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몰락(6)
* * *
“후후. 준비가 모두 된 것 같으니. 서로 연기는 그만하죠. 카르멘. 이제야 정말로 준비했던 것이 시작되는 거라구요.”
새로운 마법으로 등장한 얼음의 병사들로 인해 에키드나는 수적으로 불리해졌다. 체크메이트에 몰린 그 상황에서 에키드나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녀의 얼굴은 지금껏 보지 못한 기쁜 표정이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대치하고 있던 카르멘을 마치 동료처럼 불렀다.
“마족 놈.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것이냐. 가주님을 함부로 부르다니.”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3 마법사단 단장 아르망이 호통쳤다.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생긴 아르망은 회색빛 턱수염이 인상적인 마법사였다. 그는 에키드나의 시선에서 가주를 보호하듯 움직였다.
“아르망, 네가 아르테미스에서 몇 년이나 일했지?”
맥락이 전혀 없는 대화에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서.
에키드나 리벨리온. 카르멘 아르테미스.
도저히 접점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만이 이 장소에서 크게 웃고 있었다. 가주의 명에 따라 모인 마법사들은 그 웃음의 의도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왜인지 모르게 섬뜩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마법사단으로 활동하며 가주가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신께 복수를 맹세한 뒤로 제대로 세어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르망은 가주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자. 감격했다. 카르멘은 아내와 딸들을 제외하면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으로 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평민들이 마법에 휩쓸려서 죽었는데도 사과하나 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가주’로서 보상은 해줄 것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가주님. 저 마족의 말이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에키드나의 말에 카르멘이 제대로 대답하고 말을 돌리자 르노아가 소리쳤다. 평상시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지만, 에키드나와 카르멘이 동시에 웃는 상황이 그녀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르노아가 소집 명령에 따르기 전.
가문을 지키고 있던 르노아는 이상 현상을 감지하고 표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소집 표식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것은 가문에 중대한 일이 발생했으니 3분 내로 집결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다른 곳을 경계하고 단원들에게 통신을 보내며 마법사단의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누구보다 빠른 행동으로 1 마법사단 단장 리테리아를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아직 단원들은 아무도 도착하지 않아서, 리테리아 단장과 함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단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하는 동안 단장은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충고를 했다.
“만약,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다면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 알았지? 아니 몰라도 되니까 도망치라는 말만 기억해.”
“네? 네 알겠어요. 단장님. 꼭 기억할게요.”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충고였다. 이 말을 듣는 당시의 르노아는 단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단장이었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라고만 할 뿐.
리테리아 단장은 단원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단장으로 근무했었고 엄하면서도 자상한 면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였으니까.
그래서 무슨 뜻인지 몰라도, 도망치라는 말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두었다. 르노아의 경험상 리테리아의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보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준 기책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돌파할 수 있었으니까.
르노아는 부단장임에도 가장 앞선에서 단원들과 함께 돌격했다. 르노아는 약간 아이 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마법은 강력했다. 그래서 그녀는 걸어나는 폭탄 같은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 폭탄을 제대로 다루며 적을 섬멸하는 것이 1 마법사단 단장 리테리아 오르비스였다.
그녀는 강력한 마법을 기반으로 명령을 잘 수행했기 때문에 부단장의 위치까지 올라가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어디에 배속될지 정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대책 없는 돌격 대장을 부단장으로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마법은 적은 물론 아군도 피해를 볼 수 있었으니까.
이를 감싸주며 르노아를 받아준 사람이 리테리아였다. 그래서 르노아는 리테리아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 따르는 편이었다.
‘어째서, 지금 단장님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르노아는 불길했다. 그녀가 느끼는 동물적인 본능은 세세하지는 않았지만, 큰 틀에서는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속삭였다.
카르멘 아르테미스는 처음부터 마족과 한편이었다고.
그녀가 움직인 것은 카르멘이 뒤를 돌며 마법사단을 향해 시동어를 외친 것과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다.
“모두, 이곳에서 대피해! 가, 가, 가주, 가주님이 배신했다!”
카르멘 식 얼음 마법 ― 고독한 왕의 군세 : 진격
에키드나를 향해 진격하던 얼음의 군세가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든든했던 그 병사들은 지금은 감정이 없는 냉혹한 적이 되어버렸다. 수천이 되어 보이는 병사들은 마법사에게 무기를 겨누며 진격했다.
아르망 식 석화 마법 ― 메두사의 눈
가장 먼저 이변을 알린 게 르노아였다면, 빠르게 대처한 것은 아르망이었다. 광역 석화 마법으로 얼음 병사 일부를 돌로 만들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서는 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적이 바뀌었다. 모두 스스로를 보호하며 알아서 퇴각해라! 살아서 보자.”
“알겠습니다. 단장님. 무운을 빕니다.”
단원들은 단장에 말에 짧게 대답하고는 마법을 펼쳐서 진격하는 군세에 맞섰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다양한 마법들을 사용해 얼음의 병사들을 박살 냈다. 가주의 배신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로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버텼다.
‘가주님 당신이 우리를, 가문을 그리고 인간을 배신할 줄이야…. 내게 약속하지 않았나 마족을 불태워주겠다고.’
아르망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는 아픈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럴 만했다. 그가 가주에게 대가 없는 충성을 바친 건 마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어떠한 일도 묵묵히 해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그 목표를 빼앗겨버렸다.
르노아 식 폭발 마법 ― 폭발 대축제
르노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매사에 단순하게 생각했던 그녀이기에 오히려 배신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나 보다 하고 넘긴 뒤 단원들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퍼부었다.
르노아 식 폭발 마법 ― 연속 대폭발
그녀는 쉬지 않고 사방에 폭발 마법을 쏘며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엄청난 화력으로 궁전을 어느 정도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해치웠나?”
“부단장님 그 말만은 제발!”
르노아의 입에서 끝내 그 마법의 주문이 나오고야 말았다. 어떻게든 그 말을 하지 않게 하려고 단원들이 막아보았으나 이미 그 주문은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피해를 입으면 자동으로 복구를 하다니 마나가 무제한인 거냐고!”
한 단원이 계속해서 복구되는 궁전과 병사들의 모습에 질린 듯 화를 냈다. 단원들은 계속해서 마법을 퍼붓고 있었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단원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작렬하며 병사들과 궁전을 부쉈지만,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저 마법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점점 강도를 올렸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고야 말았다. 70여 명의 마법사들이 다양한 마법을 사용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르망 식 석화 마법 ― 석화의 창
아르망 역시 길을 만들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지쳐가고 있었다.
‘마법사단 전부보다 가주 혼자서 싸우는 게 월등히 강하다는 1 단장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었던 건가….’
마법사단 끼리 회식을 할 때 아르망이 리테리아에게 우리 전부와 가주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물어본 적 있었다. 그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음에도 젊음을 유지하는 리테리아의 눈은 정확해서 틀린 적이 없었다.
“아마, 우리가 99.9%로 패배하지 않을까? 가주를 적으로 돌리면 진짜 무서울걸?”
“단장님 역시 세컨드 서클이고 4개의 마법사단을 다 합치면 제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라구요. 설마 지겠어요?”
리테리아의 말에 부단장이었던 르노아가 반발했다. 그녀는 가주의 힘에 대해 누구보다 믿고 있었지만, 그만큼 마법사단에 대한 애착도 강했으니까. 르노아의 말처럼 4개의 마법사단 전부가 나선다면 리투아 제국 황실과도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
“캬하. 난 리테리아 씨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예전에 사바트에 참여했었는데 그곳에서 보았던 조디악들은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때 4 단장 리오가 나서 리테리아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12명으로 구성되어있는 조디악은 결원이 생길 때마다 사바트를 열었다. 최강의 칭호를 노리고 다양한 마법사가 그곳에 참여했지만,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은 트라우마에 걸려서 돌아올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최강은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만 가능한 거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충분히 가능하지. 퍼스트 서클이 세컨드 서클을 이기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걸 다들 알지 않나. 가주님은 서드 서클의 경지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니 고작 우리들로는 부족할 수 있지.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마르타 단장은 말로 당시의 토론은 끝이 났다. 일생에 한 번 있을법한 기적이 일어나야 그들이 가주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당시의 아르망은 믿지 않았다. 마족의 압도적인 무력을 기억했지만, 그건 마족이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가주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닌가.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빌어야 하는 건가. 세계 최강과 마족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우습군.’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신들을 구해주기 위해서는 마족과 가주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와야 했다. 그야말로 ‘신’에 준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 밤이 끝나기 전에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