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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2화 (22/265)
  •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11)

    * * *

    사슬에 온몸이 묶인 채, 유피테르는 난감해했다. 손도 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슬에는 리치가 보여주었다는 마나 드레인의 효과가 걸려있었다. 속도 마법의 영향권이라 마나로 신체 강화를 해도 쉽게 부술 수 없었다.

    사슬에는 가속이 유피테르의 몸에는 감속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유피테르의 특별한 마나가 사슬을 통해 자신의 마나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며,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리치가 말한 대로였다. 고대의 마법사처럼 자유롭게 마법을 쓰는 대공자라고 해도, 마나 드레인의 사슬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해골은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마나 드레인의 마법식을 알려주었다. 이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마족의 속삭임이었다. 그래서 그는 리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 계약으로 얻은 마나와 마법식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유피테르 님 역시 당신의 마나는 특별하군요. 이 맛은 그 어떠한 진미보다도… 황홀합니다.”

    술에 취한 듯, 마르타는 몽롱한 표정으로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고, 마르타가 확실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저런 게 마법사단의 단장이라니. 리테리아도 늙었나 봐,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네. 아직도 아름답겠지만 말이야.”

    유피테르는 리테리아가 직접 들었다면 난리로 끝나지 않을 위험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계속 몸을 움직이며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죄어왔다. 구속당해 아픈 것보다도 신체의 자유를 빼앗겨서 기분이 더러웠다.

    “그럼, 슬슬 피날레를 장식해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펼친 마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유피테르에게 다가왔다. 마르타의 눈은 아직 유피테르에게서 뺏어간 마나에 취한 듯 눈이 풀려있었다, 그러나 그게 그가 약해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내뿜고 있는 마나는 인간이 보여주는 순수한 느낌이 아닌 몬스터의 마나와 비슷했다. 에이엔이 지금의 2 단장을 보았다면, 리치와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며 마법을 퍼부을 정도로.

    마르타 식 속도 마법 ― 시간의 송곳

    마르타의 시동어에 반응해 거대한 두 개의 말뚝이 결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송곳들은 강력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몽롱하게 취해 있는 눈과는 다르게 그의 태도는 나름 경건했다. 잊혀진 시대에 있었다는 악마를 처단하는 성 기사들처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그 말뚝은 좀 아플 거 같은데. 요즘에도 범죄자 사형 집행할 때 말뚝형이 있어?”

    이 상황에서도 유피테르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빈정거렸다. 몸이 구속되어 있더라도 입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숨기고 있는 패가 있을 때.

    그리고 그 패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태도였다.

    그대로 마무리를 지으려던 마르타는 그런 유피테르의 모습을 보고서 살짝 불안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든 상황의 주도권은 다름 아닌 그의 손안에 있었다. 유피테르의 손안에는 공허함만 가득했다.

    유피테르의 독특한 마법도 마나 드레인 사슬에 묶여있는 동안에는 사용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증거로 은색 머리의 대공자는 몇 분 동안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미 상황을 역전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르타는 다시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그럼 유피테르 님의 마나는 좋은 곳에 잘 사용하도록 하죠. 이제 작별이네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으신가요? 가문의 대공자이시니, 마지막 유언 정도는 전달해드리도록 하죠. 뭐, 그쪽도 제가 차지할 거지만요.”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신관처럼. 마르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말뚝이 그의 심장을 찌르면 생명의 불꽃은 꺼져서 다시는 불타오르지 못할 것이기에. 가문의 대공자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에 마르타는 스스로가 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럼 반대로 묻지. 고작 마나 드레인 하나로 인간을 배신한 건 만족하나?”

    “그럼요. 마나 드레인.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법입니까? 적의 힘을 그대로 나의 힘으로 만드는 것. 적의 약점을 찌르는 아르테미스 가문의 마음가짐과도 유사하지 않습니까?”

    즉답이었다. 마르타는 말한 것처럼 자신의 행동에 한 점 부끄럼이 없었다. 리치가 말했듯이 그것이 마법사의 본능일지도 몰랐다. 평소 알게 모르게 쌓였던 아르테미스 가문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었고.

    유피테르는 그 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성한 순례자처럼.

    마르타는 승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을 제어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말뚝은 유피테르에게 날아가 정확하게 두 곳에 박혔다. 머리와 심장. 마법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이었다.

    말뚝이 꽂히자, 유피테르는 울컥하고 피를 토하며 마르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증오도 분노도 없었다. 단지 생명의 빛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게 확실했다.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승리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리치가 경고한 것과는 다르게 꽤나 시시한 싸움이었지만 리치와 계약하며 얻은 힘은 유피테르를 상대하기 충분했다.

    잠시 후, 마르타는 감옥 결계는 그대로 두고서 사슬을 풀었다. 죽어버린 유피테르의 시체가 고장이 난 마리오네트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시체 주변에는 유피테르의 따듯한 피가 가득했다. 마르타는 싸늘하게 변해버린 유피테르의 시체를 직접 확인했다.

    대공자는 죽었다. 그의 육체는 다시는 호흡할 수 없었다. 마르타는 드디어 그를 속박했던 아르테미스의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그 사실에 마르타는 감격했다.

    그러나 승리의 술은 달콤했지만 너무나도 짧았다.

    “설렜니, 내 시나리오에?”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마르타의 등 뒤에서 어디서인가 많이 들어보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마르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얼굴 굉장히 보기 좋네. 그럼 2차전을 시작해볼까?”

    목소리의 주인은 마르타가 죽었다고 확신했던 유피테르였다. 말뚝 박혀 죽었던 유피테르가 입고 있는 옷에는 핏자국 하나 없었다. 마르타는 유피테르가 갑자기 재등장하자 혼란스러웠다. 대공자의 시체를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는가?

    심장도 멈추었고 시체도 아직 저기….

    마르타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시체가 있었던 자리를 확인했다.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유피테르의 시체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눈과 손으로 그의 죽음을 확인했었다.

    그가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마르타는 동료와 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죽음을 경험해왔다.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아니면 설마 마법?’

    뺨을 세게 쳐보아도, 주먹으로 땅을 쳐보아도 아픔이 느껴졌다. 이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대공자 당신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시체 확인까지 했다고!”

    마르타는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이 끔찍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마나에 취해 있던 정신도 순식간에 깨어났다. 몇 번을 봐도 그는 대공자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가 틀림없었다.

    유피테르의 아름다움 은색 눈동자에는 살아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반짝임이 있었다. 게다가 유피테르가 은은하게 방출하고 있는 마나는 그가 유령도 언데드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어둡고 침울한 던전 속에서도 빛나는 은색 긴 머리의 주인을 아르테미스 마법사단 단장 마르타가 몰라볼 리 없었다. 그가 쌍둥이라는 가정은 너무 바보스러워 생각해볼 가치도 없었다.

    “살만했으니까 살 수 있었던 거 아닐까? 2차 전에 앞서서 기회를 줄게. 자신의 실수가 뭐였는지 잘 생각해봐.”

    어린 학생을 교육하는 선생처럼 말하며 유피테르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는 분명히 가시가 있었다.

    마르타는 이 상황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그는 보호막과 같은 감옥 결계 안에 있었으므로 대공자의 마법에 직격당할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마나 드레인으로 마나를 잔뜩 흡수해서 평소보다 컨디션도 좋았다.

    만약 부족하다면, 리치와 계약하면서 얻은 능력으로 던전의 마력을 빌려오거나 몬스터들을 불러오면 해결될 문제였다.

    ‘마법을 해제하지 않기 잘했군.’

    절대로, 유피테르의 말 때문에 실수를 찾아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공자의 전략을 꿰뚫어야 했다.

    던전 4층이 자신의 홈그라운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르타는 에이엔이 사라진 후로부터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을 사용했다.

    자신이 있는 마법들로 공격했고 마나 드레인의 사슬로 압박하며 결국에는 숨통을 끊는 데 성공했다.

    그에 비해 유피테르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달의 대공자는 그럴듯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순간, 마르타는 벼락을 맞은 듯 전율했다. 생각해보지 못했던 가능성, 마나 드레인에 취해서 넘겨버렸던 자그마한 틈을 발견한 것이다.

    ‘대공자는 마나탄을 제외하고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어.’

    마법사들의 전투는 종종 체스에 비유되었다. 한 차례씩 공방을 주고받는다는 점과 서로의 생각을 읽고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실력있는 마법사들 간의 전투는 공격과 수비가 번갈아 가면서 이어졌다.

    공격이 막힌 후, 다른 방법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유피테르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단순하게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과 마나탄은 결코 제대로 된 공격 마법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뇌빙의 마나탄은 특이하긴 했지만, 아무리 강화해도 본질은 제로 서클의 마나탄일 뿐이었다

    실수한 것은 맞지만 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속인 것인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유피테르가 마법을 썼다면 마나 감지가 알려주었을 것이다. 환영 마법이라면 세컨드 서클에 도달한 1 단장의 마법을 신물이 날 정도로 겪어왔으니까 자신감도 있었다.

    유피테르가 사라졌었던 기간에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지만, 마르타 역시 단장으로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왔다.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다수의 전장을 헤쳐나오며 얻은 깨달음은 그를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그 표정을 보니. 드디어 뭘 실수했는지 알았구나?”

    유피테르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학생을 칭찬하는 선생님처럼 기뻐했다. 기특한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가 어려운 문제를 낸 것은 아니었으나, 과연 마르타가 해답에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곳곳에 널려있던 힌트를 활용하면 충분히 해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피테르는 그렇게 믿었다.

    “확실히 미숙했군요. 하지만 그게 당신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에 대한 답은 되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유피테르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얼굴, 가주와 닮은 저 얼굴을 용서할 수 없었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고 싶었다. 유피테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가 아르테미스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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