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6화 (16/265)
  •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5)

    * * *

    에키드나가 준 수정 구슬을 재생해본 유피테르는 문제의 던전의 앞에 서 있었다. 수정 구슬의 내용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지만, 던전이 발생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구슬의 다른 내용도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 사람이 인류를 배신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 줄 몰랐어. 정말 재미있어. 다른 사람이 이 소식을 들으면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겠네.’

    던전의 입구에는 이미 누군가 출입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의 마나 잔향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는 유피테르가 아는 마법사의 것도 있었다.

    ‘강철의 리오인가…. 그럼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이 이곳을 온 거군. 그것도 당연한가. 마리안느의 생일을 방해할 순 없으니 몰래 온 거겠군.’

    유피테르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던전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발걸음에는 충분한 여유와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고작 던전이 ‘그녀’의 후계자인 유피테르를 위협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었다.

    “어디 보자 4층 구조의 던전에… 1층은 이미 돌파됐네? 제법인데 가짜 마법사들도.”

    그는 던전 1층에서 부서져 버린 스켈레톤의 산을 보며 중얼거렸다. 은백색의 긴 머리카락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늘 웃고 있는 은색 눈동자.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미형의 얼굴은 던전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화려하게도 저질러놨네. 리오는 예전이랑 변한 게 없네. 단순무식하지만 강력해.”

    이미 공략된 1층의 상황은 조용했다. 유피테르는 1층을 자세히 살펴보며 한 바퀴 돌았다. 역시,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없었고 걷다가 발견한 2층으로 향하는 문 역시 열린 흔적이 있었다.

    한 번 돌파된 던전은 침입자들이 모두 죽거나 던전에서 탈출하는 방식으로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재가동되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한 결판이 나기 전, 도전자들이 있는 던전에는 들어가지 않고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만약, 선발대가 향한 길을 뒤에서 몰래 따라 들어가 힘을 아끼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후발 주자는 언제든지 선배 도전자의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런 고생 없이 선발대의 발자취를 따라가 그들의 업적을 집어삼키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던전 상층으로 갈수록 공략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층에서 힘을 빼지 않는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혹시, 수호자가 떨어트리는 아티팩트를 먹을 수 있다면…. 그건 인생 최대의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각국은 던전에 관한 합의를 마치고 이 행위를 명백한 불법으로 지정했다. 각 국가에는 조디악의 일원들이 몇 명씩 존재했기에 합의는 상당한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 ‘조율자’가 나서준다는 믿음도 있었고.

    ‘잠깐.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던전 2층의 문에 다가가 문을 열기 전, 유피테르의 탐지 마법에 무엇인가 걸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아름다운 은색 눈동자에 웃고 있을 에키드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2층 포탈이 4층으로 이어져 있다고? 사람을 살려 보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군. 악취미잖아 에키드나.’

    던전이 아무리 미지의 영역이라고 해도 확실한 법칙이 몇 개 있었다.

    마나의 양으로 던전의 총 층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과 마지막 층의 수호자를 쓰러트린다면 아티팩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또, 5층 이하의 던전 포탈은 늘 1층에서 시작해서 차례대로 들어간다는 점이 그랬다.

    층수를 뒤엎어버리는 위험한 함정은 10층 이상의 던전에서나 발생하는 것이었다. 고작 4층짜리 초급 던전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리 없었다. 오히려 많은 경험이 마법사단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에키드나. 무슨 짓을 하고 다는 거야? 대체 그 인간에게서 뭘 봤길래. 어차피 그놈은 내 손으로 보내버릴 텐데 말이지.’

    유피테르가 알고 있는 한 에키드나는 평범한 마족이었다. 물론, 마왕 대리라는 자리와 그녀의 특별한 던전 마법은 인간들에게 마족은 무서운 존재라고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유피테르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평범했던 그녀를 마왕 대리로 만든 건 바로… 유피테르였으니까.

    그녀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사람, 아니 마족은 아니었다. 큰 상처가 있는 마족이기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유피테르는 눈앞에 있는 문이 4층으로 가는 사실을 깨달은 후, 들어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아르테미스 가문은 증오스러웠지만, 정보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그는 마나로 몸을 확실하게 보호하고서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눈 깜빡할 사이. 말 그대로 눈을 감고 뜨는 그 찰나의 시간.

    유피테르가 환한 빛에 눈을 감고 뜨자, 눈앞에는 1층과 다른 어둑어둑한 분위기의 4층이 유피테르를 환영했다. 그가 1층에서 판단한 사실이 맞았는지, 발밑으로 2층과 3층의 존재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분명히 4층이었다.

    유피테르는 빛 마법을 사용해 주변을 밝혔다. 밝은 빛을 내는 광원이 유피테르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빙글빙글 돌았다.

    광원은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고, 덕분에 유피테르도 마나 감지뿐만 아니라 눈으로 주변 상황을 볼 수 있었다. 4층은 허허벌판이었던 1층보다 복잡한 구조였다. 단단해 보이는 벽이 미로처럼 곳곳에 솟아있었다. 제대로 된 길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유피테르가 복잡한 미로의 시작지점으로 다가가자,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입구라고 생각될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 천천히 열렸다. 그것을 본 유피테르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이 도전자를 환영해주는 거야? 영광인걸. 이런 방식을 좋아하다니 취미도 나쁘셔라. 그래도 알면서도 당해주는 게 도리겠지.’

    그 미로에는 잊혀진 시대의 언어로 무언인가 적혀있었다. ‘그녀’가 가르쳐준 것들 중에서는 잊혀진 시대의 언어도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걸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D. A

    “하하하하하하하….”

    너무나도 상투적인 말에 유피테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은 잊혀진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였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마왕을 상대한 창조신의 신전 입구에 저 글귀가 있었으니까.

    유피테르는 미로 속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들어가자 거대했던 문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그는 1층에서처럼 몸을 마나로 보호하고 있을 뿐, 별다른 경계를 하지는 않았다.

    딱딱딱….

    길을 걷던 그의 앞에 관절 소리를 뽐내며 엄청난 수의 스켈레톤들이 나타났다. 전방에 스켈레톤 나이트와 워리어들이, 그 뒤로는 메이지와 아쳐들이 포진해있었다. 관절 소리가 귀에 거슬릴 만큼 커서,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전방에서 방어를 담당하고 후방에서 강력한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기본적인 진형이었다.

    “몬스터가 전술도 짜네. 말세야 말세.”

    물론, 던전의 몬스터는 지능이 높은 수호자의 명령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진형과 전술을 사용하는 게 보기 힘든 일은 아니었다. 진형을 짜고 전술대로 움직인다면 같은 수준의 몬스터라도 공략하기 어려웠다.

    평범한 일반인과 잘 훈련된 병사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웠다.

    “적당히 실력이나 측정해 볼까?”

    유피테르 식 빙결 마법 ― 무한의 얼음탄

    유피테르의 주변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나탄이 생겨났다. 이윽고 그 마나탄은 얼음의 속성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순수 얼음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의 아버지 카르멘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마법이었다.

    빙결 마나탄이 수가 멈출 줄을 모르고 늘어나자, 스켈레톤이 겁을 먹은 듯 잠깐 멈췄다.

    스켈레톤이 멈추든 말든 그는 무수한 빙결 마나탄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스켈레톤들에게 사정없이 쏟아부었다. 마나탄만 하더라도 폭발적인 화력을 지녔는데, 얼음의 속성이 가해지자 앞선에 있던 스켈레톤들 일부가 전부 얼음 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스켈레톤 나이트가 자신을 희생에서 뒷선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아준 것이었다. 그야말로 바람직한 탱커의 모습이었다.

    “몬스터 주제에, 동료를 위해 희생도 한다고? 참 잘했어요. 그럼 상을 줘야지?”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뇌빙의 마나탄

    이번에도 역시 마나탄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단지 유피테르의 주위가 아니라 스켈레톤들의 주위에 생겨났다는 점이 달랐다. 역시 그는 기존의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했다.

    번개 속성과 얼음 속성이 합쳐진 형태의 마나탄. 두 가지 속성을 한 번에 합치는 조화 마법을 그는 쉽게 펼쳐냈다.

    유피테르가 사용하는 마법식은 현재의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전 속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체계였다. 마치, 고대의 마법사들처럼 말이다.

    천재라고 소문이 난 카테리나도 단 한 속성의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퍼스트 서클로 ‘얼음’ 마법을 깨달았으며 상상력을 통한 얼음 마법의 활용이 뛰어났다. 이 전투법은 그의 아버지 카르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얼음 마법의 절대자라고 불리는 카르멘은 ‘얼음’의 속성에서 ‘저주’라는 새로운 방식을 끌어냈다. 카르멘과 싸우는 상대방은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싸울 기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세계 최강의 집단 조디악의 일원인 카르멘조차 전 속성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골골골….”

    “골!”

    “고올, 고올, 고오오오올.”

    물론, 스켈레톤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워리어들은 유피테르가 시동어를 말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다가왔고, 아쳐는 가지고 있는 화살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메이지 역시 워리어와 아쳐가 끌어준 시간을 이용해 다양한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아이라는 소문이 어색할 정도로 강력한 마나의 기운으로 마법을 사용해 하나하나 요격해 나갔다.

    심지어, 사리아가 사용했던 아폴론 식 개량 마나 지뢰를 시동어 없이 곳곳에 깔아놔 마나탄에 죽지 못한 워리어의 대부분이 폭발로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뼈다귀로 돌아가 버렸다.

    그중에는 개량형 지뢰의 막강한 화력으로 불타버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뼈들도 있었다. 아마 이곳에 강아지가 있었다면 식욕을 참지 못하고 달려갈 정도였을 것이다.

    새로 만든 뇌빙의 마나탄은 근처에 있던 메이지와 아쳐를 저격했고, 굼뜬 그들이 이를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유피테르는 단, 몇 분 만에 그 대군을 뼈다귀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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