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사 선언 #
스펠북과의 연동. 원래 이 원리는 시전자와 접촉함으로써 마법에 대한 보조를 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이 스펠북은 온전한 지식을 담고 있는 도구이기에 이것만으로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신물(神物)이다. 이것의 의미, 구조, 사상 등 내가 관여한 모든 것이 육체와 공명하며 자리 잡았다.
이 일의 원인은 다양한 것이다. 라이브러리가 내 영혼을 쪼개서 만든 것부터 시작해, 선천적 마법사의 재능, 지식의 수준, 원리의 깊은 이해가 한꺼번에 작용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스펠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영혼과 육체에 가까운 골렘 창조체를 만들어준 덕분에, 몸의 일부처럼 인식된 것이다.
이것은 천용이 여의주를 문 것과 같고, 마룡이 용안석을 품고 있는 원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영향에 따라, 내 육체가 변화했다.
외면적으로 크게 변한 점은 없었다. 그냥 피부가 좀 달라진 것 정도? 개인적으로 좀 환골탈태처럼 작은 키가 좀 커졌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지만, 그런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론 크게 변했다. 일반적으로 용들이 가진 몸처럼 손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마법을 펼칠 수 있을 만큼 감음성과 신비에 가까운 육체가 된 것이다.
뇌와 지식 쪽에도 영향이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식이 빠져나가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의 진실만이 들어섰다. 도칸과의 싸움으로 얻으려 했던 것이 이제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이 감각을 뭐라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안쪽에서 새로운 존재가 껍질을 까고 자리 잡은 느낌과 몸에 새로운 팔이 하나 더 붙은 듯한 감각이기도 했다.
상쾌하면서도 이질적인 기분을 느낀다. 나는 몸을 한번 가볍게 움직여 점검해 보았다.
‘···근육 같은 부분에서 변한 건 없네.’
그냥 좀 움직이기 편한 느낌은 있었다. 뭐랄까, 입고 있던 외투 하나를 벗어던진 정도? 그 이상의 느낌은 없었다. 가진바 무공의 실력도 변함없고, 내공도 조금 더 수월하게 움직인다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마법은 달랐다.
휙, 하고 손을 젓자 바람이 손끝에 머문다. 손가락을 비비니 불꽃으로 변하고, 한 번 더 손짓하니 새처럼 변해 날아간다. 그것은 내가 손을 내리는 것에 맞춰 사라졌다.
마룡들이 흔히 사용하는 마법 방식을 내가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펠북과 연동된 몸이 자연스럽게 촉매 역할을 하면서 마법을 쓰는 데 모든 제한이 사라졌다. 여기에 나는 저주와 주술을 응용해서 쓸 수 있으니, 사실상 손짓 하나에 행성 하나를 무너뜨리는 힘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과 협회장이 싸우지 않는 이유가 있었네.’
사장과 협회장이 지금 내 수준과 비슷한 정도라고 추측 중이다. 그렇다면 둘이 세력으로만 싸우는 것도 이해가 간다. 직접 충돌하면 남는 것이 없고, 멸망은 양쪽 다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축하합니다. 원하시는 바를 이루셨군요.
“아, 고마워요.”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와중에 멜드멜이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감사를 표했다.
-···그다지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니군요.
“그러게요. 오히려 좀 더 허무한 감각이 커요.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지식에 대한 탐욕. 그 근원은 선천적 마법사가 품고 있던 나태함이 변질되어 나타난 모습이다. 그것이 배를 채우자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이 더 커다랗게 현실로 되어 다가온 것이다.
“사장이나 협회장이 왜 신념에 따라 집단을 꾸렸는지 알 것 같아요.”
뭔가 목표를 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허무함에 빠져 방구석을 헤엄치게 될 뿐이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없으십니까?
“당장에 생각나는 건 없네요.”
머리를 긁적인다. 뭔가 할 거리를 찾지 않으면 마룡처럼 되어버릴 거라는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지하실을 나섰다. 다른 존재와 상담이라도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거실에서 지아와 마주쳤다.
“연성 씨,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 며칠간 혼자 생각한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할까요? 아니면···.”
“지금 하고 싶어요.”
“네. 알겠어요.”
속으로 긴장감이 흐른다. 나태함? 그게 뭐냐. 그딴 것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에 그녀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세상만사 모르는 일··· 아니, 다 알지만 여자 속마음만큼은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손에 땀을 쥐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연성 씨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자칫 잘못하면 엇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건가요?”
“이번 일을 보고 느꼈어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연성 씨가 위험해지면 제가 바로 달려나갈 줄 알았어요. 그게 사랑을 표현하는 한 가지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때가 왔을 땐 움직이지 못했어요.”
내가 한창 폭주할 때를 말하는 모양이다. 지아는 그때 달려 나와 나를 멈추는 게 스스로의 역할이었다고 믿는 듯했다.
“무서웠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다가가면 죽을 거라 생각해서··· 가지 못하였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인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도 옆에 있어도 괜찮을까요?”
나는 웃었다. 지아를 껴안고 쓰다듬었다. 그녀가 느끼는 갈등.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과 그런데도 불과하고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나는 답변해 주었다.
“얼마든지 있어도 돼요.”
“당신이 가장 힘들 때 옆에 없을지도 몰라요.”
“힘든 건 나 하나면 충분하죠.”
“그러면서 바라는 건 많을 거여요.”
“원하는 바입니다.”
“답답하게 할지도 몰라요.”
“그런 일 전혀 없어요.”
“···그럼···.”
지아가 품에서 나를 올려다본다. 반짝이는 눈망울. 조금 붉어진 뺨. 반짝이는 입술로 말했다.
“영원히 저만 사랑해 주세요.”
“그럴게요.”
나는 그녀와 입술을 마주쳤다. 침실로 들어갔다. 그날 하루는 둘이서 달콤하게 보냈다.
다음날. 나는 회사에 출석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결과가 나왔나 보네.’
하루가 지났다. 회의를 오래 해도 끝날 수준은 되었겠지.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상관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내가 할만한 일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냥 지아랑 둘이서 사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일도 안 하며 뒹굴뒹굴하는 건 나한테 좋지 못하다. 나태함이 마룡 수준으로 올라가면 지아를 부려먹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신념과 욕구를 자극할만한 일이 필요했다. 그냥 단순한 노동은 오히려 의욕을 떨어트리고 나태함을 부추길 뿐이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걸 찾을 수 있으려나.’
물론, 그냥 이대로 회사의 이념을 이어가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협회와의 관계나 현 사장의 이념이 꺾인 걸 생각하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속으로 다양한 고민을 하며 회사로 갈 채비를 했다.
“같이 가드릴까요?”
“괜찮아요. 집에서 기다려줘요.”
지아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로 이동했다. 이동 좌표는 하운드. 문명의 탑이 어디 어떻게 있는지 알아도, 그를 거쳐야 하는 모양이다.
“절차란 것은 귀찮은 구석이 있는 법이죠. 이동하겠습니다.”
하운드가 열어준 문을 통과하자 이사진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사장이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정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장님?”
이사진 중 하나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사장은 그저 조용히 날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축하합니다. 이걸로 셋이 되었군요.”
“고맙습니다. 회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예의상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진심이 담겨있기도 했다.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취업준비를 하거나, 평범한 사회인 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게 행복한 생활인지에 대해서는 난 모른다. 그러나 지금이 행복하건 알고 있으니, 회사에 감사하는 마음은 진실이었다.
내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사장은 이어서 말했다.
“저희 회사 측 회의 결과에서는 하연성 씨가 벌인 행위에 대하여 명백한 구분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회사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피해를 입힌 것도 사실이니까요. 따라서 저희는 하연성 씨에게 상벌을 동시에 드리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부장급 수십이 사라진 것은 회사에서도 적은 타격이 아닐 것이다. 비록 그들이 타격대 일을 하면서 피해를 보았다손 치더라도, 죽은 존재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실력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일은 각오한 바였다.
“우선 상여에 대한 부분입니다. 하연성 씨 덕분에 창조체에 대한 1차 공격을 수월하게 물리칠 수 있었고, 키메라에 대한 2차 공격을 막는 것 또한 주요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전설급 물품 두 개와 부장으로의 진급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입힌 피해 또한 막대하니, 5년간 보안에 탑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만약 이 기간을 문제없이 보내거나 활약한다면 이사로 승진도 시켜드리겠습니다.”
나름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만약 이 일이 현실화된다면 나는 전설급 물품 두 개와 추후 이사진으로 승진한다. 비록 이사라는 자리가 힘들지만, 어린 나이에 힘을 인정받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결코 손해는 없다. 마룡들의 일을 비우면 조금이나마 외부일을 하는 이사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사장 옆에 두고, 괜찮다고 판단되면 이사진으로서 회사에 보탬이 된다.
보상과 회사의 방침이 적절하게 조화된 대안이었다.
내가 상위종족으로 올라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참고로 이사진에 올라서면 계약조건이 달라집니다. 회사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니까요.”
평사원에서 대리로 올라설 때, 계약직으로의 전환이 있다. 그것처럼 이사진으로 승급할 때 또한 계약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일의 양이나 필요한 것, 위험성이 틀리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이사진으로 올라설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본래는 그때 알려드리고 선택권을 드립니다만, 미리 물어보고 싶군요.”
사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기 드물게 눈동자에 생기를 담은 채 물었다.
“하연성 씨. 우리 회사에 이사진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건 어딜 봐도 선택권을 주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이사진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신념이 무너진 자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어 줬으면 한 것이다. 도칸과의 전투에서 상위 종족으로 올라설 수 있었음에도, 걷어찬 뒤 스스로 상위 종족에 올라선 존재였으니까.
나는 그야말로 그가 원하는 산증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이사가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거절했다. 사장의 눈빛에서 실망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원망하진 않았다. 반짝이는 생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과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어도 신념과 이념의 희망을 발견한 탓이리라.
거기에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5년간의 근무도 다른 것으로 교체하고 싶습니다.”
“으음. 그건···.”
“하연성 씨. 그 부분은 당신이 입힌 피해에 대해서 보상하는 행위입니다. 회사를 나갈 예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내 말에 이사진이 반발한다. 이사가 되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니 참견하지 않았지만, 강제적으로 부여된 의무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범죄를 저질러놓고 도망하겠다는 행위와 마찬가지인 탓이다.
그러나 사장의 반응은 달랐다.
“어떤 것을 해 줄 생각이신가요?”
“사장님!”
“이러한 행위는 전례를 남기면···.”
그의 결정에 재차 반발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장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전례에 조건을 한 가지 추가하면 문제없습니다.”
“조건이라뇨?”
“그게 무슨···.”
“저와 같은 수준에 올라 있는 존재라는 조건 말입니다.”
이사진들이 침묵했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변한 모습은 없다. 무슨 오오라나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가 상위존재로 올라서면서 품었던 생각 중 하나가 ‘평화로운 일상’인 탓이다.
덕분에 나는 사장처럼 겉으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다만. 마법을 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후화악!
“음···”
“이건···!”
회의실에 바람을 만들었다. 사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폼을 좀 잡는 거다. 이래 보여도 상위존재로서 첫 데뷔가 될 테니까.
나는 오른손에 신의 손을 쥐었다. 왼손에는 스펠북이 펼쳐지며 빛을 내었다. 코트가 펄럭인다. 바람 속에서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새로 인사하겠습니다. 선천적 마법사로 세상의 규칙을 보고, 다른 지식을 배워나가 인간을 초월한 마법사.”
아, 그러고 보니 내 종족명을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가 내게 있었으니까.
“용인(龍人) 하연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