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지털 키스-105화 (105/119)

# 105

105화 마지막 카드

남아프리카 움타타. 재훈 일행은 육지에 도착해서 근처에 버려진 전기트럭을 정비해 오경수가 말한 버려진 연구소로 향하고 있었다. 트럭 짐칸에 탄 일행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핑크레드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리 아프리카라지만 이거 너무 더운 거 아냐?”

오경수가 답했다.

“수년 전부터 이상 대기 현상으로 기온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죠. 심할 땐 낮에 40도 이상 오른 적도 있으니까요.”

재훈이 오경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가고 있는 연구소는 왜 폐쇄된 겁니까? 굉장히 핵심 시설이었던 거 같던데.”

“예전에 생존자들이 더 있었을 때 세계를 구하려는 연합 부대가 연구소로 쳐들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연구소는 거의 박살이 났었죠. 이미 많은 시설에 타격을 입어서 복구를 한다고 해도 또 공격을 받으면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위기를 느낀 심천우는 급히 연구소를 폐쇄하고 연구원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소 공격 사건이 전 세계를 더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건 왜죠?”

“심천우는 그 사건을 계기로 세계 곳곳에 있던 연합군을 처리하는데 집중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들을 미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주요 군사 기지들을 그렇게 공격했었던 거군요.”

트럭이 한참을 달려 움타타 시내로 접어들었다. 시내는 작은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핑크레드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곳에 연구소가 있다고요? 내가 보기엔 그냥 시골 깡촌 같은데?”

트럭이 어느 한 3층짜리 건물에 다다르자 오경수는 차를 멈추게 했다. 얼핏 봐서는 평범한 건물 같아 보였다. 오경수가 트럭에서 내리며 말했다.

“이곳이 연구소입니다.”

재훈은 주변의 시설들을 살폈다.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폭격을 맞은 듯한 흔적이 있었고, 곳곳에 태양광 패널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건물 크기의 태양열 발전 설비의 흔적도 보였다. 재훈이 핑크레드에게 그 흔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요, 태양열 발전과 태양광 발전을 같이 썼던 흔적이 있어요. 저 정도 규모라면 이 건물이 보통 건물은 아니라는 증거죠.”

“그래? 그래도 내 눈엔 아직 이 건물은 아무리 봐도 연구소 같이 보이진 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오경수가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열어주며 말했다.

“건물이 많이 파손돼서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재훈 일행은 오경수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지상의 평범한 외형의 건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연구 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급하게 연구원들이 대피한 듯 여러 장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훈이 오경수를 따라가며 물었다.

“연합군이 공격한 이후 이곳을 점령했었나요?”

“예. 한동안은 점령했었습니다. 그 후 러비들에 의해 다 죽었지만요.”

오경수가 큰 문 앞에 다다르자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훈이 물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습니까?”

“정말 희한하군요. 전에 왔을 때는 문을 닫아 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냥 열렸을 수도 있죠.”

오경수는 문 옆에 있는 패널을 열어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문은 분명 수동으로 열려 있는 상태였다. 오경수가 문에 손을 갖다 대며 재훈에게 말했다.

“이 문을 더 활짝 여는 걸 좀 도와주십시오.”

“예.”

재훈과 일행들은 문에 달라붙어 양쪽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끼익!

묵직한 문이 열리며 소독약 같은 냄새들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핑크레드가 그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연구소는 연구소였나 보네. 병원 냄새가 나잖아?”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개의 침대와 각종 바이탈 체크 장비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기룡이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왠지 저 침대에서 헌터 러비들이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음산한데?”

오경수가 말했다.

“한 때는 이곳이 심천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연구소였습니다. 몇몇 장비만 손보면 우리가 활용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간 오경수는 주변을 살피다가 끊어진 굵은 전선 뭉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해요.”

재훈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들어왔었던 것 같아요. 메인 컴퓨터 라인이 끊어져 있어요. 원래는 벽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센서들도 몇 개 보이지 않아요.”

오경수는 황급히 옆방으로 이동했다. 옆방으로 간 오경수는 마치 먹잇감을 찾는 굶주린 동물처럼 뭔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한참 뭔가를 찾던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없어졌어요.”

재훈이 물었다.

“뭐가 없어졌단 말입니까?”

“메인 컴퓨터가 없어졌어요.”

“메인 컴퓨터요?”

“예. 이 연구소에 핵심이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컴퓨터입니다. 전에 왔을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핑크레드가 오경수에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거면 진작 챙겨 놓지 그랬어요?”

“그땐 저도 시간이 없었고, 다 합쳐서 무게만 200kg 가까이하는 컴퓨터를 혼자 무슨 수로 옮긴단 말입니까?”

재훈이 말했다.

“혹시 누군가 훔쳐 갔을 까요?”

“제 생각엔 심천우가 회수해 간 것 같습니다. 제 실수예요, 주요 하드가 이미 빠져 있기에 컴퓨터는 회수해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메인 컴퓨터가 없으면 이 시설을 가동하기 불가능한 거예요?”

“예, 불가능합니다.”

디에고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이 시설 자체가 쓰레기가 됐다는 얘기군.”

포트 모건 호로 돌아온 재훈 일행. 재훈은 긴급회의를 열어 메인 컴퓨터가 없어 곤란하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지은이 오경수에게 말했다.

“그 메인 컴퓨터는 어느 정도의 성능을 가진 겁니까?”

“하이브리드 뉴로컴퓨터로, 그 성능을 수치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옆에 있던 원웅이 말했다.

“그렇겠죠. 신경망으로 이루어진 자가 학습형 뉴로컴퓨터에 연산 장치를 더한 하이브리드 컴퓨터니까요.”

재훈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런 시기에 어디에서 그런 컴퓨터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서 순경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운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걸까요?”

다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은 가운데 재훈이 서 순경에게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며칠 전에 샌디에이고 생존 기지에 어떤 생존자들이 들어왔데요. 그들은 큰 케이스를 차에 싣고 들어왔는데, 기지에서 확인한 결과 하이브리드 뉴로컴퓨터라고 하더라고요.”

“뭐? 그게 진짜야?”

핑크레드도 놀라며 말했다.

“뭐야? 그럼 움타타 연구소에서 도난당한 컴퓨터가 혹시 그 컴퓨터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서 순경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고,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컴퓨터에 붙어 있던 마크예요.”

서순경은 회의실 홀로그램 장치에 샌디에이고 생존 기지에서 받은 사진을 띄웠다. 사진 속 컴퓨터 뒤쪽에는 어떤 마크가 붙어 있었다. 재훈 일행이 그 마크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젤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컴퓨터는?”

재훈이 물었다.

“젤리 씨, 왜 그래요? 혹시 아는 컴퓨터예요?”

“예. 저건 셀트사에 있던 메인 컴퓨터예요.”

“뭐라고요?”

재훈은 놀라며 사진 속 마크를 주시했다. 그것은 분명 셀트사의 마크였다.

포트 모건 호는 곧장 샌디에이고 생존 기지로 항로를 정했다. 재훈은 초조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펩스를 만든 회사이자 러비 사태의 주요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셀트사. 그 회사의 메인 컴퓨터가 어떤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생존 기지로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재훈의 궁금증이 더해지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심천우의 기지. 오경수2가 두껍고 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눈보라를 해치며 어떤 시설로 다가가고 있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경비원이 그를 막아섰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오경수2는 자신의 출입 카드를 건네주며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 있다니 말이 됩니까?”

경비원은 오경수2가 건네준 출입 카드를 검사기에 통과시켰다. 검사기의 화면에는 분명 ‘출입 불가 레벨’이라고 나타났다.

경호원이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천우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경수2는 주먹을 불끈 쥐며 부들거리다가 휙 몸을 돌렸다. 스노모빌을 타고 자신의 연구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경수2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시설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 천우님은 대체 저 시설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오경수2는 그렇게 눈보라를 헤치고 연구소로 돌아갔다. 연구소로 돌아온 오경수2가 오경수11에게 물었다.

“혹시 새로운 C-21 구역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어?”

오경수11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잘 몰라. 하지만 천우님이 우리조차 못 들어가게 하시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장소임에는 틀림없어.”

“우리가 못 들어갈 장소라니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지. 하지만 더 이상 궁금증은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천우님의 일에 의심을 품었다간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걸? 너도 알잖아. 천우님의 성격을.”

“하지만, 우린 지금껏 핵심 연구를 다 진행해왔잖아.”

“쓸데없는 호기심은 갖지 않는 게 좋아. 우리는 그저 천우님이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고. 우리가 모르는 그 이상의 것은 천우님이 잘 알아서 하시겠지.”

“도대체 넌 정말 궁금하지도 않은 거야?”

“궁금? 우리는 어차피 천우님의 계획을 위해 태어난 복제품들 일 뿐이야. 천우님의 어떤 일에도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될 소모품일 뿐이라고. 현실을 받아들여. 더 큰일 벌이지 말고.”

오경수2는 뭔가 분한 마음에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며 오경수2는 생각했다.

‘우리가 알아선 안 될 C-21 구역의 일. 도대체 러비 말고 또 무슨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천우님!’

며칠 후, 포트 모건 호가 샌디에이고 생존 기지에 도착했다. 재훈이 현재 샌디에이고 생존 기지에 대장인 안토니오에게 말했다.

“안토니오 대장님, 얼마 전에 대형 컴퓨터를 가지고 온 생존자들이 있다면서요?”

안토니오는 뭔가 답답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오긴 했는데 자신들이 어디 출신인지, 왜 그 컴퓨터를 들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 왔을 때 그 상자 내용물을 확인하는데도 어찌나 안 보여 주려고 했는지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래요? 제가 직접 말해 봐야겠군요.”

재훈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안토니오가 재훈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예? 조심하라니요?”

“놈들은 특수부대에 버금가는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뜻이죠.”

“알겠습니다.”

재훈과 일행들은 궁금증에 가득 찬 채 그 생존자들을 만나러 그들이 묵고 있다는 방으로 이동했다.

방안에는 꽤 큰 상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여러 명의 중무장을 한 남자들이 그 상자들을 개미 한 마리도 통과시키지 않을 기세로 지키고 있었다. 재훈이 방으로 들어가 자신을 소개한 뒤 물었다.

“누가 대장이십니까?”

한 남자가 말했다.

“대장? 우리에겐 대장 따윈 없습니다.”

“대장이 없더라. 그럼 책임자도 없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뭐 하나 물어볼게요. 도대체 그 상자 안에 있는 하이브리드 뉴로컴퓨터를 왜 보호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에게 그걸 말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핑크레드가 그 남자에게 덤빌 듯이 다가가며 말했다.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민영이 핑크레드를 말렸다.

“이봐 핑크레드, 참아.”

그러자 상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핑크레드와 민영을 쳐다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혹시 모르지 저 예쁘고 늘씬한 아가씨들과 우리가 함께 놀게 해 준다면 이 컴퓨터에 대해 말해 줄지도.”

그러자 핑크레드가 더 화를 내며 그 남자에게 외쳤다.

“뭐라고? 너 죽고 싶어? 어디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

민영이 계속 핑크레드를 말리는 가운데, 재훈이 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 컴퓨터가 셀트사의 컴퓨터란 걸 알고 왔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게 셀트사의 컴퓨터란 걸 알고 왔다고요? 그럼 그쪽은 왜 이 컴퓨터에 대해 그렇게 알고 싶으신 겁니까?”

“우리가 그 컴퓨터를 빌려 써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빌려 써요? 하하하!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허락해 줄 대장이 우리에겐 없어서요.”

그때였다. 디에고가 그 남자의 손목을 꽉 잡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잡아 올렸다. 남자는 얼굴이 빨개진 채 외쳤다.

“악! 뭐야 아프잖아! 왜 이래?”

그러자 남자의 일행들이 총을 들어 디에고에게 겨눴다. 그러자 재훈 일행도 줄줄이 총을 들어 남자들에게 겨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디에고는 태연스럽게 남자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굳은살과 색깔로 보아 총을 잘 쏘는 용병은 맞는 것 같군. 하지만 말이야 계속 그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이 팔이 니 몸에서 분리되는 쇼를 보여주도록 하지!”

총을 겨눈 한 남자가 디에고에게 외쳤다.

“무슨 짓이야! 얼른 그 손을 놔줘!”

디에고는 남자의 손을 툭 내려놓고 방금 전 고함을 친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가 총을 쏘려 하자 디에고가 재빠른 솜씨로 남자의 총을 빼앗고 그 남자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악! 아파!”

디에고가 남자의 손을 살피며 말했다.

“고운 피부, 굳은살도 없고 총을 많이 만져 본 손은 아니군. 이봐, 당신 같이 연약한 남자가 총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디에고가 남자의 손을 놔주며 재훈에게 말했다.

“사령관! 이 연약해 보이는 놈이 분명 이들의 책임자야!”

재훈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이 책임자 맞습니까?”

남자는 당황하며 말했다.

“책임자라니. 그런 건 모릅니다. 난 단지…”

그러자 젤리가 앞으로 나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이제 생각났다! 당신 셀트사 보안 시설 팀의 홍인석 과장님 아니에요?”

남자는 놀라며 젤리에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저 기억 안 나요? 셀트사의 안젤리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몇 번 봤었잖아요.”

재훈 일행과 홍인석의 팀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재훈이 인석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 컴퓨터를 옮기고 있었던 겁니까? 말해주세요.”

그러자 인석이 말했다.

“전 단지 저 컴퓨터를 어떻게든 안전한 장소에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컴퓨터를 빌려 줄 수도 없고요.”

재훈이 답답한 듯 인석에게 말했다.

“그래요? 왜 그 컴퓨터를 보호하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놈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컴퓨터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안됩니다!”

그러자 핑크레드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와 인석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이봐! 내 말 똑똑히 들어! 아마 당신에게 이 컴퓨터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도 지금쯤 러비로 변했을 걸? 우린 지금 이 컴퓨터를 이용해 말도 안 되는 희생을 전제로 한 작전을 펼치려고 하는 거라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고작 이 컴퓨터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겠다고?”

인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던 재훈이 인석의 멱살을 잡고 있던 핑크레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핑크레드, 그만해요! 우리 부탁 따위는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에이 씨!”

핑크레드는 성질을 내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가요!”

재훈 일행이 뒤돌아서자 인석이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가족사진을 꺼내 지긋이 쳐다봤다. 그리고 뒤돌아가는 재훈에게 외쳤다.

“내 가족은 모두 러비로 변했어요. 세상을 구할 방법이 정말 있기는 한 겁니까?”

재훈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마지막 카드가 될 겁니다!”

재훈의 눈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가 비춰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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