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8화 (18/265)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7)

* * *

마지막까지 리치에 대항하여 싸우던 사람이 결계를 유지하던 마르타 단장이었다. 애초에 다른 이들은 다 쓰러졌다. 리오 단장 역시 남은 마나가 없었기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거로도 벅찼다.

마르타 단장은 특기인 ‘속도 ’마법을 사용하며 리치에게 대항했다. 속도 마법은 말 그대로 물체의 속도나 마법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마나량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수호자의 등장은 빛이자 어둠이었다. 고작 4층의 던전에서 리치를 쓰러트린다면 구원 부대가 오기 전에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정체불명의 기운에 이미 쓰러진 단원들이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시간은 마르타의 편이 아니었다.

마르타는 마나 감지를 사용해 리치가 가지고 있는 마나량을 측정했다. 리치에게서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마나가 감지되지 않았다. 마르타는 속도 마법을 잘 활용하면 던전 수호자를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자신이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마르타는 결단을 내렸다.

“제발…. 통해라.”

마르타 특제 마법 ― 속도의 감옥 결계

마르타는 먼저 보호 결계를 다시 만들고서, 속도 마법으로 강화된 결계를 펼쳐 리치를 공격했다. 일반 결계가 ‘보호’의 기능을 한다면 감옥 결계는 ‘고립’의 기능이 강한 마법이었다.

감옥 결계는 마법사단 중 독보적인 존재인 1 마법사단 단장에게 배운 마르타의 숨겨진 패였다.

이제 결계와 한 번에 리치를 마무리하면 끝이었다. 승리가 눈앞이었다.

“하등한 인간이여, 희망은 없으니 멸망해라. 인시너레이트.”

그러나 리치는 그것조차 계산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희망이란 이름의 유리병을 뺏어 산산조각내는 것이었다. 인시너레이트라고 불린 마법은 굉장한 화력으로 감옥 결계를 흔적도 없이 소각시켜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보호 결계마저 태워버렸다.

아마, 이 마법이 맨 처음 보호 결계를 없애버렸던 마법일 거라고 마르타는 생각했다.

“이럴 수가….”

마르타는 회심의 감옥 결계 마법과 보호 결계마저 사라지자 허망한 표정으로 리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포기하기에 그의 등 뒤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가 세바스찬에게 배운 ‘노력’은 이런 데서 포기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려고 뺨을 쳤다. 공포감과 허망함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2개의 마법사단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현재의 마법사란 고작 이 정도인가. 약하군. 너무나도 약해. 이것이 어긋난 사랑의 결과인가. 과거의 마법사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겠군.”

리치는 마르타가 사용하는 마법에 굉장한 실망감을 보였다. 퀭하니 뚫린 두개골의 눈동자는 붉은 안광을 내며 마르타를 조소했다.

“설마. 이 정도로 포기하면 나는 가주한테, 아니 세바스찬 씨에게 먼저 죽을지도 몰라. 과거의 망령은 이만 사라져주시죠.”

마르타는 리치의 말을 반박하며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마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그는 일어서 마르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재미있군, 더 발악해봐라. 네게 이길 확률은 전혀 없으니. 마법사는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자. 나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그 연약한 몸으로 증명해봐라. 헬파이어…. …오브, 어스퀘이크.”

리치는 뼈밖에 없는 몸으로 기쁜 듯 웃었다. 살점 하나 없이 웃는 모습은 기괴했지만 사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계산이 틀리기를 바라는 사람, 아니 리치 같았다.

그러나 봐줄 생각은 없는 듯 사용하는 마법마다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리치는 헬파이어, 인시너레이트, 아이스 오브, 어스퀘이크 등 대인, 광범위 마법을 가리지 않고 퍼부었다.

헬파이어와 인시너레이트로 주변은 모두 불타고, 아이스 오브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곳곳에 꽂혀 얼어붙었다. 게다가 어스퀘이크로 지반이 모두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마르타 역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속도 마법은 빨라지게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을 느리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리치가 사용하는 마법들을 최대한 느리게 하고, 자신의 마법들을 더욱 빠르게 만들어서 대응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해골바가지 괴물과 싸우는 이 짓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는 거 같으니.”

“그래 그게, 바로 마법사의 본성이다.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자. 자신의 정의를 세계라는 거대한 도화지에 그리는 자. 이 본성이야말로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확실히…. 그래도 이번에는 이겨야겠군. 내 정의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말이지.”

여기까지가 에이엔이 기억하는 내용이었다. 에이엔은 남은 단원 중 거의 마지막에 기절했기 때문에 마르타와 리치의 대결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수준으로 전부 이해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고, 단순히 기억에 의존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어색한 점도 있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장급의 마법사와 리치의 싸움이 미치는 여파가 너무 거대했기 때문에.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마르타가 리치에게 밀리긴 했지만, 바로 승부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단장이란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것은 아닌 듯, 마나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마르타의 전투 지속력은 상당했다.

“마나 드레인인가. 그걸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상대라면 확실히 귀찮네.”

“마나 드레인? 그 기이한 현상에 대해 알고 계신다면, 그게 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유피테르 님.”

에이엔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유피테르는 처음 들어보는 마나 드레인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부단장이었던 그녀는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을 본 유피테르는 한숨을 내쉬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마나 드레인. 말 그대로 마나를 흡수하는 거다. 뱀파이어가 피를 빨아 먹듯이. 상대방의 마나를 흡수해서 자신의 마나로 정제해 사용할 수 있지. 물론, 마나 드레인의 조건은 상황마다 다르니까 그 이후는 유추할 수밖에 없지만.”

“말도 안 됩니다. 그런 마법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부단장입니다. 그런 불합리한… 말 그대로 마법사의 근본을 부정하는 마법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리석은 대답에 유피테르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이 이것밖에 되지 않다니.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던 그가 어린 시절에 당한 멸시와 비난은 대체 뭐였는가. 더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가문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쓰레기 같았다.

물론, 그들이 지금까지 보였던 업적은 결코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은 강했다. 세컨드 서클을 이룩한 마도사들은 애초에 같은 인간의 경지로 놓을 수 없으니 그들을 제외한다면 세아니아 대륙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단장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의 사태로 냉정함을 잃는다?

뭔가 이상했다. 예상외의 사태가 발생했더라도 무력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세바스찬이 해주었던 이야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가 ‘일부러’ 이들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유피테르는 자신이 만든 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던전 수호자가 정말로 마나 드레인을 사용하는 리치라면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틈이라도 보였다간 먹히는 쪽은 이쪽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결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마나 드레인… 일단 마나 감지에 걸린 생존자들은 구출해야 하나. 리나의 일도 있고, 마리안느와도 꽤 친해졌으니까 말이지.’

자신을 버린 달의 가문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아티팩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겸사겸사 다른 아티팩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었다.

에이엔은 조금은 상태가 괜찮아졌는지 스스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극도로 쇠한 기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에이엔을 침묵 마법으로 조용하게 만들고서는 빠른 속도로 치료했다.

그가 치료하는 도중 에이엔이 유피테르의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에 여러 번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쿨하게 무시했다. 현재에 그에게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르타라는 단장은 그래도 인정할 만했으나 나머지는 수준 이하였다.

어느 정도 회복한 에이엔은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것 그리고 도중에 발견한 생존자를 구출하겠다는 유피테르의 목표를 듣고 제발 동행시켜달라고 간청했다. 그녀는 유피테르가 마법사단에 적잖이 실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에이엔이 느끼기로 현재의 그는 절대로 폐공자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절대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가끔, 가주께서 마법사단의 훈련을 참관하거나 가르침을 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보이던 모습과 굉장히 유사했다. 유피테르 특유의 미형의 외모가 아니었다면, 가주를 대할 때와 같은 무의식적인 공포에 제대로 대화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그녀의 마나는 분명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미로를 따라서 계속 걸었다. 처음, 에이엔은 짐이 되기는 싫다고 유피테르를 호위하며 앞서서 걸었다. 그러며 가로막는 스켈레톤을 상대했다. 그러나 에이엔은 1층에서는 디저트였던 스켈레톤을 상대하는 데에도 어려워했다.

부단장이라는 직급을 가진 만큼 그녀 역시 퍼스트 서클 유저이었지만, 마나를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다. 마나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마법사는 그저 고기방패에 불과했다.

“네 속도는 너무 느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지원 병력이 오지 않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깨닫고 있지? 이제 자력으로 던전을 공략하고 돌아가는 길뿐이니까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기나 해.”

답답했던 유피테르는 그냥 싸우는 건 본인이 하겠다고 뒤에서 잘 따라오기만 하라고 선언했다. 에키드나가 주었던 수정 구슬의 내용은 점차 전부 사실로 판명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피테르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자력으로 이 몸이 설계한 던전을 돌파한다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나도 끼워주겠나? 미래의 마법사여.”

쇳소리 나는 낮은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아직, 미로의 끝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마나 드레인을 사용하는 던전 수호자 리치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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