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에필로그
전 세계에 몇 명의 생존자가 살아남았을까? 그 해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훈 일행은 살아남기 위해 심천우의 기지를 재정비하였다. 블라인드 러비들은 온 대륙으로 퍼져 남은 생존자들을 찾아내어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아있던 천우의 부하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천우의 큰 무기 중 하나였던 잠수함 블랙 쉐도우도, 구축함들도 다 블라인드 러비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재훈 일행은 그런 블라인드 러비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곧 기지와 장비들을 정비한 일행들은 가끔씩 다른 대륙으로 가서 일반 러비들에게 변형 프리온을 심은 고기를 미끼로 주곤 했다. 그러면 그 고기를 먹은 러비들이 곧 쿠루병에 걸려 죽어 나갔다. 재훈 일행은 작전을 나가 생존자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1년, 2년, 3년, 4년… 그리고 5년이 지나자 비로소 전 세계에 있던 모든 러비들이 죽었다. 블라인드 러비들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동물 러비들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고 재훈이 확인한 마지막 생존자의 수는 약 3000명 정도였다.
배 한 척이 어떤 섬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재훈은 사람들과 함께 갑판에 서서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가며 뭔가를 찾는 듯 뚫어지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훈은 머릿속으로 갸오르지크가 한 마지막 말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노르아우스트라네 섬으로 가라, 거기에 가면 해답이 있을 것이다.’
젤리가 갑판으로 나와 재훈에게 뜨거운 커피를 건네주며 말했다.
“뭐 발견했어요?”
“아직 이요.”
“뭘까요? 그때 큰 고래가 찾으라고 했던 게.”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곧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때였다, 배 앞 수면 위로 새끼 고래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고래다!”
주연이 신기한 듯 고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훈은 물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새끼 고래 한 마리가 호기심이 생긴 듯 재훈에게 다가왔다. 재훈이 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래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머리를 들이대었다. 재훈이 젤리에게 말했다.
“젤리 씨, 제가 꼭 챙기라던 상자 좀 가져다줘요.”
“알았어요.”
젤리는 곧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재훈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수중 언어 번역기가 들어 있었다. 재훈은 케이블을 내려 고래가 있는 바닷속으로 조심스럽게 번역기의 한쪽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재훈이 배 위의 번역기에 대고 고래에게 말을 전했다.
“안녕? 나는 강재훈이라고 해.”
그러자 고래가 잠시 놀란 듯 멈칫하다가 수중에 있는 번역기에 대고 뭐라고 말을 했다. 곧 그 말은 번역되어 재훈 일행에게 들려졌다.
“뭐야, 우리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거기 참치만 한 크기의 너! 이름이 강재훈인 거냐?”
“그래.”
“내 이름은 슈르키르고르부르크. ‘바닷속에 하얀 별’이라는 뜻이다.”
“반가워.”
고래는 잠시 물속에 있는 재훈의 손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다가 말했다.
“우리는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어쩐지 너에게서 갸오르지크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래? 넌 갸오르지크를 알아?”
“물론이지. 갸오르지크는 우리 고래들 중 가장 크고 현명한 고래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다른 어른 고래들에게서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래서 갸오르지크의 냄새가 내 머릿속에도 기억되고 있다.”
“그랬구나.”
핑크레드가 뭔가 미심쩍은 듯 재훈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슈르키르… 뭐, 암튼 이 새끼 고래가 그 큰 고래가 말한 그 해답인 거야?”
그러자 새끼 고래가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로 핑크레드에게 말했다.
“거기 머리에 이상한 색깔의 미역을 달고 있는 너! 내 이름은 슈르키르고르부르크라고!”
“알았어! 거 쪼끄마한 게 성깔이 있네!”
사람들은 핑크레드와 고래의 대화를 들으며 한바탕 웃었다.
곧 고래가 재훈에게 말했다.
“갸오르지크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마라. 그는 언제나 가족과 동물들과 지구의 앞날을 걱정해왔다.”
“나도 알아. 그래서 갸오르지크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그의 마지막 말?”
“그래. 그가 내게 이 노르아우스트라네 섬으로 가면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때, 갑판으로 재훈의 아들과 심천우의 기지에서 발견된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아이들은 고래를 보며 신기한 듯 다가왔다.
“아빠! 큰 고래예요! 신기하다!”
“그래 은결아, 고래가 참 크지?”
아이들은 재훈의 옆으로 다가와 가까이에서 고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고래는 그들이 귀엽다는 듯 연신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재훈이 고래에게 물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어떤 세상이 될까?”
“너는 이 아이들이 커서 너희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지구를 파괴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냐?”
재훈은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고래는 잠시 심천우의 기지에 있던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이들에게서 갸오르지크의 냄새가 나. 분명히 그가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메시지를 새겨 넣은 것 같다.”
“메시지?”
“그래. 우리는 음파와 목소리로 서로의 얘기와 기억을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이야기들은 때론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곤 하는데, 이 아이들에게서 갸오르지크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마음이야?”
“지구를 괴롭히지 말고 함께 잘 공존하라는 마음. 그게 느껴진다.”
은결이는 조심스럽게 고래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빠! 제가 고래를 만졌어요!”
“그래. 신기하지?”
고래는 한참 동안 은결이를 바라보다가 재훈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강재훈. 너의 아들과 저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그 모두가 지구와 생물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크게 될 거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갸오르지크의 따뜻한 바람들이 느껴진다. 그 느낌이 너와 저 아이들에게도 심어져 있다.”
재훈은 다시 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이 지구를 지키면서 살 자신이 없어. 너희가 좀 도와주지 않을래?”
“그래, 강재훈. 나와 가족들이 너희를 도와줄게. 우리는 갸오르지크로 연결된 큰 가족이니까.”
“고마워, 슈르키르고르부르크.”
재훈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그 눈물은 미래의 걱정에 대한 해답을 찾은 기쁨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
3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남은 생존자들은 전 세계 통합 정부를 이루었고, 많은 이들의 추천으로 강재훈은 세계 통합 정부의 초대 대표가 되었다. 재훈은 사람들과 고래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지구를 재건하는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재훈이 한 건물로 들어가 거대한 컴퓨터가 있는 서버실로 들어갔다. 원웅이 정욱, 성규와 함께 서버를 점검하고 있었다.
“준비는 잘 되어 겁니까?”
원웅이 재훈을 보고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말했다.
“말도 마세요, 어찌나 복잡한 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재훈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 여기서 그냥 관두면 안 되죠.”
재훈이 뭔가 감회에 젖은 듯 서버를 손으로 만지자 정욱이 다가와 말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이 시스템을 보니 심천우가 생각나서요. 이 서버들의 핵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들은 다 심천우가 개발한 것들이잖아요.”
“아이러니하죠? 한 때 지구를 멸망시키려 했던 심천우의 시스템으로 우리가 이렇게 지구를 재건하려 하다니.”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심천우가 원하던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방법이 잘못되긴 했었지만 결국 그가 원한 것도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게요, 그의 바람을 결국 우리가 이루어가고 있는 셈이네요.”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곧 다음 작업들을 할 수 있겠죠?”
“예. 그렇게 되면 전기 사용이 수월해지고 각종 시스템들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가 될 겁니다.”
“잘 됐네요.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예, 걱정 마십시오.”
재훈이 서버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는데 기룡이 양파가 든 박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다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강재훈 대표님 아냐?”
“기룡 선배! 잘 지내고 계시죠? 이 연구소 셰프가 됐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그럼, 잘 지내지. 마침 잘 왔어. 있다가 식당 와서 밥 먹고 가. 오늘은 특별히 해물 수제비를 할 거니까.”
“맛있겠네요. 그런데 오늘은 좀 바빠서요. 시간 나면 다음엔 꼭 먹고 갈게요.”
“하긴 많이 바쁠 때지. 그래 그럼 다음엔 꼭 들려!”
“예!”
재훈은 한 집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현관문이 열리더니 꼬마 여자아이가 가방을 메고 헐레벌떡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 뒤를 핑크레드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임루아! 니가 늦잠 자니까 오늘도 또 늦잖아! 좀 일찍 일찍 좀 일어나!”
“알았어요! 엄만 맨날 잔소리야!”
핑크레드는 제법 큰 도시락 통을 아이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엄마가 싼 도시락이니까 선생님께 꼭 갔다 드려. 알았지!”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아이가 후다닥 뛰어가자 핑크레드는 그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재훈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언제 왔어? 요즘 많이 바쁘지?”
재훈이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바쁘죠. 그나저나 루아는 많이 컸네요?”
“많이 컸지. 그런데 혹시 오다가 우리 바깥양반 만났어?”
“봤죠. 중앙 서버실에서 땀을 한 바가지 흘려가며 일하고 있던데요.”
“이 양반은 대체 집하고 거기하고 얼마나 멀다고 이틀째 집에 안 들어오고 지랄이야!”
“아이, 너무 화내지 마세요. 임 박사님 덕분에 제가 얼마나 힘을 얻고 있는데요.”
핑크레드는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임 박사가 세계 대표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그럼요. 임 박사님이 없으면 지구 재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
“추켜 세워주기는… 하하. 들어가자 안티오키아 유기농 커피 한잔 타 줄 테니까.”
“미안해요, 다음에요. 지금은 좀 바빠서요.”
재훈은 웃으며 다른 장소로 갔다.
한편 핑크레드의 딸 루아는 학교로 가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교실 앞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도시락을 열어 수족관에 부었다. 그 안에는 오징어, 정어리, 새우 등이 섞여 있었다.
“슈르키르고르부르크 선생님! 엄마가 선생님 드리라고 싸 주신 거예요!”
그러자 곧 큰 고래가 다가와 그것들을 받아먹으며 뭐라고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수조관 앞에 장치된 번역기를 통해 루아에게 들려왔다.
“고맙다, 루아야. 엄마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렴.”
“예! 선생님!”
고래가 수족관 벽 쪽으로 이동하자 루아와 아이들은 수족관 앞에 빙 둘러앉았다. 고래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 지난 시간에는 어디까지 배웠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지구가 병든다!’까지 배웠어요.”
“그래, 그럼 오늘은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내면 안 돼요!’를 배울 차례네.”
아이들은 집중해서 고래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른 곳의 학교. 지은이 이제 청소년이 된 심천우의 기지에서 발견되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지은의 교수실로 재훈이 찾아왔다. 마침 강은탁 박사도 지은과 함께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서 와.”
“마침 두 분이 같이 계셨네요?”
“그래 요즘 같이 하고 있는 연구가 있어서.”
“두 분 혹시 저 몰래 연애하고 있으신 거 아니에요?”
그러자 강 박사가 얼굴이 빨개진 채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이 나이에 무슨 연애는 어린애들도 아니고.”
재훈이 그 모습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놀라시는 거 좀 봐. 하하. 전 상관없어요. 두 분만 서로 마음이 맞으시면 연애도 하고 그러세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콜록! 콜록!”
한바탕 웃은 재훈이 지은에게 말했다.
“지금 가르치시는 아이들은 어때요?”
“심천우의 기지에서 발견될 당시에는 몰랐지만,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이렇게 착하고 올바른 아이들이 있나 싶어.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치면 지구 복원 계획에 큰일들을 해낼 거야.”
“결국 심천우도 갸오르지크도 실험에 성공한 셈인 거군요?”
“그렇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멸망시키려던 그들의 손에서 지구를 구하고 보존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셈이지. 참, 중앙 시스템은 어느 정도 완성됐니?”
“한 70% 정도 완성됐어요. 늦어도 다음 달 안에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태양열발전소와 연결도 되어서 전력 공급도 더 수월해질 거예요.”
“그래, 다행이구나.”
“이게 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료들 덕분이죠.”
“그래도 니가 가장 잘하고 있는 거야.”
“제가 뭘요.”
“아니야, 니가 인류를 구한 셈이야.”
“어머니도 참…”
울창한 숲 뒤로 평온해 보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재훈과 젤리가 손을 잡고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 옆으로 상우와 주연이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재훈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잘들 지내지?”
재훈과 젤리는 곧 들판 가운데에 세워진 큰 기념비 앞에 섰다. 그 기념비에는 지구를 구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재훈은 그 기념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동료였던 김태현 형사, 서 수연 순경, 그 외 SCCIT 동료들, 오경수, 디에고, 차민영, 김대균 그리고 함께 싸운 수많은 대원들… 그리고 스쳐가며 만났던 사람들, 특히 적이었지만 카사노바와 심천우와 도예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갸오르지크까지… 한참 동안 재훈이 기념비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젤리가 말을 건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요?”
“그냥요.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일들을 생각해 봤어요.”
젤리도 기념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재훈 씨,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네?”
“우리와 그 후손들이 과연 인류와 지구를 잘 지키면서 살게 될까요?”
재훈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아마도 잘 하겠죠.”
“아마도라니요?”
재훈은 대답 없이 젤리의 손을 잡고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 퍼시가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재훈이 한껏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젤리에게 말했다.
“아,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 좋지 않아요?”
“좋아요. 그런데 아까 아마도라고 한 이유가 뭐예요?”
“그건, 인류가 멸망할 뻔한 일을 겪은 사람의 막연한 걱정이랄까요.”
“아, 그런 거였어요? 뭐, 생각해 보니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해요. 막연한 걱정 말이에요.”
재훈은 갑자기 젤리에게 키스를 했다. 젤리는 깜짝 놀라 재훈을 밀치려 했지만 곧 키스를 받아들였다. 잠시 후,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젤리가 재훈에게 말했다.
“뭐예요? 갑자기 기습 키스를 하고.”
그러자 재훈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냥 키스는 좋네요.”
“네?”
“만약 우리에게 지금 펩스가 있고, 디지털 키스 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머릿속으로 서로의 신상 정보가 왔다 갔다 했겠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왜 그런 것을 즐기고 살았었는지 모르겠어요. 과연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내서 시작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을까요?”
“글쎄, 사실 저는 디지털 키스 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재훈 씨는요?”
“저도 그랬어요. 키스를 통해 전달받는 체온과 느낌,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 그런 게 키스의 묘미인데, 디지털 키스는 그냥 상대에게 조건만 맞춰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 이제 우리는 아무도 펩스도 없고, 디지털 키스 앱도 없으니 다시 풋풋한 사랑이 싹트는 세상이 된 거죠.”
“그러네요. 그런 의미에서 또 키스나 할까요?”
젤리는 부끄럽다는 듯 재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이, 몰라요. 재훈 씨도 참…”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