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핑크레드의 과거
도예가 핑크레드에게 말했다.
“그 남자 건드렸다간 너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야.”
잠시 후, 까만 스텔스 드론 세대가 빠르게 날아들어 왔다. 도예가 그 드론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봤지? 저 드론들은 한번 잡은 목표는 절대 놓치지 않아. 이미 다음 공격 목표로 너희를 조준하고 있어. 알아들었으면 곱게 우리 도련님을 놔주지 그래?”
핑크레드는 남자의 머리에 총을 더욱 밀어붙이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이 총을 쏠 수도 있어. 과연 뭐가 더 빠를까?”
도예는 핑크레드와 남자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예가 핑크레드에게 말했다.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한 모양이군. 이쯤 하고 우리 협상을 하는 게 어때? 너는 우리 도련님을 풀어주고, 난 너희를 풀어주고. 어때? 공평하지 않아?”
핑크레드가 스텔스 드론들을 쳐다본 후 도예에게 말했다.
“저런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가 우리를 곱게 보내 준다는 걸 어떻게 믿지?”
도예가 핑크레드를 겨누고 있던 총구를 계속 조준한 채 말했다.
“그럼, 너는? 네가 우리 도련님을 곱게 풀어 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피차 마찬가지 상황 아닌가?”
사이렌 소리가 제법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예가 말했다.
“좀 더 지체하면 아주 귀찮은 상황이 올 거 같은데, 넌 어때? 날 믿을 건가?”
핑크레드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좋아! 대신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해. 내가 이 자식을 풀어주면, 너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거다!”
재훈이 핑크레드에게 말했다.
“넘어가지 마요! 저 여자가 약속 같은 걸 지킬 리가 없잖아요!”
핑크레드가 재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방법이 없어. 그냥 미친척하고 한 번 믿어보지 뭐.”
핑크레드는 도예를 노려보며 남자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남자의 등을 툭 쳐서 앞으로 보냈다. 남자는 뒤를 돌아 핑크레드를 한번 쓱 노려보며 말했다.
“다음엔 네 입으로 살려달라는 말을 하게 해주지! 오늘 일은 꼭 기억하고 있겠어.”
남자를 풀어주던 핑크레드는 갑자기 남자의 목에 날카로운 침이 달린 작은 상자를 푹 박아 넣었다.
“악!”
도예가 깜짝 놀라 총을 겨누며 외쳤다.
“뭐야! 무슨 짓이야?”
핑크레드가 도예에게 총을 겨눈 채 말했다.
“일종의 보험이지. 그 자식을 풀어주면 너희는 반드시 우릴 죽일게 뻔해. 그 상자는 원격 폭탄이다. 내가 조종해 터지거나, 내가 죽으면 자동으로 터진다.”
“이런 미친년이! 약속이 다르잖아?”
“약속? 너희에게 약속이란 단어도 있던가?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 원격으로 그 폭탄을 해제해주지. 해제가 되면 폭탄의 녹색불이 빨간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참고로 말해주면, 그 폭탄은 살에서 그냥 뽑히지 않아.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거든. 그럼 잘들 가라고.”
도예는 남자의 목에 꽂힌 폭탄의 녹색 불을 쳐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수하자!”
핑크레드는 재훈과, 태현, 대균을 데리고 자신이 타고 온 차량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예 일당도 남자를 부축한 채 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현장에 소방차와 경찰차, 구급차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핑크레드가 이동하면서 펩스로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규야. 아까 상황, 원격으로 다 보고 있었지? 우리 죽은 요원들 신분 좀 싹 다 세탁해서 지워줘.”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핑크레드가 고개를 돌려 대균을 한번 바라보았다. 대균은 이해하고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훈 일행이 식물공장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핑크레드는 원격으로 아까 그 남자에게 설치했던 폭탄을 작동 정지시켰다. 차에서 일행이 내리자 젤리가 뛰어와 재훈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재훈은 젤리를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서.”
젤리의 뒤로 죽은 요원들의 가족들이 나와 있었다. 대균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한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진원 씨는요? 왜 같이 오지 않은 거예요?”
대균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여자는 대균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냥 여기서 농사나 짓게 하지 왜 그런 위험한 작전에 투입시켜서 죽게 만들어요? 알잖아요? 특수부대원들의 가족은 그 사람이 죽을 까 봐 항상 불안해하며 산다는 걸. 그게 싫어서 전쟁이 없는 여기로 와서 살자고 한 건데… 왜 죽게 만들어요. 왜!”
대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에서 가족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재훈 일행은 정리를 한 후 원웅의 연구소로 모였다. 다들 침울해 있는 가운데 재훈이 입을 열었다.
“다들 힘드신 건 알지만 일단 작전 평가를 하도록 하죠.”
대균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우리 측 피해는 형사 9명 중 7명 사망, 특수 대원 24명 중 23명 사망, 투입된 드론 12기 파괴, 나머지 장비 피해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한 뒤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태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개자식들! 어떻게 스텔스 드론이나 대인 추적 미사일 같은 최신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분명히 전에 봤을 땐 그 정도 전력을 가진 놈들이 아니었다고!”
대균이 말했다.
“그 무기들은 현재 미국에서도 실전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기들입니다. 놈들이 그런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건, 놈들 조직이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죠.”
핑크레드가 뭔가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놈들은 우리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 총격전 속에서, 핵심인물인 강 형사, 김 형사, 대균 대장님만 살려 뒀잖아. 아마 셋을 납치하려고 한 걸 거야.”
재훈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상자가 많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리고 결국 신민영 아들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빼오지 못한 것도 제 탓이에요. 좀 더 신중하게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태현이 재훈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잖아. 강 형사 탓이 아니야.”
“그래도…”
원웅이 말했다.
“일단 다들 좀 쉬도록 하죠.”
다들 그 말을 듣고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재훈이 정철민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부장님?”
“어, 강 형사, 몸은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김 선배님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 측 사망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강 형사, 일단 죽은 부하들 일은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 보도록 할게. 강 형사와 김 형사는 몸을 좀 추스르도록 해. 나도 아직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곧 파악하러 나가 볼 거야.”
“알겠습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자네들 두 명이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나중에 통화하도록 하지.”
“예. 부장님.”
재훈은 전화를 손에 쥔 채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잠시 멍하게 앉아 있는 재훈에게 핑크레드가 다가왔다.
“강 형사, 괜찮아?”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구출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저기… 강 형사 잠깐 둘이 얘기 좀 해.”
“얘기요? 알았어요.”
핑크레드는 자신의 방으로 재훈을 데리고 갔다. 재훈이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방문을 잠갔다.
딸깍!
그리고는 갑자기 권총을 꺼내 재훈의 머리를 겨눴다. 재훈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 안 그러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오늘은 핑크레드와 강 형사가 아닌, 오민지와 강재훈으로써 다 털어놓고 얘기하자고!”
재훈은 너무 놀란 채 자신의 머리를 향한 총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핑크레드가 말했다.
“리턴 오메가를 어디서 구했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다 알아! 네가 이번 작전을 위해 임 박사에게 전해 준 리턴 오메가가 실은 진짜 원본이라는 걸! 진짜니까 신민영의 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걸 가지러 왔던 거 아냐?”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리턴 오메가가 진짜라니요?”
“강재훈! 내가 만만 하다고 생각해? 너 뭐야? 혹시 놈들과 관련 있는 거 아냐?”
“핑크레드…”
“한 가지는 확실해. 넌 우릴 속였어! 네가 준 리턴 오메가는 진짜였어! 그 증거를 말해줘? 네가 준 리턴 오메가에 37번째, 126번째 실행파일은 어떤 프로그램도 무력화시키는 주요 해킹 프로그램이잖아! 그 누구도 그런 걸 만들진 못해! 그게 원본이라는 증거야!”
재훈이 잠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핑크레드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 속일 수는 없겠네요. 맞아요. 제가 이번에 작전에 투입한 리턴 오메가는 진짜예요.”
“역시…”
핑크레드는 재훈에게 겨눴던 총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잠시 후, 핑크레드와 재훈은 따듯한 코코아 한 잔씩을 들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인공 숲에서 성규가 퍼시와 놀고 있었다. 핑크레드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해. 모든 게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웠어. 대체 강 형사가 진짜 리턴 오메가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어. 내가 알기로 리턴 오메가는 우리가 상대하는 미친놈들의 조직에서도 강하게 원하는 거잖아?”
“그렇죠. 그나저나 리턴 오메가가 진짜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실은 이번 작전에 강 형사와 대원들이 나가고 나서 임 박사가 말해주더군. 이번에 강 형사에게서 받은 리턴 오메가가 진짜 원본인 거 같다고 말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예감했지. 아 그게 진짜라면 이번 작전은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놈들도 분명 이게 진짜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현장으로 달려갔던 거야.”
“그랬군요. 그런데, 핑크레드, 총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던데.”
“누구에게나 말 못 할 과거가 있지. 그나저나 그것부터 이야기해줘. 어떻게 리턴 오메가의 원본을 갖게 된 건지.”
“혹시, 강은탁 교수님이라고 알아요?”
“몇 번 TV에서 본 적 있어. 뇌공학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우신 분이라고.”
“그 강은탁 교수님이 저의 아버지세요.”
“아, 그래?”
“예. 아버지는 과거 펩스 개발에 자문으로 참가하신 적이 있어요. 이정훈 박사님과는 오래전부터 친구셨대요. 그러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아버지께서 비밀리에 리턴 오메가를 맡아두셨고, 제가 그걸 이용하게 된 거예요.”
“그랬군. 그래서 이번 작전에 미끼를 던졌을 때 신민영 아들이 반응을 보일 거라고 했던 거구만. 진짜 리턴 오메가였으니 놈들이 침을 흘린 게 당연하지.”
“제 비밀을 알려드렸으니 저도 하나 물을 게요. 핑크레드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렇게 총을 잘 다루는 거예요?”
핑크레드는 잠시 말없이 창밖을 보다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강 형사가 비밀을 말해줬으니 내 얘기도 좀 해줄까? 대신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는 비밀인 거야. 강 형사, 혹시 707부대라고 알아?”
“707 부대라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수부대잖아요?”
“맞아, 난 그 707부대 출신이야. 한 때 잘 나가던 대원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군사무기 설계도를 몰래 해외로 빼돌리려 하는 남자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난 임무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 남자를 찾아냈고, 그 과정에서 그 남자의 저항이 거세지자 상부는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그래서 그를 죽이고 빼돌리려던 자료를 회수했지. 근데 그게 화근이었어.”
“화근이요?”
“어, 알고 보니 그는 국가정보원 소속 요원이었어. 몰래 그 남자로부터 회수한 자료를 분석해보니 그건 군사무기 설계도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명단이었어.”
“어떤 사람들의 명단?”
“그건 707부대를 포함한 국가 직속 기관들의 내부에서 돈을 빼돌린 상부 사람들을 고발하려던 명단이었어. 난 충격을 받았지. 내가 뭔가 정치적인 싸움에 관여되어 이용당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던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 길로 바로 사표를 냈어. 현실로 돌아갔지. 근데 난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어. 난 현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이야.”
핑크레드는 놀고 있는 성규를 보며 재훈에게 물었다.
“저 아이 올해 몇 살이지?”
“성규요? 아마 12살 될 거예요.”
“12살? 우리 딸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저 나이일 텐데.”
핑크레드의 눈에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은 그 일이 있기 오래전에, 작전 중에 크게 다쳐서 9개월 정도 병원 치료를 하며 쉰 적이 있었어. 막 다쳐서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임신인 걸 알게 됐지. 좋아하던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이를 임신했던 거야. 그래서 난 치료를 핑계로 민간병원 요양을 신청했고, 치료하는 기간 동안 몰래 부대를 속여 가며 출산을 했어. 예쁜 공주님이었지. 나와 그이를 반반씩 닮았었어.”
“그럼 그 아이는 지금?”
핑크레드는 눈물을 한번 닦고 말을 이었다.
“아이는 출산했지만 혼인 신고도, 출생 신고도 할 수 없었어. 다행히 절친했던 친구의 도움으로 내 남자 친구와 딸의 거처도 마련하고 몰래 같이 살 수 있게 됐었지. 온전한 가족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행복했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 임무가 끝나고 휴가가 주어지면 우리는 여느 가족처럼 여행을 가기도 했어.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더군. 국가정보원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내가 임무에 참가하고 있는 시간에 내 남자 친구와 딸을 죽였지. 일종의 복수였어. 자신의 대원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
“그런 일이 있었군요. 무척 슬펐겠어요.”
“슬퍼할 시간도 없었어. 난 곧바로 놈들의 뒤를 캐기 시작했고, 내 가족을 죽인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 내가 죽였던 남자가 그 비서실장의 조카였다더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나의 가족을 먼저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 했지. 세상에서 나란 존재를 아예 없애고 싶었었나 봐.”
“그 후에 어떻게 됐어요?”
“모든 걸 잃은 나는 그 길로 비서실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청와대로 미친 듯이 쳐 들어갔어. 대통령 수비대 500여 명의 대원들이 무참히 내 손에 죽어나갔지. 나는 대통령 집무실까지 쳐들어갔어. 비서실장은 대통령 옆에 선체로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더군. 그래서 난 비서실장의 머리를 총으로 그 자리에서 날려 버리고 현장에서 체포됐어.”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난 거예요?”
“그게 웃기더군. 그 당시 합참의장이 대통령을 설득해서 날 풀어줬어. 혼자 몸으로 대통령 수비대 500명을 처리한 걸 보고 날 정말 쓸모 있는 전쟁 기계로 판단했던 거야. 그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대원은 없었던 거지. 그 후로 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에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게 됐고 곧 정권이 바뀌며 부대 조직에 인사이동이 있자 어느새 난 잊혀 가기 시작했어. 그리고 한참 후,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다시 날 찾아왔을 땐 난 이미 약에 찌든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어. 그게 오늘날까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야.”
이야기를 다 들은 재훈이 핑크레드를 보며 말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위로는 무슨.”
“참! 근데 핑크레드란 애칭은 어떻게 갖게 된 거예요?”
“아. 그거? 내가 딸에게 쥬디라는 인형을 사 주기로 했는데, 그 인형을 주기로 한 날 딸이 죽었거든. 그래서 그 인형처럼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빨간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나를 핑크레드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라고.”
“가슴 아픈 애칭이네요.”
“뭐, 지금은 어느 정도 아물어서, 괜찮아.”
핑크레드가 재훈을 슬쩍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강 형사.”
“예?”
순간 갑자기 핑크레드가 재훈의 몸 위로 올라타 그를 제압하더니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댔다. 깜짝 놀란 재훈이 당황하며 외쳤다.
“왜 이래요?”
핑크레드는 재훈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총질을 해보니까 자꾸 근질거리는 거 있지.”
“그… 그래서요?”
“다음에 또 총질할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 줬으면 좋겠어.”
“뭐라고요?”
“오늘 강형사를 구하러 가면서 내 킬러로써의 본능이 다시 깨어났다는 말이지.”
재훈이 벌벌 떨고 있는데 핑크레드가 씩 웃었다.
“빵!”
“악!”
자신이 입으로 낸 소리에 놀란 재훈의 모습을 보며 핑크레드가 깔깔 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여려서 어떻게 형사일을 한담? 하하하!”
재훈은 그런 광기 어린 핑크레드를 보며 계속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