게 움직여 르노아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쉽지 않은 명령을 해내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부단장님은 아직 살아계십니다.”

르노아를 데려온 단원들은 아직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고 보고했다. 르노아의 상태는 처참했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힐링 포션 몇 병을 붇자 그나마 상태가 나아졌다.

‘어떤 식으로 도망가야 하는가.’

원수를 두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게 씁쓸했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마족의 마나는 무한하기라도 한 것인지 조화 마법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가 펼친 마법 장벽과 골렘들은 병사들과 조화 마법을 동시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법 장벽은 이미 얼어붙기 일보 직전이었고, 골렘들은 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뒤집을 히든카드?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그냥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족과 가주의 조화 마법에 바로 썰려버릴 테니까.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훈련대로 조화 마법을 펼쳐라.”

아르망과 3 마법사단은 전투력이 제일 떨어져서 비밀리에 조화 마법을 훈련했다. 조화 마법 자체가 엄청 난이도 높은 것이었지만, 성공한다면 압도적인 위력을 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조화 마법이 불안정한 상태로 완성된다면 마나 간의 반발력 때문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제대로 안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의 노력은 빛을 볼 수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3 마법사단의 단원들은 끼리끼리 모여 조화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르망과 부단장이 목숨을 걸고 마법 장벽을 유지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몇의 살아남은 1 마법사단의 단원들도 어느새 장벽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늘을 지배하는 창공의 대기여 지금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노라….”

“…소리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찢을 굉음으로 거듭나리라.”

조화 마법 ―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3 마법사단 단원 두 명이 합친 조화 마법이 골렘을 넘어 얼음 병사에게로 향했다. 대기를 찢는 굉음은 얼음 병사들을 그대로 조각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이 조화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더는 복구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마법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조화 마법이 제대로 성공했네. 봐봐 이야기했던 그대로의 위력이잖아.”

“성공한 것보다는 저 언데드 같은 얼음 병사들이 없어지는 게 더 속 시원한데 말이지.”

드디어 그들에게도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했다. 처음으로 카르멘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으니까. 매번 실패하던 조화 마법이 기적같이 성공한 것은 그들이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그럼 한 번 더 시도해보자고.”

조화 마법에 성공해 자신감이 넘치는 단원 한 명이 한 번 더 마법을 펼치자고 주장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단원들은 조화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들을 지키는 진형으로 움직였다. 그들이야말로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조화 마법 ―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조금 전과 동일한 영창과 동일한 시동어. 이번에도 조화 마법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에게 두 번씩이나 웃어주지 않았다.

“조화 마법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 이렇게 엉성할 줄이야. 뭐…. 나쁘지는 않은 시도였다.”

카르멘이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 뒤로 에키드나가 천천히 따라왔다. 카르멘은 압도적인 아바라치아를 이용해 조화 마법 자체를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7명의 마족 대공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그야말로 사기적인 아티팩트였다.

“첫 시도치고는 괜찮은 느낌이었어. 정말로 괜찮은 거야 아버님? 다시는 인간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자칭 여자친구 에키드나는 그에게 결심에 변함이 없는지 물었다. 카르멘이 몇십 년 전부터 선택한 길은 그야말로 외도(外道)이자 수라(修羅)의 길이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그런 길을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가주님 어째서 저희를 버리십니까.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충성에 이런 식으로 대답하십니까. 대체 왜!”

동료 대부분을 잃은 1 마법사단의 단원 한 명이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 질문은 그곳에 있는 모든 마법사단이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잔인하더라도 그가 인간을 배신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고작 이런 곳에서 가주에게 개죽음이나 당하려고 아르테미스의 깃발을 대륙 곳곳에서 널리 흔든 것이었나.

누구보다 고된 훈련을 하고, 1 단장의 환상 결계 속에서 잠도 자지 못하며 실력을 갈고닦은 결과가 죽음이라니. 이곳에서 죽은 단원 중에는 막 수습의 칭호를 떼고 가문을 위해 뛰어난 마법사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진 신입 단원들도 많았다.

마족과 손을 잡을 수는 있었다. 사실 그건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가주가 내린 어떠한 명령이라도 따라갈 충성심이 있었다. 그게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이 충성하는 방식이었다. 상관의 명령에 의심하지 않는 것.

설령 마족이라도, 인류를 배신하는 행위라도 그들은 따라갈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은 꼭 따라가고 싶었다. 카르멘이 주장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신념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에. 이해 못 할 명령들도 하나씩 이루다 보면 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귀족이 모범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다. 황실과 몇몇의 귀족들을 제외한다면 리투아 제국은 썩어있었으니까.

아르망과 부단장이 펼친 마법 장벽은 이미 여러 군데 얼어붙어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조화 마법의 낫이 아르망과 단원들을 노리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제발 저 사악한 자를 저주해주소서.’

“서드 서클은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왜 인간을 배신했냐는 질문에 대한 카르멘의 대답이었다. 그가 말한 서드 서클이라는 지고의 경지. 이는 그가 가주 후계자였을 무렵부터 간절하게 원하던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사실, 그는 가주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초대 아르테미스 가주가 만든 결계에 매료된 카르멘은 힘이라는 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위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 단점을 제외하면 어린 시절의 그는 가주 후계자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전대 가주인 리스트 아르테미스가 유일하게 걱정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성장을 해가면서 힘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보여 안심할 수 있었다. 욕망을 포기했기 때문인지 그는 나날이 차가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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