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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4화 (24/265)
  • 달의 몰락(1)

    * * *

    유피테르가 아직 던전을 공략하고 있을 무렵. 얼음성의 파티장에서는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리나 언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그분이, 그분이 어째서 우리를….”

    은발의 트윈테일이 잘 어울리는 마리안느는 공포에 잠긴 목소리 언니 카테리나에게 물었다. 트윈테일의 소녀는 무서운 경험을 했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카테리나가 마리안느의 등을 토닥여주며 진정시켰다.

    “설마 그렇게 강한 마법사께서 혐오스러운 마족과 손을 잡으셨을 줄이야. 이게 악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던 소녀, 사리아는 배신자의 행동에 많이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아폴론 가문의 제복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심지어, 빨리 치료해야 하는 상처도 여럿 보였다.

    “전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카리나 언니.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요.”

    에메랄드빛 녹색 머리를 가진 소녀, 리네아 역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쉽게 믿지 못했다. 리네아는 부족한 실력이지만 가문에서 가져온 힐링 포션으로 사리아를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정신을 그곳에 집중하고 있어서 리네아는 자신의 머리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조차 몰랐다.

    느린 속도였지만 조금씩 사리아의 상처가 낫는 것을 보고, 리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애초에 사리아는 리네아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대신 맞아서 크게 다친 것이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 슬펐다.

    “생각하지도 못한 그 사람이 인류를 배신하고 마족의 편으로 돌아서다니. 카테리나. 무언가 짚이는 부분이 있어?”

    금발 머리의 황녀 유페미아는 이곳에 대피해 있는 사람들 중 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카테리나에게 답을 구했다. 다른 사람도 있었기에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말투가 아니었다. 유페미아의 말에는 황족으로서의 위엄이 충분히 담겨있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그 사람이 변심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 사람은 마법사로서의 강함과 가문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가문을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런 일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는데.’

    리투아 제국 역사상, 귀족 가문의 산하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 적은 많았다. 차별 대우가 대표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직접 나서 가문을 무너트리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은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한 무도회장에서 시작되었다.

    생일파티의 마지막 순서인 무도회 중, 얼음의 검이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날아와 박혔다. 동시에 무도회장에 있던 마법 등이 깨지며, 모든 불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춤추는 도중 갑자기 어둠이 찾아오자 영애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마리안느 또래의 아이들은 울면서 부모를 찾았고, 부모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아이들을 찾으려고 애썼다.

    더 충격적인 일은 회장이 다시 밝아진 그다음에 일어났다.

    양 눈의 색깔이 다른 검은 머리의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소녀, 에키드나가 얼음 검이 꽂힌 자리, 바로 옆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움직이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그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뵙겠어요? 에키드나라고 해요.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여러분의 그림자를 제가 지배하고 있어서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면 많이 아프실 거예요.”

    에키드나는 유페미아가 생각날 정도로 우아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 속에 있는 꿈틀거리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당장 이 마법을 풀지 못해?”

    한 귀족이 분노하며, 에키드나에게 화를 냈다. 신체가 구속돼서 움직이지 못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더러웠다. 귀족이라는 높은 신분 덕에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에키드나의 폭거는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화를 내는 게 처음만 어려웠던 걸까.

    한 명이 에키드나에게 소리치자, 그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혼자는 무섭지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군중 속에서 그들은 충분히 용감해질 수 있었다.

    에키드나의 그림자 마법으로 인해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입은 건재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우후후. 어리석네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다니. 그렇구나. 이게 귀족이군요. 현재의 인류란 참 바보 같아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하다니.”

    에키드나는 손을 뻗어 옆에 꽂혀있던 얼음 검을 뽑았다. 잠시, 그 검의 날을 바라보더니 처음 소리친 사람에게 던졌다. 귀족들은 에키드나의 가녀린 손목으로 던진 검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휙.

    얼음의 검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목표했던 귀족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화를 냈던 귀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자,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질렀다.

    마리안느가 어렸기에 초대 손님 중에는 귀족 가문의 어린 자녀들도 많았다.

    어린아이들에게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서움에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을 찾았지만,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 역시 움직일 수 없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에키드나가 본보기로 한 명을 바로 죽이자, 군중 심리로 편승했던 귀족들의 입이 굳게 닫혔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이 적막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인간들은 너무 시끄럽고, 주제를 몰랐다. 감히 그녀의 말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고서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유피테르뿐이었다. 그녀 앞에서 귀족이란 신분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인간은 날고뛰어봤자 고작 인간이었으니까.

    “대체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는 건가요?”

    적막을 깨트린 건 그 자리에서 신분이 가장 높았던 3 황녀 유페미아였다.

    “어머, 당신은 누구인가요? 방금 상황을 겪고 나서도 말을 걸 줄이야.”

    에키드나는 사람이 죽는 걸 보았음에도 용기 있게 나선 소녀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인간들은 겁이 많았는데, 지금 눈앞의 소녀는 위험한 상황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른 나이 많은 인간도, 그녀를 상대한 마법사들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유피테르의 마나의 잔향이 강하게 풍긴다는 사실이 에키드나가 관심을 갖는 이유였다. 그 주변에 있는 소녀들 모두에게서 그 향기가 풍겼다. 마나로 인해 유피테르가 생각나자 그녀는 질투가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유피테르… 어서 내게로 와줘요.’

    그는, 유피테르는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설 수 있었다. 저런 인간 계집의 연인이 되는 걸 에키드나는 견딜 수 없었다. 지금 바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계획을 위해서 지금은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리투아 제국 제3 황녀 유페미아 드 리투아라고 해요.”

    금발이 어울리는 3 황녀 유페미아도 사실 겁이 났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신분이 제일 높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굳이 그녀가 대표가 되어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 그중에서도 사리아는 나서지 말라고 지금도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걱정 마요. 사리아. 이게 황제께서 말씀하셨던 그 노블리주 오블리제에요.’

    호위들이 늘 말렸던 바로 그 상황에서도 의외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서 유페미아는 놀랐다.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황실의 일원이라고 해보았자, 그녀는 고작 14살의 소녀였다.

    더구나 그녀는 몸이 연약해, 회복을 위해 자주 요양을 다니는 아이였다. 본능적인 혐오감과 두려움을 주는 존재 앞에서 그녀가 나설 수 있던 건, 떨고 있는 마리안느가 눈에 밟혀서였다.

    이 귀여운 어린아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화가 났다.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가장 축하받아야 할 그녀가 웃음을 잃고,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아이가 이런 식으로 고통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마리안느가 착용하고 있던 상태 이상 내성 아티팩트로 인해 마리안느는 움직일 수 있어 보였다. 이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그녀를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언니의 역할이니까.

    “그렇군요. 당신의 몸에서도 유피테르의 마나의 향기가 나네요. 사랑하는 나의 유피테르와 무슨 사이지요?”

    그녀는 유페미아에게 걸려있던 그림자 마법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편의를 봐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금발 머리에게 대답을 꼭 듣고 싶었으니까. 약한 구속 마법에도 힘들어하는 저 금발이 쓰러지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유페미아는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에키드나가 언급한 유피테르란 이름은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자리는 마리안느 아르테미스의 생일 파티였다. 당연히 실종된 대공자의 대한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는 큰 액수의 현상금 역시 걸려있었다.

    아르테미스 가문과 접점을 만들려고 참여한 귀족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는 없는 파티 방문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네요. 유피테르 오라버니와 무슨 관계이시죠? 당신 같은 사람과 친구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유피테르의 이름에 가장 크게 반응 한 사람은 이곳에서 카테리나였다. 그녀는 유피테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 마리안느와 유페미아 황녀를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얼음 송곳니

    천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스스로 에키드나의 마법을 풀고 몸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언제라도 에키드나를 공격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얼음 화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 너는 도둑고양이구나.”

    에키드나는 카테리나를 보자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여자야말로 유피테르를 타락시키는 존재였다. 그를 자신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인간이었다. 마법을 해제한 건 흥미로웠지만, 에키드나는 주제를 모르고 자신의 것을 넘보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던전에 있었던 유피테르가 들었다면, 자신의 의사는 어디 있냐고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떨어지라고 이야기했겠지만, 그는 아직 이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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