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2화 (12/265)

기대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1)

* * *

던전.

누가 처음 그렇게 이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던전은 신이 잠든 요람이라고 불렸다. 그곳에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아티팩트들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에도 드워프와 마법사의 협업을 통해 일정 수준의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었으나 과거의 영광에는 크게 못 미쳤다. 현재의 기술은 텔레포트 게이트조차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으니까.

카테리나의 마력 강화 반지 ‘카드세우스’, 마리안느가 선물 받은 목걸이형 저주 이뮨 아티팩트 ‘로렐라이’, 포세이돈 가문의 가보라고 알려진 ‘네레이드’는 현재의 기술로는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서클 각성의 발견으로 과거 세계와는 다르게 개성적이고 독특한 마법들이 많이 나왔지만 유실된 마법들과 기술들은 결코 되찾을 수 없었다. 최소한 기록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연구라도 했겠지만, 대륙 전쟁의 피해는 처참했다.

두 번의 전쟁은 잊혀진 시대의 지혜가 담긴 고대의 유산을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던전의 출현을 강제로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감옥 같은 보물 창고는 현재의 인류에게 도망칠 수 없는 시련이었다. 심지어 던전이 어떠한 원리로 출현하는지조차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것은 던전 수호자를 굴복시키면 천천히 사라진다는 것 정도였다.

유명한 마법사들은 이론을 연구하기보다 던전을 공략하는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법사들의 꿈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사바트’에서의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서. 물론, 이론을 사랑하는 제이스란이 들었다면 비교도 하지 말라고 화를 낼 게 분명했지만.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공략하지 못한 던전들도 몇몇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던전이 한 번 들어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흉흉한 소문을 지닌 미궁 ‘타르타로스’였다. 타르타로스는 아티팩트를 꿈꾸는 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상상해보는 그런 곳이었다.

마족과는 다르게 몬스터는 ‘마나’에 민감해 던전이 내뿜는 거대한 마나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가 도시를 습격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가진 마나에 반응하여, 그 마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배고픔을 넘어 부족한 마나를 채워 강해지고 싶다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었기에.

이게 바로 몬스터가 인간의 친구가 아닌 적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렇게 모여든 몬스터를 죽이면 죽일수록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늘어나 점점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몬스터를 죽이고 나온 가죽, 뼈, 고기 등의 재료들은 이용가치가 뛰어난 것들이었으니까.

예를 들어, 운동량이 많은 와이번의 고기는 맛있는 음식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마법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히드라의 가죽은 고가의 방어구로 만들어져 팔렸다.

인생이란 이름의 퍼즐은 늘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로 안내해주는 것일까?

이런 이유로 리투아 제국 북부 최고의 도시 세이룬 주변에 생긴 던전의 조짐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던전이 내뿜는 마나에 이끌려서 몬스터들이 세이룬으로 들이닥칠 테니까.

제시간에 던전을 공략하지 못해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게 되면 세이룬은 처참한 광경으로 변할 것이었다. 일반 주민들의 제로 서클 마법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몬스터들은 결계가 쳐져 있는 얼음성으로 돌격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 노력한 대가로 먹는 보상이 아니었으니까.

“던전이 발생했다고?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지?”

“예, 출현 예상 지역은 세이룬 근방의 숲입니다. 현재 세이룬은 내일 있을 축제에 대비해 평소보다는 경계태세가 올라간 상태입니다.”

알프레도의 보고는 비밀 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카르멘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알프레도의 보고를 들었다. 알프레도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그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공작가를 이끌어가는 가주의 위엄일까. 아니면 단순히 수많은 투쟁에서 승리한 마도사의 모습일까.

이 이상 사태는 언제든지 비상사태로 바뀔 수 있음에도.

세이룬의 동쪽에는 몬스터로 가득한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곳은 다양한 몬스터가 살고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이 주기적으로 토벌을 나가서 수를 줄어야만 할 정도였다.

귀족의 생일파티가 끝나면 그 이후 일주일 동안은 평민들의 축제가 열렸다. 귀족은 자식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평민들의 축제에 여러 상품과 자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기에.

내일부터 시작될 세이룬의 축제 역시 사랑받는 마리안느의 생일이어서, 꽤 많은 지원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세이룬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구경하러 온 사람들 역시 기대로 가득 찬 밤이었다.

“마법사단 준비시키고 던전 출현에 대비해. 그리고 통신 마법으로 주기적으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알프레도는 카르멘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 그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카르멘은 다시 시선을 밤하늘로 옮겨 홀로 빛을 내는 달을 조용하게 쳐다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 거짓으로 가득한 세계를 바꾸는 혁명이.’

한편. 새로 생긴 마리안느의 기념할만한 생일에 참석하지 않은 유피테르는 가주의 집무실에 와있었다. 그가 가문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인 초대 가주의 결계석이 바로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돌아온 첫날, 결계석의 위치를 찾으려고 일부러 가주를 도발해 대판 싸웠다. 얼음성에서 가장 강한 가주와 그의 마법이 충돌한다면 반드시 결계석이 발동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가주의 집무실, 카르멘이 자랑하는 서고에 결계석의 반응이 있었다. 이 결계석을 제거한다면 얼음성을 지키는 결계가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그녀보다 소중한 건 없어. 미안해 마리안느.’

그녀를 잃은 유피테르가 아무리 망가졌다고 해도 그에게도 양심과 이성이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속으로 여동생에게 미안함을 정하고서 결계석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곳으로 향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천개의 얼음 화살

카르멘이 보여주었던 얼음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화살이 서고 주위에 떠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마법은 상식과는 다르게 마법사의 곁에 아닌 목표물에 주변에서 바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쉼 없이 날아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에서 나온 폭력이었지만, 결계석은 모습을 나타낼 생각을 하지를 않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생각보다 터프한걸.”

유피테르 식 바람 마법 ― 폭풍전야

유피테르의 마나는 기분 좋은 바람으로 변했다. 그 살랑거리는 바람은 이내 집무실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의 폭풍으로 바뀌었다. 폭풍은 굉음을 내며 서고와 충돌했다.

쾅.

유피테르가 사용한 마법의 강함을 증명하듯 이미 얼어붙은 집무실은 폭풍전야로 인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얼어버린 서고에서 자그마한 빛줄기를 내뿜는 구슬이 나타났다.

파직

…그리고 그건 이내 깨져버렸다.

“이게 무슨…. 잊혀진 시대의 아티팩트가 고작 이 정도로 부서진다고? 이건 이야기로 들었던 것과는 다른데. 아티팩트 씨 이러면 곤란해요.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순 없는데 말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유피테르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가 다른 세계의 주민이라고 불릴 만큼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강한 마법을 쓰지는 않았다.

고작 퍼스트 서클 급의 마법에 잊혀진 시대의 아티팩트가 부서진다는 건 마리안느가 카테리나를 마법으로 이겼다는 말과 같았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마… 하지만 넌 그곳에서 나올 수 없을 텐데.”

부서져 버린 수정 구슬을 살펴보기 위해 다가간 유피테르는 익숙한 마법의 잔재를 느꼈다. 마법을 쓰면 그 자리에는 마나가 남았다. 어중간한 마법사들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어둠을 연상시키는 끈적끈적한 마나…. 그건 그녀와 함께했던 유피테르의 기억에 분명히 있던 것이었다.

“에키드나.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재미있네.”

이 마법은 에키드나의 것이 틀림없었다. 과거 그가 마족들을 무참히 도륙했을 때 느꼈던 이 향을 잊어버릴 순 없었다.

마족. 몬스터와는 비교될 수 없는 신의 악몽.

인간이 제로 서클에서 시작한다면 마족은 퍼스트 서클로 태어났다. 그 순간부터 인간과 마족의 격차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대륙 전쟁 이후로 마왕과 일곱 대공은 인간과 이종족 연합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인간을 재미있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마족들은 조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이 마족을 구속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에키드나는 일곱 대공 중에 하나로 마왕 티폰의 아내였다. 그녀는 분명 마족의 영토에 있어야 했다. 유피테르가 에키드나를 비롯한 일곱 대공과 한 약속은 고작 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족이라는 존재를 세계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어라 이것 봐라? 결계석을 노리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 이거야?”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피테르의 그림자에서 새가 튀어나와 유피테르의 머리 위에 앉아 울었다. 검은색으로 가득한 새에게서 흰색의 종이가 천천히 떨어졌다. 팔랑거리는 종이는 편지였다.

사랑하는 유피테르.

편지 봉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그래, 에키드나는 이런 사람. 아니 마족이었다. 이 편지를 썼을 에키드나의 모습이 떠올라 유피테르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봉투를 찢어버리고 나온 편지를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에키드나. 뭘 꾸미는지 알아야겠어. 내가 무섭지 않은가 봐? 약속을 어기고.”

유피테르 식 추적 마법 ― 헤르메스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편지에 더욱 강하게 남아있는 마나를 추적했다. 이 역시 다른 마법사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추적 마법은 놀랍게도 에키드나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마나 감지로부터는 신조차 벗어날 수 없었기에 분명했다.

“재미있는 방법을 써주네.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구.”

유피테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듯이 새는 한 번 울더니 머리에서 내려와 부서져 버린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마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듯한 날갯짓은 거침없었다.

유피테르는 지체하지 않고 마법으로 새를 따라 날아가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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