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몰락(4)
* * *
“가문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도 주인 된 도리로 제대로 대접을 해야겠지?”
카르멘 식 얼음 마법 ― 얼어붙은 대지의 분노
마법사들 간의 전투에서 흐름을 잡는 것은 중요했다. 카르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넘어온 순간 강력한 마법으로 에키드나를 압박했다.
카르멘의 마법은 그의 발밑을 얼어붙게 만들더니,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게걸스럽게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집어삼키며 에키드나를 노렸다.
“난 초대장을 가지고 온 거로 기억하는데? 너무하네.”
에키드나 식 그림자 마법 ― 그림자 방패
에키드나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발동한 마법은 구경하고 있던 귀족들의 발밑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에키드나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그림자들은 거대한 방패의 형상이 되어 솟구쳐올랐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탐욕스러운 얼음이 그림자의 방패에 그대로 부딪쳤다. 푸른 얼음은 검은색의 방패마저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얼어붙었다. 그림자 방패는 얼어붙어 버려서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 듯했다.
얼음은 방패를 넘어서 웃고 있는 에키드나를 잡아먹으려 했다.
지켜보던 귀족들은 자신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카르멘의 마법이 그녀의 마법마저 얼어 붙이려고 하자 열성적으로 환호했다.
‘제법이네요. 카르멘 아르테미스. 역시 그 말은 진심이었던 거군요? 그렇다면 나도….’
카르멘이나 에키드나 모두 시동어로만으로 마법을 펼쳤지만, 영창을 한 마법만큼 강력했다.
에키드나 식 그림자 마법 ― 그림자 방패
위험함을 느낀 에키드나는 두 번째의 방패를 만들어 간신히 얼음을 막아냈다. 멈출 줄을 모르고 호쾌하게 진격하던 얼음은 새로운 방패를 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카르멘의 마법은 그림자로 된 방패들을 완전히 얼려버렸지만, 바꿔 말하면 그게 다였다. 에키드나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아직 진심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평민 대부분은 카르멘의 얼음 마법을 피할 수 없었다. 속박은 풀렸지만, 공포로 발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도망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던 악단, 무도회의 잡일을 도맡아 하던 집사들과 시종들, 음식을 만들고 있던 요리사들까지.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성실히 일하고 있었다.
귀족들처럼 호위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두 마법이 격돌하며 나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호위 마법사는 보통 가문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선 평민이 꿈꿀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그나마 아르테미스 가문의 전속 집사들이 있었기에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구해진 자들은 집사들에게 연신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들은 방금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뒤로하고서 무도회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동료의 죽음에 슬프지 않을 리 없었다. 시체를 수습하지 못해 미안했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했다.
마족과 조디악의 마도사가 대치하는 이곳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하필 들고 있는 무기가, 아바라치아라니 운이 없군요. 그래도 계획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상관이 없겠네요.’
단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에키드나는 카르멘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속박 마법을 강제로 해제했을 뿐 아니라 얼음 마법 자체가 너무나도 강력했다. 아바라치아를 통해 이뤄지는 강력한 마나 지배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정도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가 사용한 마법이 그녀에게 돌아올 수 있었기에.
아바라치아는 원래 마족들의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마법식이 새겨져 있는 거로 유명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를 카르멘도 알고 있다면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일하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마저 얼려버리다니, 잔인해라. 같은 인간인데도 자비가 없네요. 하지만 유피테르가 당신보다 더 무섭네요.”
에키드나는 얼어붙어 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림자 방패를 해제하며 말했다. 이 말이 카르멘의 이상할 정도의 냉정함을 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스스로 약점을 알려주었는데 데 사용하지 않는 쪽이 바보였다.
상황은 에키드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카르멘은 스스로 금기라고 말했던 유피테르라는 단어에도 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약점을 찔러보려는 에키드나의 시도가 자신감을 올려준 듯했다.
“마족이라고 해도 별 것 아니군. 너도 공작급의 마족인가? 탐욕처럼.”
카르멘은 왼손에 잡고 있던 아바라치아로 땅을 살짝 내리치며 물었다.
카르멘 식 얼음 마법 ― 하늘 얼음 궁전
그러자, 최소한 100명은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대치하던 둘은 자연스럽게 얼음 기둥을 탈 수 있었다. 기둥은 무도회장의 박살내며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하늘 위로 쭉 뻗어 나가는 얼음 기둥은 마치, 고대의 마법사들이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만들었다던 ‘바벨의 탑’처럼 보였다.
결계에 의존해서 카르멘을 응원하던 귀족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는 마법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보호막을 펼쳐 귀족들을 안전하게 지키던 몇몇 호위들도 기절해버렸다.
기절하지 않았던 호위 마법사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귀족들을 보호하며 최대한 빠르게 밖으로 피신했다. 카르멘의 마법으로 건물 자체가 무너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수백 명이 동시에 살기 위해 빠져나갔기에, 친한 사람도, 가족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뭉쳐있던 카테리나 일행들은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다. 카테리나는 카르멘이 무슨 마법을 쓸지 미리 알고 있었는지 일행을 빠르게 불러 모은 후 앞장서서 길을 만들었다.
그녀의 근처에 있던 황실 호위 마법사들은 그녀가 만든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일행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정통 후계자 교육을 받은 폭군(Tyrant) 카테리나의 판단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둘만의 세계가 되었군요. 유피테르가 아니라 당신인 게 조금 아쉽지만.”
계속해서 올라가는 기둥 위에서 에키드나는 편안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기둥의 속도는 꽤 빨랐고, 잠깐만 밑을 내려다보아도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정도의 높이였지만 그녀는 아주 편안한 표정이었다.
“대체 왜 유피테르 같은 쓰레기를 좋아하는 거지. 역시 외모 때문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르멘이 대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유피테르에게는 매력이 전혀 없었다. 있다면 곱상한 외모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 하나는 대륙을 진동시킬 정도였으니.
“당신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걸요? 그래도 얼음으로 만들어진 궁전은 아름답네요.”
“칭찬은 고맙게 듣지.”
칭찬과는 다르게 카르멘이 얼음 궁전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얼음 마법을 조금 더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무도회장은 거대했지만,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였다. 카르멘과 에키드나의 간단한 마법으로도 순식간에 파괴되어버렸지 않은가?
둘째는, 가문의 최대 전력인 마법사단에게 신호를 주고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일부가 던전을 공략하러 떠났다고 해도, 마법사단의 핵심이자 세컨드 서클 유저 리테리아가 남아 있는 한 문제는 없었다.
눈에 띄는 곳으로 부르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은가? 눈에 띄는 게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이고.
그는 유리한 패가 있다면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카르멘은 마법사단이라면 모를 수 없는 표식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소설의 멍청한 악역처럼, 지원군을 부르는 행동을 막지 않는 것을 보고서 카르멘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저 마족은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동료를 부르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표식을 보았는지 얼음성을 다 뒤덮을 만한 거대한 결계가 펼쳐졌다. 리테리아 오르비스가 개량한 특제 결계 마법 ‘어릿광대의 꿈’이었다. 결계와 환영의 속성을 섞어서 만든 마법이었다.
‘행동이 빠른 걸 리테리아. 역시 내가 인정한 사람인가.’
카르멘은 완성되어가는 결계를 바라보았다. 리테리아는 그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진짜 마법사였다. 오랫동안 1 마법단장 자리에 있는 게 확실한 증거였다. 세바스찬이 쓸모없는 아들놈의 집사가 되어 아쉬웠지만 리테리아는 그 빈자리를 확실하게 채워주었다.
어릿광대의 꿈이라는 마법은 아군에게는 재정비할 기회를 주고 적에게는 끔찍할 정도의 환영을 보여주는 결계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결계의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적이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효과는 아군에게도 적용되었다.
마법이란 건 그렇게 형편 좋을 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나가 아니라 전설로만 내려오는 마나의 원형인 ‘신’의 힘일 것이다.
이 마법이 펼쳐진 공간에서 싸운다면 카르멘은 마족이 상대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계가 펼쳐진 것과 동시에 주변으로 마법사단들이 모이는 게 확실하게 감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멘의 곁으로 도착한 마법사단은 먼저 인원 보고부터 했다.
“제1 마법사단 부단장 르노아 외 30명 도착했습니다.”
르노아라고 이릉을 밝힌 부단장은 카르멘의 왼편에 무릎을 꿇고서 1 마법사단 인원 보고를 했고,
“제3 마법사단 단장. 아르망 외 35명 전원 도착하였습니다.”
3 단장 아르망은 3 마법사단 전부가 도착했다고 카르멘의 오른편에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르노아.”
카르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1 마법사단 부단장 르노아를 불렀다. 흔히 있는 일인 듯 르노아는 자신의 이름이 불렸음에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카르멘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1 마법사단 단장이 이 자리에 부재한 이유를 설명했다.
“리테리아 단장님께서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을 반드시 남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의 인원은 모두 이곳에 집결했고 저희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표식을 쏘아 올리고 몇 분 만에 에키드나와 아르테미스 가주 및 마법사단의 대결 구도가 완성되었다. 리테리아가 참여하지 않았지만, 결계 마법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후후, 제가 무서우신가 봐요? 저는 그냥 연약한 평범한 마족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