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2)
* * *
유피테르는 눈으로 쫒을 수 없는 속도로 그림자로 만들어진 새를 따라갔다. 얼음성에 돌아왔을 때 입었던 로브가 바람에 흩날렸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새는 계속 날아가 세이룬 근처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취익― 인간이다. 혼자다. 오늘 밤은 취이익킨이다.”
“딸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 취익.”
몬스터의 숲이라는 악명을 제대로 보여주려 듯 고블린, 오크, 놀 등의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괴성과 함께 유피테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것들은 귀찮은 방해물들일 뿐이었다. 에키드나를 빨리 찾아 결계석을 뺏어야 했으니까.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천개의 얼음 화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가 자주 사용하던 마법이 또 한 번 그 모습을 보여주었고,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도륙했다.
“취익― 사, 살려.”
“인간 너무 강하다. 악마다. 모두 도망쳐라. 노올”
“취, 취익… 미, 미안하다 여보.”
“고… 고블… 좋은 삶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산산조각이 난 몬스터의 살덩어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와! 에키드나 어째서 이곳에 있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지독한 몬스터의 피 냄새를 뒤로하고, 유피테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편지를 던졌다. 편지는 살랑살랑하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얼음 화살이 편지를 그대로 꿰뚫었다.
“어머…. 레이디를 그렇게 찾는 것은 실례야? 내 사랑 유피테르. 레이디는 사랑을 담아서 불러줘야 응답해 주는 거란다. 그런 것도 모른다니 실망인걸? 물론,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을 싫어하지 않지만.”
유피테르의 분노에 대답하며 우거진 숲속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빛나는 뱀의 눈동자가 어둠을 갈랐다. 그 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건 단 한 사람, 바로 유피테르였다.
“네가 어떻게…. 당분간은 활동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얼마 전에 약속했던 것 같은데?”
“당신이, 그 빌어먹을 달의 가문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처음 알았네? 나는 말이지…. 당신의 촉촉한 입술이 내게 사랑을 속삭여줘야. 대답할 마음이 생각날 것 같은데?”
에키드나의 달콤한 목소리가 유피테르를 유혹했지만….
“애석하게도 빌어먹을 달의 가문인 아르테미스가 내가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이었거든. 난 두 번은 이야기하지 않아. 너도 알 텐데? 티폰처럼 되고 싶은 건가?”
유피테르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원할 뿐이었다. 이런 점은 그의 아버지 카르멘의 성격과도 비슷해 보였다.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오만함이었다.
그러나 에키드나 역시 평범한 사람 아니, 마족이 아니었다. 마나가 담긴 유피테르의 목소리에도 유혹하는 태도를 무너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피테르의 매도와 강압적인 태도가 그녀의 취향에 맞는 듯했다.
“던전은 내 아이와도 같아. 당신은 그걸 버릴 수 있어. 그런 사람이었다면 실망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말이야.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는걸.”
에키드나가 유피테르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혹적인 향기가 가득했다.
“거기서는 내게 동의를 해줘야지 잔인한 사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내 귀에 속삭인 사랑의 말을 아직 나는 기억하니까.”
“어울리지 않는 태도는 그만두지 그래? 그리고 예전이라니, 오해받을 소리는 그만두어줬으면 고맙겠는데. 난 한 사람만 사랑해. 그 안에 넌 들어가지 않고.”
“내 헌신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거야?! 나 상처받았어! 정말로 큰 상처야!”
에키드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녀는 그럼에도 발을 멈추지 않아, 이제 두 사람의 사이는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졌다. 에키드나는 오른손으로 유피테르의 은색 머리에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빙빙 꼬고 있는 에키드나의 손을 무심하게 쳐서 걷어냈다. 그 후, 유피테르는 그녀와 거리를 벌리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것은 문지기를 상대할 때와도, 사리아와 모의 대련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나운 느낌이었다.
단순히 마나를 방출한 것뿐이었지만, 대기가 겁을 먹은 것처럼 울부짖었다.
“에키드나. 우리 사이에는 이게 맞지 않을까? 인간과 마족 사이에 대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난 아직 의심스러운데?”
“바보 같기는. 당신은 그 어리석은 약속 때문에 나를 죽일 수는 없잖아? 게다가 당신은 큰 착각을 하고 있어.”
후후후.
에키드나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 행동에서 유피테르가 자신을 절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대체 그녀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
유피테르는 에키드나가 언급한 약속이라는 단어에 쳇 하고 혀를 차며 마나의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러자 그의 마나로 인해 떨렸던 주변 공기들도 차분하게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100%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에키드나의 고혹적인 표정에 안도의 감정이 덧씌워졌다.
“그래, 약속은 지켜야지. 중요한 거니까.”
“유피테르. 네가 날 헤치지 않을 줄 알았어. 당신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건, 평가가 너무 후한 거 같은데? 내가 했던 일들이 기억이 나지 않나 보지? 네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서, 다시 에키드나에게 다가갔다. 아까처럼 분노로 가득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유피테르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날 죽일 수 있겠지, 오늘은 살려준 대가로 정보를 하나 줄게.”
“정보? 넌 마왕 대리가 아니었나? 마왕령을 통치하고 있어야 할 텐데.”
티폰이 유피테르의 손에 죽은 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에키드나는 기꺼이 마왕 대리를 맡았다. 사고뭉치인 마족들을 다스리는 마왕의 일은 너무나도 바빠서 그녀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걸 본다면 네 곁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또 보자. 사랑하는 유피테르. 그리고 나는 더는 마왕 대리가 아니야. 그 점 기억해줘.”
그 말과 함께 에키드나는 공중에 손을 뻗더니 분홍색을 띠는 수정구슬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유피테르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며 수정구슬을 유피테르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유피테르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후,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그림자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저장한 영상 구슬이었다. 영상구슬은 가장 흔한 아티팩트였지만, 범용성이 높아 인기가 높았다. 사용하지 않은 구슬은 푸른색이었으니, 이 구슬은 어떠한 기억이나 영상을 저장한 것이 분명했다.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해 도망갈 정도라…. 에키드나 리벨리온. 감히 신에게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여. 넌 아직도 나를 무서워하는 건가.”
유피테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아티팩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에키드나의 성격이라면 장난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영상구슬을 잘 챙겨두고 볼 일이 사라진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한밤중의 평범한 숲처럼 조용한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
유피테르가 에키드나와 만나 정보를 얻었던 그 시각.
갑자기 발생한 던전을 해결하기 위해 얼음성에서는 알프레도가 비밀스럽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행여 파티를 방해하는 일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알프레도 역시 마리안느를 귀엽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가 생일파티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안느가 열심히 선언문을 읽는 것을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게다가 막내딸의 생일을 방해한다면, 새로운 부인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가주와 자식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상냥했지만, 자신들에게는 아니었다. 세레인이 폭주하는 날엔 요양을 떠나신 아리엘 드 리투아 님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가주의 명령을 받은 알프레도는 잠시 책임자의 임무를 믿음직한 세바스찬에게 넘겨주고, 마법사단의 단장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그는 던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냉철히 있던 가주의 모습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곧, 연락을 받은 3명의 단장이 알프레도가 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제복에는 마법사단 단장을 뜻하는 문양이 마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에게서 적당한 긴장감과 고양감이 느껴졌다.
세대교체 이후 마법사단 단장들이 모두 소집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괜히 유난을 떨었다.
“던전이 발생했다지? 드디어 몸 좀 풀어볼 시간이 왔군.”
“마리안느 아가씨의 생일파티에 던전 따위가 발생하다니, 그렇게 참여하고 싶었으면 먼저 허락을 받으러 왔어야지. 몬스터 놈들아.”
“어허, 신성한 날에 그게 무슨 소리쇼. 얼른 가서 끝을 냅시다. 마리안느 님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아야 한단 말이오.”
“아직, 발생한 것은 아니고 출현 조짐이 있는 것입니다. 예상 지점은 이곳입니다.”
알프레도는 그들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거대한 지도를 펴서 지점을 짚었다. 여러 정보망을 통해 얻은 결과를 종합해서 판단한 결과, 던전의 위치를 세이룬과 몬스터의 숲 정중앙으로 특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1 마법사단 단장은 왜 참여하지 않았죠? 분명 모두에게 통신 마법이 전달되었을 텐데요?”
알프레도는 소집 명령과 다르게 3명만 참석했기에 그 이유를 아는가 싶어 물었다. 아르테미스의 한 마법사단만 출동하더라도 던전 공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아 신중을 기울이기 위해 모든 마법사단 단장에게 소집 요청을 보냈었다.
던전 공략에 관한 의견을 여러 각도에서 듣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모르네. 통신 마법으로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온 거라.”
“나도. 그렇네.”
“아, 거기는 얼음성 경비를 맡고 있어서 참여할 수가 없다고 하던데.”
앞에 두 단장은 알프레도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못했지만, 마지막 단장이 알프레도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었다.
‘아직 멀었군요. 이 정도로 떨다니. 아르테미스가 집사장으로서 실격이군요. 세바스찬이 보면 비웃겠네요.’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얼음성의 경비를 최우선으로 설정하는 일을 절대로 머리에서 지우지 않았을 것이다. 나머지 인원을 활용해서 던전 문제에 대처했으면 되었다.
언제나 조급함은 최대의 적이었다. 알프레도는 모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긴장을 풀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단장들에게서는 적당한 긴장감과 평소와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던전 토벌은 어떻게 진행하면 좋겠습니까?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던전의 예상 크기는 어느 정도요? 우린 정보가 없으니.”
“던전의 예상 크기는 4층 구조입니다. 어떠한 타입인지는 던전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정도 후에 열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