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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1화 (21/265)
  •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10)

    * * *

    ‘그래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남은 마나도 없는 나는…. 동료의 원수를 갚을 자격도 없는 거야.’

    그녀는 차라리 가장 영리한 단장인 1 단장 리테리아에게 조언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있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전한 상태라고 해도 2 단장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부단장과 단장의 차이는 극명했으니까.

    여기서 대공자의 발목을 잡느니, 차라리 얼음성으로 돌아가서 지원군을 데려오는 게 더 좋은 방법일 거라고 스스로 설득하며 아픈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텔레포트 링을 사용해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

    “마나가 없을 테니.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일단 반지를 돌려줄래?”

    유피테르는 마나가 없으면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없으니 돌아가도록 해주겠다고 말하며 반지를 달라고 요청했다. 마나를 채워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이곳에 남는다는 생각을 버린 듯, 에이엔은 아무 말 없이 유피테르가 준 반지를 세게 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그녀의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아티팩트였던 반지는 찌그러지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반지의 주인은 그였기에 반지를 던져 돌려주었다.

    유피테르는 반지를 건네받고서 마나를 잔뜩 채워 아티팩트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들고 에이인의 앞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서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친절히 끼워주었다.

    반지는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 딱 맞았다. 에이엔은 그런 반지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단장의 직위를 달기에 부족했던 걸까.’

    남자가 여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행동은 굉장히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생각은 완벽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떠나보내려는 남자와 가고 싶지 않은 여자.

    반지를 끼워주며 에이엔과 엄청나게 가까워진 유피테르는 그녀의 귀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이라면.’

    에이엔은 쉽게 믿을 수 없는 유피테르의 말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고 귓속말을 할 정도라면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아직, 가문을 배신한 마르타는 모르는 듯했다.

    이 상황은 그녀를 강제로 돌려보내는 유피테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으로만 보였으니까.

    무릎을 털고 일어난 유피테르는 에이엔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대공자 님.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주세요. 당신의 부탁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바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이 던전에서 사라졌다. 공간 이동의 빛에 휩싸여 사라지기 직전, 에이엔은 유피테르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어찌 되었든 유피테르가 그녀를 구해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유피테르와 에이엔의 일련의 행동을 본 마르타는 감탄하며 손뼉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박수를 치고 있는 마르타를 바라보았다. 유피테르의 눈빛은 지금까지 중 가장 감정이 들어있지 않아 차가웠다.

    그가 귀환한 이후로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에게 암시를 사용하실 줄이야. 역시 대단하시군요. 아르테미스의 가르침대로…라는 겁니까? 그렇게 달을 싫어하는 당신이 누구보다 달에 가까워질 줄이야.”

    마르타 역시 단장으로 지낸 기간이 길어 그 눈빛에 겁먹지 않았다. 2 단장이라는 칭호에 맞게 상당히 두꺼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타에게 있어 감정 없는 표정이란, 가주 카르멘에게서 자주 볼 수 있어 익숙하기도 했다.

    유피테르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작 무표정한 정도로는 위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둘만 남게 되자 마르타의 말투는 리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듯,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지는 연극 조로 바뀌었다. 마르타의 말에 유피테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암시? 내가 부단장에게 암시를 걸어서 강제로 돌아가게 했다고 생각해?”

    “속이려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리치의 도움을 받아 당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거든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 해골바가지. 내 정체를 안다고?”

    유피테르는 암시라는 말에 어이가 없는 듯 자리에 없던 리치를 욕했다. 사실, 유피테르는 입이 가벼운 빌어먹을 해골바가지가 리치 마법사인지 아니면 강아지가 먹다 버린 뼈인지 관심이 없었다.

    물론, 자신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지만. 준비한 함정에 정성이 보여서 그대로 따라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약속을 어기게 하는 것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미, 마리안느의 생일 파티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던전의 수준이 낮다는 걸 파악했고 빠르게 던전의 수호자를 박살 내고, 아티팩트를 챙겨서 늦게나마 파티에 참여하려고 했다.

    생일 파티는 밤늦게까지 진행되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 얼음성에 도착하더라도 얼굴은 비출 수 있겠지만, 마리안느에게 타박을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페미아, 사리아, 리네아 등 친해진 여동생의 친구들에게도 한 소리 들을 것이다.

    약속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왜 오지 않았냐고. 우리들이 잘못 한 것 있냐고. 용서해달라고.

    파티에 참여하지 못한 일은 분명히 그가 잘못한 것이었다. 그는 굳이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가 준비할 선물의 개수가 조금 늘어날 예정이었다. 던전의 아티팩트 정도라면 충분했다.

    유피테르가 느끼기에 그 4명은 귀족의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귀족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 같았다. 그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게 눈에 띄었다. 치졸하게 그것을 질투하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들이 자라 가문의 정치와 암투 등을 보고 받을 충격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나무는 자그마한 충격에도 버티지 못하니까.

    “당신의 두뇌가 울고 있는 게 느껴지십니까? 그 작은 뇌는 고대의 마법으로 강화된 제 마법에 벌써부터 패배감, 굴욕감을 느껴서 울음을 참을 수 없던 거지요.”

    “뭐 잘못 먹었어? 말투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 리치, 수호자가 맞아? 이상한 전염병을 옮기고 다니나. 신관들에게 연락해서 청소 한번 해야겠는걸?”

    우스갯소리를 하며 유피테르는 마르타의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에이엔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피테르와 마르타의 분위기는 의외로 바로 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연락도 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와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이상하게 변해버린 마르타의 말투였다. 붉은 안광을 내면서 고대 마법사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리치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지만, 마르타에게는 그 말투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큰 구두를 아이가 신어 뒤뚱뒤뚱 위태롭게 걷는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마법사의 본성입니다. 자, 당신도 보여주시죠. 당신의 욕망이란 이름의 불꽃을.”

    기다리다 애가 탔는지, 드디어 마르타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전투를 위해 유피테르와 거리를 벌렸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이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질 유효거리이면서도, 동시에 유피테르의 마법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거리.

    그는 편안한 듯 보이면서도 빈틈없는 유피테르의 자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까 말이지. 봐주지 않고 간다?”

    유피테르는 더 이상 그들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마법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적에 대한 정보 파악? 그 모든 일은 유피테르의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그는 그만큼이나 불합리한 존재였다.

    마왕 티폰을 일격에 때려잡는 사람에게 무슨 칭호가 더 필요하겠는가?

    마르타 식 가속 마법 ― 마나탄 연발

    선공은 마르타의 몫이었다. 수백의 마나탄 다발이 유피테르의 주위에 나타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속해서 그가 있던 곳에 직격했다. 단장급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나탄 역시 달랐다. 속도, 위력 뭐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유피테르의 반응도 빨랐다. 그는 마나로 몸을 강화해 엄청난 속도로 마르타를 향해 튀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마나탄을 전부 피하면서.

    “무영창에 시동어조차 없으신가요? 그야말로 마법이군요. 역시 수호자가 말한 게 사실이었나요?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영창이나 시동어라는 두 가지의 방법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마법 영창은 이른바 암시를 담은 주문이었다. 영창을 끝낸 마법은 이미지를 좀 더 확고하게 할 수 있어 강한 위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시동어만으로 펼친 마법의 경우 위력은 약해지지만 빠르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인전에서는 시동어만을 주로 사용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것 가지고 놀라면, 넌 죽을 때까지 놀랄 수밖에 없을걸? 단장급 맞아? 그렇게 반응 하나하나 하다간. 정말로 죽어.”

    유피테르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빈정거렸다. 그는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헤라클레스 후작 가문이 주로 사용하는 마나 자체를 몸에 둘러 신체를 강화하는 기술.

    헤라클레스 식 강화법 ― 메르카르트

    이 마법 아닌 마법은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신의 마법 유효 사거리 한가운데에 적을 두기에 효과적이었다.

    유페테르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여서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마르타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도 헤라클레스 정예 마법사가 사용하는 메르카르트를 본 적 있었지만, 유피테르의 것은 차원이 달랐다.

    왜 리치가 유피테르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대공자는 어중간한 던전 수호자 이상으로 강했다.

    “이 하찮은 마법사를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군요. 그럼 이건 어떠실까요?”

    마르타 특제 마법 ― 속도의 감옥 결계

    아직은 마르타 역시 여유가 넘쳤다. 수호자에게 받은 힘은 아직도 넘쳤으니까. 그의 육체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았다. 막,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익힌 어린아이처럼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더 강한 자와 싸워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마르타는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결계 마법을 펼쳤다. 마르타의 의지가 깃든 마나가 공간을 지배했다.

    “그 마법 리테리아의 작품이군? 에이엔이 말했던 그건가. 발전이 전혀 없는걸? 리치에게 통하지 않았다면….”

    유피테르는 그 마법이 리테리아 제 1 마법단장의 손을 통해 개량된 것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맞췄다. 마법이 간파당했다는 사실은 꽤 치명적이었다.

    “…나에게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뇌빙의 마나탄

    전기와 얼음의 속성이 섞인 엄청난 수의 마나탄이 결계와 부딪쳤다. 결계에 금이 간 줄 알았지만, 리치가 강화해 준 마나는 유피테르의 마법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마르타는 흠칫하며 놀랐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바로 표정을 다잡았다. 지금은 목숨을 건 전투 중이었다. 손에 쥔 패를 들키지 않으려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마법사들의 싸움은 체스와 같았다. 체크메이트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본심을 숨겨야 했다.

    ‘결계는 제대로 발동했다. 하지만 어떻게 대공자는 혈족 마법을 섞어서 사용하는 거지?’

    유피테르의 공격이 끝나자 강화된 결계 마법답게 엄청난 수의 사슬이 땅속에서 튀어나와 뱀처럼 꽈리를 틀었다. 그 사악한 뱀들은 유피테르가 붙잡고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다. ‘속도’의 속성이 추가된 결계에서 유피테르의 움직임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이치에 간섭해 속도를 임의로 바꾸는 마법은 그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마르타가 단장이 되기 전 리테리아에게 매달리면서까지 다양한 결계 마법을 죽어라 배운 이유는 아군에게 기회를, 적군에게는 죽음을 선사해주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음, 확실히 이건 조금 곤란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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