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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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한 거 아니야? 아직 끝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수호자가 나온다니. 지금까지 흔해 빠진 전개를 보여줬으면, 그 뒤에도 지켜줘야지. 이 사람아. 사람이 아니고 리치인가. 어쨌든 한결같아야지. 그게 네 빌어먹을 정의잖아?”
“크하하하하하하. 그래, 그렇군. 네 말이 옳다. 인정하도록 하지 미래의 마법사여.”
유피테르는 에이엔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신랄하게 리치를 비판했다. 리치는 유피테르의 대답이 걸작이라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움직이는 해골인 리치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 같았다.
리치는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하는 유피테르가 꽤 마음에 든 듯했다. 마법사단과 전투할 때와는 분명하게 다른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물론, 마르타와도 꽤 대화를 한 편이었지만 지금 이 정도는 아니었다.
뒤에서 우두커니 있던 에이엔은 이 사람이 정말 제정신이 맞냐는 표정으로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대체 대공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저 리치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걸로 마르타 단장을 갖고 놀았다. 게다가 2개의 마법사단을 전부 도륙했을지 모를 존재였다.
아무리 가문이 유피테르를 핍박했더라도 아르테미스란 이름의 깃발을 공유하는 자라면 적어도 화부터 내야 정상이었다.
몬스터가 모두 인간과 공생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에이엔은 알고 있었다. 수호자는 그 괴물의 범주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이라는 것 역시. 많은 경험을 통해 괴물이 주는 본능적인 공포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전투에 익숙한 마법사단의 마법사 그것도 부단장이었다. 던전 공략을 해본 경험도 있었다. 10층 이상의 던전은 아니지만, 그 이하라면 몇 번 정도 공략에 참여한 적 있었다. 골렘, 서리 거인, 뱀파이어 등 다양한 수호자들과 싸우며 승리한 기억은 그녀에게 큰 자신감이 되어주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주는 공포에 점차 익숙해져서 스스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사실이 아니었다는 걸, 단지 착각이었다는 걸 이 순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냥’을 당하는 괴로운 기억은 없었다. 이는 훈련만으로는 익힐 수 없었던 감각이었다.
가주와 단장들과 대련을 할 때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강력하고 무서운 마법을 사용하는 그분들이 자신과 같은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최악의 경우에는 최강의 마법사인 가주 카르멘 아르테미스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뢰도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리치가 동료들을 쓰러트리는 광경은 에이엔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폭발의 여파로 벽에 갇혀 운 좋게 세상의 공기를 다시 맛볼 수 있었지만, 다른 동료들과 단장님들은 사신 디스의 곁으로 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은 에이엔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이었다.
제대로 된 발악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추하게 살아남는다면 같이 싸운 동료들을 볼 낯이 없었다. 심지어, 저주받은 대공자라고 불리며 손가락질받았던 유피테르의 도움으로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었건만, 에이엔의 몸은 누구보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 수호자가 벌써 나와서는 공략하는 재미가 없겠지? 그래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보았다네. 부디 좋아해 줬으면 하는군.”
리치는 붉은 피와 같은 색의 안광을 뽐내며 마치 연기하는 듯 행동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리 정해놓은 대사를 말하는 듯했고, 동작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다른 점은 살점이 하나도 없는 리치를 과연 배우로 써줄 곳이 있냐는 점이었달까? 연기력은 대단하긴 했지만 말이다.
“선물?”
리치에 말에 대답한 건 의외로 공포에 잠겨서 떨고 있던 에이엔이었다. 몸의 모든 센서가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려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뒤에 벌어질 일을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저 리치에게 최소한 한 방은 먹어주고 싶었다.
에이엔은 저 해골 마법사가 분명히 두려웠지만, 동시에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오. 자네인가. 그 마르타라는 자와 싸울 때 지켜보던. 그자는 이 몸을 꽤 만족시켜주었지. 물론, 그것도 전부 계산대로였지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 어?”
“그럼. 연약한 미래의 마법사와는 다르게 말이지. 이 몸의 계산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없다네. 그래도 실력이 없지는 않군. 네 마나가 무서워서 떨고 있는 게 느껴지나? 마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몸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리치의 말이 끝나자. 바로 옆의 공간이 열리더니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본 에이엔은 자신의 눈동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결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마르타 단장님? 어째서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은 마르타 아크타이온 단장이었다. 그녀의 직속 상관은 아니었지만 던전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 거대하고 든든했던 등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치와 사투를 벌이던 때와 하나도 변함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 자네는 4 단장의 부단장 에이엔이로군? 살아있었다니 다행이야. 내 노력도 충분히 빛을 발한 거로군.”
에이엔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마르타는 활짝 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 동일한 아르테미스 2 마법사단의 엠블럼이 달린 단복을 입고 있었지만 마르타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져야 하지만, 위화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게 선물이라고? 악취미인걸. 리치 씨. 저기 있는 에이엔은 이 상황을 못 견딜 게 분명한데. 도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유피테르는 이미 리치가 말하는 선물의 정체를 감 잡은 듯했다. 에이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피테르와 리치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겁먹은 토끼 같았다.
동료가 살아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소식이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뭘, 이 몸이 준비한 시련의 원래 도전자는 자네여야 했네. 이상한 자들이 먼저 와서 기분이 나빠졌지만 말이지. 괜찮은 자와 계약을 맺을 수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결국, 자네가 와주었으니 다행이야. …의 후계자인 자네가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네.”
“그분은 우리 아르테미스 가문의 정식 후계자시다. 한낱 몬스터인 네놈이 그렇게 쉽게 말할 분이 아니시란 말이다.”
리치는 50명이 넘는 마법사단을 원래 초대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심지어, 유피테르가 오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거라는 말투였다. 마치, 생일에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태도였다.
공포에 떨고 있던 에이엔은 유피테르를 친구처럼 부르는 리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난 듯 리치에게 대꾸했다.
평소 주입된 공작 가문의 일원에 대한 충성심이 어떻게든 공포감을 밀어내는 데 도움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재미없었던 교육이 지금만은 너무나도 고맙다고 생각하며 에이엔은 특기인 바람 마법으로 리치를 공격했다.
“이것도 막아 보시지!”
에이엔 식 바람 마법 ― 폭풍의 분노
시동어와 함께 거대한 폭풍이 리치를 향해 날아갔다. 발끈해서 한 방을 먹여줄 생각만 가득했던 그녀의 시선에 웃는 리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랬다.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걸어 나온 부단장은 리치의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근처에 같이 서 있었다.
‘이, 이대로면 단장님도 함께 마법의 범위 안에 들어갈 텐데.’
마법의 범위 안에 마르타 2 단장이 보이자 에이엔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마나를 강제로 쥐어짜 발동시킨 마법이기에 세세한 조정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리치와 함께 마르타 단장마저 마법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에이엔에게 남아있는 선택지 마법의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잠깐, 기다리게 에이엔 부단장. 이분들이 아직 대화하는 도중이시지 않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걸세. 리오 단장에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나?”
리치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마법을 방어한 것은 리치가 아니라 2 단장 마르타였다. 그는 속도의 보호 결계를 사용해 거대한 폭풍을 아무 문제 없이 막아내었다. 리치와 마르타 그리고 미로마저 한 번에 부술 기세로 주변을 집어삼키던 폭풍은 작은 상처조차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해서.
“어째서죠! 단장님! 왜 원수를 갚지 못하게 막으시는 거예요! 당신도 아르테미스의 마법사잖아요.”
에이엔은 회심의 기습공격이 막혀버리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절규했다. 지금까지 회복된 모든 마나를 사용한 것이어서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 그 어떠한 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장님. 대체 왜…?’
그 모습이 에이엔에게는 더 화가 나는 일이었다. 대체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아군이어야 할 단장님께서 자신의 마법을 막은 것인가? 그리고 그의 결계 마법이 죽어 마땅할 리치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 더 충격이었다.
저분이 가문을 배신한 것일까? 아니면 이 던전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선물이라는 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에이엔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 미쳐버린 달의 가문을 말하는 것인가? 웃기는군. 그 가문은 곧 멸망한다. 네놈들이 그분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을 터이니.”
그 촌극을 보고 있던 리치는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바로, 아르테미스 가문이 멸망할 거라는 말이었다. 리치를 경계하면서도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유피테르가 리치를 쳐다보며 그 말이 정말로 진실인지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는걸? 굳이 말하자면 아직은 그곳 소속이니까. 미쳐버린 건 맞는데. 아직 필요한 부분이 좀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