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5화 (5/265)
  • 달의 대공자의 귀환(5)

    * * *

    유피테르가 말한 대로, 얼음성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수많은 방을 분류해서 관리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방들이 있는 곳은 아르테미스 가문 직·방계 가족들이 사용하는 층이었다. 그다음으로 중요시하게 여겨지는 곳이 지금 그들이 있는 손님용 층이었다. 손님용 층은 손님의 신분과 취향에 맞게 다시 두 곳으로 나누어졌다.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두 곳 중 상위 귀족이 머무르는 층이었다. 방의 크기도 넓고 다양한 취향에 확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가족의 층보다 좋지는 않았지만.

    손님은 왕이 아니라 그저 손님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유피테르가 아무리 천대받았다고 해도 아직 후계자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이상 가족 층에서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자의 직위는 가문 회의가 아니라면 뺏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가문의 차기 후계자를 쉽게 바꾼다면 그건 그 가문이 그만큼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리투아 제국 어디를 돌아보아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후계자가 가문을 잇지 못할 정도의 중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그 자리를 쉽게 뺏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손님용 방을 내어주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것이었고, 유피테르가 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그 방에는 카테리나 님이 직접 결계 마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를 담당하는 메이드들조차 접근할 수 없어서 제대로 된 관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음 결계의 힘이 너무 강해 제로 서클들은 가까이만 가도 정신을 잃어 그 층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 문제로 꽤나 골머리를 앓은 듯, 세바스찬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카테리나의 오빠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유피테르가 있을 자리를 빼앗은 미안함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가문에 계속 있었다면 언제라도 카테리나에게 그 지위를 뺏기더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녀는 어중간한 행동으로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카르멘의 생각을 예상한 카테리나는 한발 먼저 움직여서 유피테르의 방을 봉인했다.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오빠가 있을 자리는 이곳이니 돌아와 달라는 마음을 담아.

    물론, 그 결계 마법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일반인들은 접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건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 가주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 말을 들은 유피테르는 흥미로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하던 카테리나는 아버지가 만들 길을 그대로 달려나가는 인형과도 같았으니까.

    “음…. 리나가 옛날과 다르게 꽤 사고뭉치인가 보네. 의외네. 아버지의 말은 곧이곧대로 듣는 편이었는데. 그 정도 능력이라면 아카데미에서도 수위급 실력자겠고,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잇기 적당하네.”

    세바스찬은 객실로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아르테미스의 이름에 걸맞은 분이 되셨습니다. 더 성장하시면 조디악의 일원이 되실 수도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제 손으로 키워낸 분이 아니라서 아쉽습니다.”

    세바스찬이 조디악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것을 보고 그가 얼마나 뿌듯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한편에는 유피테르가 그 자리에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 역시 느껴졌다.

    세바스찬의 훈련을 잠깐 떠올린 유피테르는 몸을 떨뻔했다. 그래도 그걸 간신히 참아내고서는 세계 최강의 마도사 집단 ‘조디악’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처럼…. 조디악의 일원인가. 확실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마도사의 경지에는 들어갔어?”

    “아직 세컨드 서클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이 세계의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제로 서클이라고 불린다. 제로 서클은 마나를 느끼고 생활 마법 등의 기초적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 물론, 유피테르는 이것마저도 불가능했지만.

    그 이후, 자신만의 마법을 깨달으면 퍼스트 서클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퍼스트 서클에 도달해야 ‘마법사’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었다. 리투아 제국 4대 공작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혈족 마법을 지닌 자들은 퍼스트 서클을 달성한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경지를 넘어설 때, 세컨드 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이후 ‘마도사’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뒤의 경지도 있다고는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초대 가주 이외에는 인간의 몸으로 세컨드 서클을 넘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 앞에 유피테르가 쉬게 될 손님용 방이 나타났다. 방은 공작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처럼 호화로운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하얀색의 문은 얼음성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푸른색과 잘 조화되었다.

    깔끔하고 정제된 품격이 느껴지는 문만 보더라도 누구나 쉽게 객실의 수준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쉬고 있으면 되는 거야?”

    “예, 이곳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혹시 이곳이 맘에 들지 않으십니까? 불편하시다면 바로 다른 방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만.”

    세바스찬은 유피테르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명랑한 유피테르 공자는 과거 기억과 너무 달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공자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피테르의 마나는 세컨드 서클을 바라보고 있는 세바스찬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조디악의 일원인 가주에게 당당하게 할 말을 하다니.

    띠릭.

    세바스찬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방의 외부 장식을 구경하는 유피테르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문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러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마나 관리식 아티팩트? 손님용 객실은 이런 식으로 관리되는 건가. 흥미로운데. 아, 애초에 내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해서 내 방에는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던 건가. 이건 꽤 슬픈 이야기인데 안 그래?”

    “슬프지만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공자님께서 계시던 곳이 얼음성에서 예외적인 곳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나는 이 세계에서는 숨 쉬는 것만큼 사람에게 가까이 있는 신의 은총이니까요.”

    그 대답에 유피테르는 쓰게 웃었다. 성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느껴지는 건 과거의 아픈 향수뿐이었으니까.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나쁜 기억만 생기는 얼음성은 기억의 복마전이었다.

    유피테르가 놀란 것처럼 얼음성의 대부분은 보안을 위해 마나 인식형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집무실과 같이 특별한 곳만 조금 더 세세하게 처리를 했을 뿐. 누구나 마나를 가지고 있었기에 생활 밀착형 아티팩트들은 성의 곳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었다.

    이는 다른 공작 가문이나 황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 관리식으로 했을 때의 얻는 보안성과 편리함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었기에.

    열린 문을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집무실과 다르게 손님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한 게 유피테르의 눈에 띄었다.

    우선, 품격있는 침대가 유피테르를 반겼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세 사람도 넉넉해 보이는 크기의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 것 같은 부드러운 매트릭스가 그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고급 그리핀의 깃털로 만들어진 이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침대뿐일까. 천장에는 빛을 내는 샹들리에 식 아티팩트가 있었고, 마나를 통해 방안을 원하는 온도로 조절할 수도 있었다. 또, 벽에는 값비싼 명화들이 걸려있었다. 방 안의 가구들 역시 빛깔부터 달랐다.

    손님용 방의 마지막 포인트는 창문. 거대한 창이 햇빛을 그대로 끌어안는 게 일품이었다. 이 때문인지 푸른 얼음성의 객실에서도 따뜻함이 녹아드는 기분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유피테르가 방안을 적당히 둘러보는 것을 세바스찬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야말로 참된 집사의 모습이었다. 모시는 분을 위해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않을 때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의 경외심을 낳을 정도였다.

    사실,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세바스찬은 메이드들의 같이 일하고 싶은 0순위의 인물이었다. 스파르타식 지도가 힘들긴 해도 한 번 배우는 거로도 엄청난 공부가 되었으니까.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이 가문에 그렇게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방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의복을 새로 맞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돌아오시는 타이밍이 조금 미묘하셨습니다. 유피 공자님.”

    세바스찬은 유피테르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슬쩍 화제를 바꿨다. 그가 얼마나 가문을 원수처럼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았지만, 세바스찬은 전대 가주인 리스트에게 엄청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무슨 일 있어? 이 시기에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는데. 카테리나의 마나는 안 느껴지니 이곳에는 없는 게 확실하고. 제이스란의 생일은… 네 표정을 보니 아닌 거 같고. 황실이나 다른 공작 가문이랑 연결되어있는 행사가 있나?”

    “막내 공녀님 생일이 다음 주에 있습니다.”

    “막내 공녀? 막내 공자가 아니라? 나한테 동생이 더 있었어? 내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게 아니면 나를 포함해 카테리나랑 제이스란밖에 없던 거 아니었어? 아르테미스 3 후계 이야기는 꽤 먼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인데. 계속 이야기해봐.”

    유피테르는 막내 공녀라는 말에 진짜로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는, 세바스찬에게 빨리 더 설명해달라고 재촉했다.

    무(無)의 유피테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카테리나와 마법 공학의 제이스란. 이것이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 세 명의 후계자가 받은 칭호였다.

    카테리나가 선천적으로 뛰어난 마나를 가지고 있어 마법에 능했다면 제이스란은 세계의 이치와 마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고, 그의 능력은 그것을 밝혀내는 데 최적화되어있었다.

    제이스란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가주인 카르멘 아르테미스 역시 제이스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을 바꾸는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뀐 판단은 언제나 가문의 큰 이익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문을 떠나신 시간 동안 가문의 4번째 후계자인 마리안느 아르테미스 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카테리나, 제이스란 님처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시지는 않았지만 가문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계십니다.”

    유피테르는 마리안느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알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한 나이 차 크게 나는 막내 여동생의 존재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충분했다. 재능이 별로 없다는 세바스찬의 말은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 노력 제일주의 집사의 기준도 생각 이상으로 높았으니까.

    ‘이래서는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는걸. 그래도 예상을 할 수 없는 편이 훨씬 재미있지.’

    문지기의 반응, 아버지의 반응까지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자신의 방에 리나가 해놓은 결계는 예외였지만 이는 그의 계획에 있어 큰 차질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문의 돌아온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약속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알려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좋은 정보 고마워. 세바스. 그럼 나는 조금 쉴게. 혹시 다른 정보나 무언가가 있다면 나에게 알려줄 수 있어?”

    “예, 당연합니다. 유피 공자님께서 어디에 계시던 저는 당신의 전속 집사입니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방 구경은 적당히 끝냈고, 풀 짐도 없어 바로 쉬려고 한 유피테르에게 세바스찬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응, 무슨 말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