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9)
* * *
확실히 달이 그를 버렸어도, 유피테르는 여전히 가문의 대공자였다. 그의 지위는 카테리나의 노력으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건 어찌 되었든 가문의 경사였고, 마리안느는 생일 파티에서 유피테르의 귀환을 알리려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꼭 유 오빠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잘 소개할게!”
마리안느는 돌아온 오빠가 너무나도 좋았는지 인식을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꼭 참여해서 같이 축하해달라고 부탁했다.
‘참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리안느’
유피테르는 꼭 파티에 참여하겠다고 말한 것과 다르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마리안느에게 많이 미안했다.
약속이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였으니까. ‘그녀’를 찾기 위한 아티팩트 중 하나인 결계석만 찾으면 빠르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상상치도 못한 에키드나라는 존재가 상황을 흔들어놓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설 속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처럼.
“자네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물어보는 건 불필요할 터인데. 어리석게 행동하지 말게나. 그럼 이 몸과는 잠시 작별이겠군.”
리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서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리치 덕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 유피테르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기습했으면 생일 파티로 돌아가서 ‘진실’을 알릴 수 있었는데.’
“단독으로 텔레포트를 사용하다니?”
에이엔은 게이트나 아티팩트가 아닌 스스로의 마법으로 공간을 이동한 것을 보고 놀랐다. 현재 마법사들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과거의 마법이 지금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은 배운 적이 있었다.
당시의 마법사들은 혼자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 사례도 역사 시험 문제로 서술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 시험에서 꽤 고득점을 받았었다.
그러나 에이엔은 던전에서 겪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미묘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부단장인데도 수호자 리치에게 심각하게 겁을 먹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줘 유피테르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과거의 마법들은 지금처럼 개인에게 특화된 마법은 아니었지만, 역사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들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몰랐나?”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리치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공포심도 조금이나마 옅어진 듯 에이엔은 마법사단 부단장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까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수치심을 느꼈다.
교육받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의 유일한 신념이었다. 이는 단원의 행동을 제한하는 방침이 아닌 ‘교육’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고 탁월한 교육을 통해 키워낸다. 이 방법을 통해 이름을 날린 마법사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현세대의 4명의 마법사단 단장 모두 이 방식으로 현재의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비록, 세컨드 서클의 벽을 넘은 사람은 1 단장 한 명뿐이지만, 애초에 퍼스트 서클 역시 아무나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단장들도 세컨드 서클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잡은 상태라고 알려졌다.
아르테미스 가문에 워낙 천재들이 많았을 뿐이었지 결코 마법사단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황실 출신이었던 초대 아르테미스 공작은 그 시대의 유일한 서드 서클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을 샀던 피가 진하게 섞인 것 때문일까.
“그럼, 이제 제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여야 할 때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유피테르 님.”
리치가 떠나고 혼자 남은 마르타가 한 걸음씩 천천히 유피테르에게 걸어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마나는 벌써부터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변을 분쇄해버릴 것 같은 마르타의 마나를 분명히 느끼고 있음에도 유피테르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타 단장님 아니죠? 제가 생각하는 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실 수 있으시죠?”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에이엔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녀는 상상과는 다른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답변에 응해준 건 마르타가 아닌 유피테르였다.
“에이엔이라고 했지? 이걸 사용해서 넌 얼음성으로 돌아가. 마나를 다 쓴 거 같은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싸우는 데 거슬려.”
유피테르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후, 에이엔에게 던전을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며 무언가를 던졌다. 에이엔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고서 무엇인지 확인했다. 특이한 모양을 한 반지였다.
마나의 기운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거로 보아, 텔레포트의 마법이 담겨있는 아티팩트일 듯했다. 텔레포트 아티팩트는 고가의 물건이라 아무나 보유하지 못하는데 저렇게 돌멩이 던지듯 쉽게 던져주는 것을 보고 에이엔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체 저주받은 대공자는 무슨 일을 겪고 온 것인가. 마법사단에서 지옥 같은 훈련을 받은 자신도 리치 앞에서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공자는 달랐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저주, 무능력, 수치 이 모든 단어는 과거의 한 소년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부끄럽게도 이 단어들은 현재의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회의 기회를 얻고 싶었다.
유피테르가 저주받은 대공자라는 점은 이미 상관없었다. 강력한 마법사의 옆에 당당하게 싸워보고 싶었다.
“추태를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유피테르 님 그러니 적어도….”
마르타를 제외한 다른 동료들의 생사를 알고 싶었다.
현재 생사가 확인된 것은 본인과 어느새인가 적으로 돌변한 마르타 단장뿐. 다른 단원들과. 리오 단장님의 생사를 꼭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도 이 던전의 끝을 보아야만 했다.
“두 번은 말하지 않아. 돌아가라.”
그러나 유피테르는 차가웠다. 에이엔의 사정과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만 같았다. 에이엔은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옛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유피테르 님. 이대로 돌아갈 수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런,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에이엔 부단장. 다음은 저의 차례랍니다? 순서를 지키세요.”
언제든 유피테르와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듯한 모습에 에이엔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마르타 부단장은 정말로 아르테미스를 배신한 거였다.
“마르타라고 했나? 네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니까, 싸우기 전에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마, 저쪽에 있는 에이엔 부단장 때문이겠죠? 그건 저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천천히 처리하시죠.”
유피테르는 뜬금없이 마르타에게 말을 걸어 양해를 구하더니 에이엔에게 다가갔다. 에이엔은 이번에야말로 유피테르가 자신을 믿어주고 무언가 도움이 될 역할을 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그녀는 유피테르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하기 위해서는 걸음걸이,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마나의 기세 등에서 단 하나의 단서라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야 했기에.
자신에게 직접 올 정도라면 무언가 대단한 일을 맡겨주는 걸지도 몰랐기에, 에이엔이 갖는 일말의 기대감은 조금씩 커졌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소리를 느끼며, 그것으로 초를 셀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유피테르와 자신뿐이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회색의 빛으로 뒤덮여 존재감을 잃고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님에도,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이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떠한 시간보다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마법사단 입단 시험과 부단장 승격 시험의 결과를 들을 때만큼 몸이 떨리고 있었다.
사실, 유피테르의 말을 기다리는 일이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 몇 시간 동안 겪은 일이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실망, 자책, 긴장 그리고 희망. 이 모든 감정이 한 번에 뒤섞여 표출되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에이엔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그와 에이엔의 거리는 팔을 쭉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에이엔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유피테르의 말은 예측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강렬했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점차 다가오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일하지 않았다. 아니, 일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수당 없는 야근은 절대로 싫다고, 극구 반대하는 것 같았다.
“에이엔? 듣고 있니?”
유피테르는 다정하게 에이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에이엔은 스스로가 나비가 된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피테르란 이름의 꽃에게 한시라도 빠르게 다가가고만 싶어졌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일은 모두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의 목소리와 상냥한 얼굴은 이전까지의 태도랑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 그거에요 유피테르 님.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꽤 있다구요. 정보라던가 그런 것들도 많구요.’
이는 에이엔의 기대감을 올려주기에는 충분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마르타는 본인이 직접 말했던 것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이야기를 방해하려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거친 말처럼 날뛰었던 마나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에이엔이 생각하기에 마르타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단지,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그녀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건 배신한 단장이 아니라 대공자 유피테르였다. 그의 말이 자신의 길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네, 유피테르 님. 4 마법사단 부단장 에이엔 오르비스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마르타 단장님에 대한 정보를 드리면 될까요? 그것도 아니면….”
유피테르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기운차게 대답한 에이엔의 목소리는 그녀의 신이 난 기분을 확실하게 반영한 듯, 한껏 높아져 있었다. 넝마가 된 그녀의 단복 대신 걸치라고 주었던 유피테르의 검은색 로브가 흔들릴 정도였다.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이만 얼음성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데?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니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유피테르는 정보를 주겠다는 에이엔의 말을 거절했다.
에이엔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그녀의 기대감은 한순간에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한여름 밤의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었지만, 누구나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운을 잃고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에이엔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녀는 기대할 힘도 없는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녀에게 실책을 만회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이를 웃으며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은 너무나도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