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7화 (17/265)
  •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6)

    * * *

    “고작 이 정도밖에 준비하지 않고 날 환영하다니. 이렇게 얕잡아 보인 건 정말 오랜만인데?”

    산처럼 보이는 뼈다귀의 무덤 앞에서 유피테르는 웃었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은 강력하면서 동시에 간결했다. 마나 지뢰를 시동어도 없이 미리 사용하여 수의 폭력을 뒤집어버리는 방법을 섞어 보여주었다. 심지어 여러 속성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는 그의 마법은 현재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적의 약한 속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점을 냉혹하게 찔러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은 아르테미스의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적의 마법을 저격할 수 있는 약점 속성을 보유한 마법사가 있을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던전의 강력한 몬스터 중 하나인 서리 거인은 불꽃 속성에 맥을 추지 못하고 녹아버렸는데, 이는 아폴론의 혈계 마법이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유피테르가 보여주는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전투 방식은 아르테미스 초대 가주가 보여주었던, 지향했던 방식을 현실에서 펼쳐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초대 가주의 전설은 서드 서클의 벽을 넘으면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스켈레톤 무리가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유피테르는 비슷한 방식을 사용해서 손쉽게 격퇴했다. 그저 힘으로 압살했다. 마법사단이 1층을 폭격했을 때보다 더 간편한 방식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던 중, 한 소녀가 앞서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은색 포니테일을 한 아름다운 소녀, 추억으로 남아있는 동생 카테리나와 매우 닮아있는 여자아이였다. 소녀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미로의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마치, 유피테르 보고 따라오라는 듯했다. 그 모습에 유피테르는 환멸을 느꼈다.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설마 이걸 함정이라고 만든 거야?”

    그 혼란을 초래하는 함정은 유피테르에게 전혀 타격이 없었다. 미로 같은 곳에 들어와서 전투를 치러도 그의 마나 감지는 원활하게 작동했다. 이곳에서 혼란에 빠졌던 마법사단과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마법을 사용하는 데도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내뿜는 마나에 어둠의 기운이 겁을 먹은 듯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던전 입구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는 함정에 자진해서 빠져들기로 했다. 이 뻔한 클리셰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든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던전이 보여주었던 수준은 그에게 있어서 몸풀기도 되지 않았다.

    한 발자국씩 먼저 사라지는 소녀의 환영을 쫓아가던 중, 그의 마나 감지가 생존자가 있다고 알려왔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온 선발대인가. 그러기에는 해놓은 게 너무 없는데? 아르테미스의 이름에 아직도 무언갈 기대하고 있는 내가 바보일지도.’

    선발대로 추정되는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이 1층을 격퇴한 방식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4층을 공략하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미로의 입구는 닫혀있었고,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마나로 인한 공간의 흔들림 역시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던전의 공략이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유피테르 역시 던전 밖으로 내쳐졌어야 했다.

    ‘일단 구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뭐.’

    그는 감지된 사람을 구하자고 마음먹었다. 고민하는 것보다 구해서 물어보는 게 더 빨랐다. 마나로 감지한 바로는 생존자는 벽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주변에 적당한 크기의 결계를 생성했다. 그 후, 빛 속성을 추가한 마나탄을 이용해서 벽에 구멍을 뚫었다. 위력 역시 조절했기에 갇혀 있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유피테르가 아르테미스에게 친절하게 대할 리 없었다.

    갇혀 있던 마법사는 마나탄이 만든 구멍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게 꽤 아팠는지, 잠들어 있던 마법사는 콜록거리며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그 기침은 점점 심해졌고, 곧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초점을 잡기 위해 눈을 감고 뜨는 걸 반복했다.

    “다… 당신은 설마? 하지만,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눈을 뜬 마법사는 유피테르를 보고서는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고, 떨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마음에 안 드는 듯 유피테르는 코웃음을 쳤다. 아르테미스를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여실히 말투에 스며들어있었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설마 살려줘서 불만이신가? 왜 나를 무서워하는 거지? 저주받은 아이라서? 아. 알겠다. 나보다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구해져서 맞지?”

    “정말로, 유피테르 대공자이신가요? 어째서 이곳에, 아니 그것보다 정말로 마법을….”

    “일단, 진정 좀 해. 이것 좀 놓고 네 상태를 봐봐. 흙먼지로 가득하거든?”

    그 마법사는 4 마법사단 부단장이었던 에이엔이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멈추지 못하고 유피테르의 로브를 우악스럽게 잡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붙잡힌 양어깨가 붉게 부어오를 정도로 아팠지만 일단 그건 고의가 아니었기에, 용서했다.

    에키드나의 말처럼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다. 항상 단정해야 할 마법사단의 단복은 곳곳이 찢어져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누더기가 되어버렸고, 그녀의 얼굴에는 격전의 흔적이라고 예상되는 그을음이 가득했다.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던전의 차가운 공기에 추워하자 유피테르는 자신의 로브를 벗어서 그녀에게 씌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저는 4 마법사단 소속 부단장 에이엔이라고 합니다.”

    “유피테르라고 이름을 불러, 대공자라는 말.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네 상관은 아니니까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어.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이 고작 4층짜리 던전에서 헤맬 정도로 약해진 거야?”

    “저희는 함정, 함정에 빠져버린 겁니다. 이곳은 2층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알아채는 게 너무 늦었습니다.”

    “함정?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실수가 반복되면 실력이야. 함정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순간 너희들의 가치는 그것뿐이라고 정해지는 거지.”

    “그건. 맞는 소리지만…. 적어도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발끈했는지, 좋지 않은 몸 상태에서도 에이엔은 유피테르에게 소리 높여 반박했다. 유피테르는 변명하지 말라고 정론을 말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그가 맞았다. 변명은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환자를 앞에 두고도 냉정했다.

    “최선을 다했다라. 아르테미스는 최선이 아닌 최고의 결과를 내는 가문 아니었나? 그리고 마법사단은 그런 가문 내에서도 최고 엘리트의 집단이야.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유피테르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국, 에이엔은 변명을 그만두고 유피테르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대공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과거의 그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다니는 불쌍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대놓고 유피테르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아르테미스의 이상과 유사했다. 카르멘 아르테미스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냉정한 판단력과 분위기를 끌어가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강력한 힘.

    “그래서 왜 그런 몰골로 벽 속에 갇혀 있었는지부터 설명해봐.”

    “그, 그게….”

    유피테르는 그녀가 처음보다는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벽 속이라는 상상치도 못한 곳에 갇혀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에이엔은 당시의 감정이 떠올랐는지 울먹거렸다. 솔직히 귀찮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 유피테르는 가만히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진정이 된듯 에이엔은 마법사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마법을 빼앗았던 기운이 문제였다. 단원들을 무력화시켰던 공포스러운 기운의 침식 속에서도 마르타 단장은 꽤 오랫동안 버텼다. 그의 능력이 ‘속도’인 것도 도움이 되었다.

    속도 마법을 사용해 마나를 빠르게 가속시켜 결계의 기운을 강화했던 것이다.

    마르타 단장이 목숨을 걸고 버티는 동안 리오 단장은 밖과 연락을 할 방법을 강구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마법사단 단장인 리오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했기에.

    그러던 도중 단원 중 한 명이 텔레포트 아티팩트를 챙겨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단원은 몸이 연약해서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 사실이 늦게 알려졌던 것이었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아티팩트 정도라면, 마법사들 몇 명을 얼음성으로 보내서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 아니야?”

    이야기를 듣고있던 유피테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있었다면 빠르게 지원요청을 할 수 있었고, 얼음성에 설치되어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필요한 자원과 마법사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그 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 갇힌 마법사단은 충분히 구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긍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에이엔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분명, 숨겨진 뒷이야기나 있을 것이라고 유피테르는 생각했다. 유피테르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의아해한다는 것을 눈치챈 에이엔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면 그, 그게 나타난 게 비극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절망적인 상황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텔레포트 아티팩트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마법사단은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데 아티팩트를 발동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당도하게 되었다.

    아티팩트에 들어있는 마법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나마 마나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나 지배력을 완전히 잃은 상황이었기에 정말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한 끝에 간신히 아티팩트를 발동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사람이 이동할 만한 완벽한 발동이 아닌 구조 요청서를 보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구조 요청서가 확실히 전달되자,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만 더 버티면 구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고 있던 마르타도 희소식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되찾았다. 한 번 마나를 움직이는 데 성공하니, 그에게 마나를 넘겨주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2 마법사단의 단원들은 마르타에게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남은 마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지옥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이 던전의 수호자였던 그 존재 ㅡ 리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리치는 단 한 번의 불꽃 마법으로 결계를 산산조각내어버렸다. 그러자 암흑의 기운이 마법사단을 침식하기 시작했고, 하나둘씩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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