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지털 키스-77화 (77/119)

# 77

77화 쓰레기 속의 꽃

재훈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뿌연 빛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변을 살피려 해도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말이 귀속을 울려왔다.

“리턴 오메가를 빼내면 이놈을 죽여 버려!”

재훈은 순간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그렇게 재훈은 점점 더 정신을 잃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재훈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깼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 아름다운 여자인 게 분명했다.

어느 순간 재훈은 손가락 끝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재훈은 그 감각이 사라질까, 더 집중해서 손가락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이제 몸의 감각은 점점 손가락을 지나 팔, 어깨, 몸, 다리… 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재훈은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밝은 빛 사이로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천우, 도예,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이었다. 부하들이 재훈을 일으켜 앉히자 천우가 웃으며 말했다.

“대단해, 강재훈. 리턴 오메가의 원본을 머릿속에 잘 감추고 있더군. 더군다나 보너스로 레드 버전의 리턴 오메가까지 갖고 있었을 줄이야.”

재훈은 바짝 메마른 목의 아픔을 느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래, 잘 갖고 있었지. 그걸 꺼내 간 건가?”

“잘 꺼냈어. 내가 유용하게 쓰도록 하지. 그나저나 니 펩스는 엄청나더군. 역시 이정훈 박사는 대단해. 그런 특별한 펩스를 자신의 아들 머릿속에 심어 놓다니 말이야.”

재훈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천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넌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도 않나?”

“원망? 내가 왜 아버지를 원망해야 하지?”

“그런 이상한 펩스를 니 머리에 장착하고, 리턴 오메가라는 위험한 해킹 프로그램을 그 속에 숨겨 놓았으니까 말이야. 결국 너는 그것 때문에 곧 죽게 될 거다.”

“결국, 죽이겠단 말이군.”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널 살려두면 분명히 우리 계획에 방해가 될 테니까, 그래서 없애겠다는 거다.”

“너희 계획? 사람을 괴물처럼 만들고, 그 괴물들이 산 사람을 물어뜯어 죽이고 해킹하는 그 미친 계획 말인가?”

“미친 계획이라니, 말조심하게 강재훈. 우리의 계획은 전 인류를 위한 방대하고 고귀한 작업이니까.”

“진심이냐? 정말 자신이 인류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재훈은 천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넌, 인류 최악의 쓰레기야!”

천우는 몹시 화가 난 듯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지껄이게. 곧 죽을 목숨이니 너그럽게 봐주지.”

그때, 천우의 옆에 있던 도예가 재훈에게 다가와 자신의 옷을 위로 걷어 올려 배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꿰맨 자국 보이지? 지난번 미국에서 너와 싸우다가 난 상처야. 숙녀의 몸에 이런 상처를 남기다니. 덕분에 이제 비키니도 마음대로 입지 못하게 됐어.”

재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도예에게 말했다.

“그 배에 더 큰 구멍을 뚫어 버렸어야 했는데.”

“뭐야?”

“그때 널 죽이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

도예는 열이 치밀어 올랐는지 재훈을 노려보다가 천우를 힐끔 쳐다봤다. 천우는 뭔가를 암시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예가 권총을 꺼내 재훈에게 조준하며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그 한! 저승까지 가져가라 강재훈!”

탕! 탕! 탕! 탕! 탕!

재훈의 가슴과 배에서 곧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훈이 그 자리에 풀썩 고꾸라지자, 천우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좀 전에 저 놈이 날 보고 인류 최악의 쓰레기라고 했던가? 저 놈 시체를 쓰레기장에 갖다 버려!”

“예!”

곧 천우의 부하들이 재훈을 큰 봉투에 담아 옮겼다.

잠시 후, 그들은 재훈을 담은 봉투를 SUV에 싣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향했다. 두 남자는 아래를 보고 그 봉투를 쓰레기 더미가 가득 쌓인 곳을 향해 던졌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도예가 말했다.

“잘 가라, 강재훈.”

약 1년 후. 전 세계는 더 혼란에 빠지고, 남아있는 생존자는 극히 더 줄어들어 있었다. 어쩌면 희망이란 단어는 과거에 사람들이 꿈꾸던 추억의 한 조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집요해진 삶의 집착만을 가지고 겨우 생존해 가고 있었다.

키가 220cm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든 채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꽤 추운 겨울인데도 남자는 그리 추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 구석에 16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폐허가 된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키가 큰 남자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역시 몸을 숨긴 채 그 큰 남자를 살피고 있었다. 소년이 소녀에게 손으로 신호를 하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곧 키 큰 남자의 앞을 향해 돌을 던졌다.

퍽!

남자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총을 겨눴다. 그러자 소년이 활을 꺼내 남자를 향해 정확히 겨눈 후 시위를 당겼다.

휘익!

화살은 정확히 키 큰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재빠르게 맨손으로 화살을 잡아냈다. 곧 그 남자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쳐다보다가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이 급하게 소녀를 향해 외쳤다.

“이런 제기랄! 뛰어!”

곧 소년과 소녀는 뒤를 돌아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뒤로 키 큰 남자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아왔다. 도망가던 소녀가 소년을 보며 말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우린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소년은 뛰면서 주변을 살피다가 소녀에게 외쳤다.

“죽긴 왜 죽어! 플랜 B가 있어! 따라와!”

소년은 한 건물의 외부에 있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소녀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3층쯤 올라갔을 때 밑을 보니 키 큰 남자가 제자리에 서서 위로 올라가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소년이 그 남자를 보며 외쳤다.

“뭐야? 벌써 지친 거냐? 이 괴물 같은 놈아!”

그러자 그 남자는 잠시 몸을 뒤로 뺐다가 달려와 계단을 향해 점프를 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단숨에 2층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올라왔다. 소년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미친 자식!”

5층쯤을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년이 뒤에 오던 소녀를 앞으로 보내며 외쳤다.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올라가!”

“어쩌려고?”

“일단 올라가기나 해!”

키 큰 남자가 소년의 코앞까지 달려오자 소년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서 와라! 덩치만 큰 괴물아!”

남자가 소년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소년이 옆에 있던 문을 열어젖히며 문 뒤로 숨었다. 그와 동시에 문 안에서 커다란 상자 같은 게 튀어나오더니, 그 속에서 9개 정도의 큰 쇠창들이 발사되어 남자의 몸에 박혀 버렸다.

퍼퍽!

남자는 그 충격으로 뒤로 날아가 계단을 굴러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문 뒤에서 살그머니 나와 남자를 살폈다. 위로 도망갔던 소녀도 조심스럽게 내려오며 소년에게 말했다.

“죽은 거야?”

소년은 남자를 살핀 뒤 말했다.

“죽었어. 확실히 죽었다고!”

소년은 죽은 남자의 몸을 뒤졌다. 소녀가 죽은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 소년에게 말했다.

“끔찍하다. 결국 우리가 사람을 죽인 거잖아.”

남자의 몸을 뒤지던 소년이 손을 멈추고 소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사람이 아니야! 우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괴물이지! 우린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라고!”

소년이 기분 나빠하며 토라진 채 남자의 몸을 계속 뒤지자, 소녀가 미안한 듯 다가와 말했다.

“상우야, 미안. 화내지 마. 앞으로 내가 말조심할게.”

소년은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몸을 돌려 뭔가를 소녀에게 보여 주었다.

“오늘 수확이 좀 있는데?”

소년의 손에는 ‘에너지바’라고 적힌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 분명 재훈의 코로 향기로운 꽃향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재훈은 생각했다.

‘난 죽은 걸까? 여기가 천국인가?’

재훈은 살며시 눈을 떴다. 작고 어두침침한 방안이었다. 벽을 둘러보니 촛불이 든 유리병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맡에는 빨간 꽃이 자라고 있는 화분이 보였다. 곧이어 야구 모자를 쓴 노인이 들어오다가 재훈이 깬 걸 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오, 긴 겨울잠을 주무시더니 드디어 깬 건가?”

노인은 옆으로 다가와 재훈의 머리를 손으로 짚어보고, 손목의 맥을 짚으며 상태를 살폈다.

“많이 나아졌구먼. 난 이대로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재훈이 자신의 몸을 보니 가슴과 배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가 노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한 일 년은 누워 있었지 아마?”

“일 년 동안이요?”

“그랬지. 처음 발견했을 때가 늦겨울이었고, 지금 다시 늦겨울이니까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야.”

재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복부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윽!”

노인은 재훈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 마. 아직 상처가 다 낫질 않았으니까.”

“상처요?”

노인은 재훈의 몸에 두른 붕대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총상이었어. 총상을 입고 거의 죽은 채로 발견됐지.”

“저는 어디에서 발견된 겁니까?”

“거대한 쓰레기장이었어. 우리는 지하에서 살면서 가끔 필요한 걸 찾기 위해 쓰레기장을 뒤지러 가거든. 그때 발견됐지. 그날은 신기한 날이었어.”

“신기한 날이요?”

노인은 재훈의 머리맡에 있는 꽃을 보며 말했다.

“저 꽃은 제라늄이야. 원래 겨울에는 꽃이 피질 않지. 그런데 그날 쓰레기를 뒤지다가 저 꽃을 발견했어. 신기했지. 그 추위에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꽃이 피어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저 꽃을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는 큰 봉투에서 거의 죽어가고 있던 자네를 발견하게 된 거야.”

“전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겁니까?”

“천만다행으로 내 딸이 의사였어. 별 장비는 없었지만 자네의 몸에서 총알들을 빼냈지. 그 후로 별다른 약이 없어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던 거고.”

“그랬군요.”

재훈은 잠시 머리맡에 있는 꽃을 바라보다가 노인에게 물었다.

“저 꽃과 할아버지와 따님이 절 살려내신 거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따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은데.”

순간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훈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제가 뭐 실수한 건가요?”

“아니야. 실은 내 딸은 몇 개월 전에 밖으로 나갔다가 러비들에게 죽었어.”

“그랬군요. 따님이 돌아가셨다니… 그런데 러비가 뭐예요?”

그때 타다닥! 하고 발소리가 나더니 소년과 소녀가 뛰어 들어왔다. 소년이 작은 상자를 노인에게 보여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할아버지, 이거 봐요! 제가 자이언트 러비를 잡고 이걸 가져왔어요!”

“뭐야! 내가 위험하다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또 나갔어?”

“에이, 다 준비를 철저히 했던 거란 말이에요. 놈을 유인한 다음 자동차 쇼바로 만든 강력한 창으로 놈을 딱! 쓰러뜨렸다고요!”

그때 소녀가 재훈을 보며 말했다.

“어? 아저씨 깨어나셨네요?”

소년도 재훈을 보며 말했다.

“와! 진짜 깨어나셨네!”

재훈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으며 노인에게 물었다.

“자이언트 러비라니 그게 뭐죠?”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기절하기 전에는 아마 ‘변종’이라고 불렸겠지?”

“예, 변종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었죠.”

“한 10개월 전쯤부턴가 전혀 다른 놈들이 나타났어. 그전에 변종들, 슈퍼바이저라 불리던 놈들과는 다른 놈들이었지. 일단 대부분 키가 2m가 훨씬 넘고, 더 빠르게 움직였지. 놈들은 생존자들을 찾아내어 무참히 죽이거나 납치해 갔어. 그리고 변종들도 뭔가 전보다 더 빠르고 잔인하게 변하게 됐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진화한 변종들을 ‘러비’로 그 거인 놈들은 ‘자이언트 러비’로 부르게 됐지.”

옆에 있던 소년이 재훈에게 말했다.

“참고로 ‘러비’란 건 애인을 이르는 말인 러버와 좀비의 합성어예요. 놈들이 정보를 교환하려고 키스를 하고 있는 게, 꼭 애인 사이 같은 좀비 같다고 해서 탄생한 말이죠.”

재훈이 노인에게 물었다.

“제가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많은 게 달라졌나 보군요.”

“그랬지. 많은 게 바뀌었지. 나도 펩스를 단 걸 계속 후회했어. 놈들은 펩스의 전파를 쫓아오니까.”

재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에게 물었다.

“지금 펩스가 있으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 계신 거예요?”

노인은 야구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 속에 있던 노인의 머리 위에는 은박지가 씌워져 있었다.

“펩스를 꺼낼 인력과 장비가 없어서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머리에 은박지를 쓰고 살아. 그나마 이 동굴은 지하 깊은 곳에 있어서 놈들에게 들킬 염려가 적기도 하고 말이야.”

소년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재훈에게 말했다.

“저는 펩스가 없어서 놈들에게 들킬 위험이 어른들에 비하면 더 적어요.”

순간 재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년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주며 말했다.

“배고프신 거 같은데 이걸 드세요.”

재훈이 ‘에너지바’라고 적힌 상자를 받아 들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게 뭐니?”

“러비들은 가끔 신기한 게 있으면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오늘 제가 잡은 자이언트 러비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거예요.”

재훈이 상자를 까서 노인과 소년 소녀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그러자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는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이제는 다 죽고 우리밖에 남지 않았어.”

“그랬군요.”

재훈은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재훈은 제법 일어나서 돌아다닐 정도의 몸이 되었다. 동굴 곳곳을 거닐던 재훈을 발견한 노인이 재훈에게 말했다.

“아이고, 좀 더 쉬지. 그러다가 병이 더 나겠어.”

“괜찮아요. 자꾸 움직여야 더 빨리 회복할 거 같아서요.”

“그럼 다행이고.”

“저 그런데…”

“말해봐. 뭔가?”

“저는 어떻게 총상을 입고도 살았을까요? 제 기억이 맞다면 분명 가슴과 배 쪽에 총을 맞은 거 같은데.”

“아, 그건, 날 따라와 봐.”

노인은 재훈을 데리고 다른 공간으로 갔다. 다른 공간으로 간 노인은 재훈에게 피투성이의 천 뭉치를 손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발견될 당시에 옷 속에 이 붕대가 있었어. 그때 내 딸 말로는 이게 의료용 금속 섬유 붕대라고 하더군. 원래는 부러진 뼈를 고정시키는 용도로 쓰는 압박 붕대의 일종인데, 왠지는 몰라도 이게 자네 가슴에 둘러져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위에는 혈액 팩이 함께 묶여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자네가 죽음을 위장할 목적으로 이걸 몸에 두르고 있었나 생각했지. 어쨌든 이 붕대 덕분에 자네 가슴은 큰 타박상만 입고 총알에 뚫리진 않았어. 대신 이 붕대가 덜 감겨 있던 복부 쪽만 크게 총상을 입었던 거지.”

재훈은 그 붕대를 받아 들며 말했다.

“이건 제가 감은 게 아니에요.”

재훈은 문득 천우의 기지에서 기절해 있을 때 어떤 여자의 향수 냄새를 맡았던 기억을 되짚어 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이걸 감싸 준거야. 내가 총에 맞으면 죽은 것처럼 위장시키기 위해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한 게 아니라면 자넬 살리기 위해 어떤 천사라도 나타났었나 보군.”

“아마 그랬던 거 같아요.”

그때, 소년이 나타나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밖에 나갔다 올게요.”

“뭐야? 나가지 말라니까! 이 놈이.”

“금방 올게요.”

재훈이 소년을 쫓아가며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따라가 볼게요.”

“아니,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바깥이 궁금하기도 해서요.”

재훈은 소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파란 하늘, 날씨는 좋았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재훈의 시야에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게 보였다.

“비둘기가 있네.”

비둘기가 재훈이 있는 근처로 날아왔다. 그때, 앞에 있던 소년이 재훈을 향해 소리쳤다.

“피해요! 그건 버드 러비예요!”

“뭐?”

비둘기는 무섭게 재훈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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