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장 #
붉은 거인과 군부대의 균형이 맞춰지자, 나는 마지막 준비를 했다. 전투가 끝나면 속박 마법으로 제압할 생각이었다.
'이성을 잃은 적은 쉽네.'
설마하니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고 공격하려 하다니. 멍청한 판단이다. 만약 상대가 어린 마녀라 해도 썩 좋다고 말할 순 없으리라. 나는 그들을 조소하며 타이밍을 쟀다.
그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허?"
약 아홉 명으로 보이는 적들. 두 명의 얼굴이 익숙하고, 흙이 잔뜩 묻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땅에 묻고 간 2인조와 구출대 7명. 그들이 날 찾아낸 것이다.
'쯧.'
속으로 혀를 찬다. 저들이 어떻게 연락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귀찮아졌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저들은 귀찮은 것 이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쏴라!"
"돌격!"
퓨퓽! 촤락!
그들은 테이저건과 호신봉 같은 무기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각각 노란 스파크가 튀는 걸 보니, 전기 충격을 주는 도구인 모양이다. 전국(電國)이라 하더니만, 저런 무기에 특화된 모양. 먼저 테이저건이 날아왔다.
팅! 팅!
조금 큰 총알이 코트의 마법에 튕겨 나간다. 그사이 나는 마법의 방향을 바꿔, 달려오던 적들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끈끈한 대지의 실-]
"윽!?"
"제길! 칼이 필요해!"
"아, 안 잘려!"
대지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끈이 뻗어 나와 네 명을 묶었다. 그들은 각각 가지고 있던 날붙이로 잘라봤지만, 이내 다시 붙어버린다. 그들에게 쓴 마법은 애초에 40명에 가까운 적들을 단번에 제압하려던 거였다. 그 정도 대비는 당연히 되어 있었다.
"아이자드, 위시!"
그리고 남은 다섯이 당황한 틈을 타, 정령들을 부르고 돌격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정령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핫!"
"야호!"
아이자드가 냉기를 뿌리고 위시가 그걸 조종한다. 둘 다 상황이 맞지 않아 힘은 약했지만, 합쳐지면 괜찮은 공격력이 된다. 녀석들은 합동기는 군부대의 손발을 얼려 좋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뻣뻣해진 녀석들의 외곽을 돌면서 조금씩 깎아내렸다.
"하나요~ 둘이요~"
하나를 쓰러트리자 아이자드의 얼음 덩어리와 위시의 바람 합동기가 한 녀석을 무너트린다. 위시는 재미있다는 듯이 쓰러지는 적들을 세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홉 명을 쓰러트리는 데 걸린 시간은 약 5분. 이쪽의 상황을 파악한 대장이 소리쳤다.
"후, 후퇴한다!"
"부상자는···"
"챙길 시간 없어! 산개 후퇴! d 지점으로 모여라!"
아홉의 예비대가 대장이 준비한 최후의 한 수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볼품없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는 한 번 더 혀를 찼다.
저들보다 무력은 뛰어나지만, 사방으로 흩어지면 잡기 어렵다. 나는 빠르게 마법을 펼쳐 저들이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지만, 13명을 놓치고 말았다.
'얌전히 잡힐 것이지!'
속으로 분을 삭였다. 당장 쫓아가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건 어렵다. 아직 붉은 거인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쿵! 쿵!
-갸아아아아!
부웅! 콰앙!
큰 소리를 내며 걸어온 붉은 거인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받은 군부대조차 피할 수 있었던 속도다. 경공도 있는 내가 못 피할 이유가 없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격을 피한 뒤, 내공을 담아 붉은 거인의 다리 쪽을 후려친다.
"흡!"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거인의 몸체가 일부 찢겨 나간다. 부대와 비교했을 때, 약 4~5배가량 많은 양. 붉은 거인의 체력을 확실히 깎아내릴 수 있는 힘이었다.
-갸아아···
그런고로 거인이 무너져 내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2m에 가까웠던 거인의 몸체는 서서히 동작이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약간 남은 잔해의 흔적에서 노파를 발견하곤, 그녀를 폐허 쪽에 눕힌 뒤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할머니!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쓰러지신 것뿐이에요. 치료할 테니 저를 좀 도와주세요."
소녀와 노아는 오자마자 곧장 노파의 안전부터 챙겼다. 그리고 레인은 병사 하나를 끌고 왔다.
"연성, 도망치던 놈 중 하나를 잡아 왔어!"
"멋지네요."
"여어. 우리 왔네."
마지막으로 나와 그녀는 전국의 군부대원들을 구속할 때쯤, 지트와 뷔뷔르도 도착했다.
"지트 씨. 추적해야 할 일들이 생겼어요."
"···주변 상황을 보니 알 것 같군. 바로 시작하지."
"나는 레인 양과 함께 노야 양을 돕겠네."
전국의 포로 중에는 대장급 녀석이 있었지만, 심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에 묻어뒀던 두 녀석이 정보를 감췄으니, 이번엔 속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고문을 하자니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결국, 잔당 처리는 나와 지트가 하기로 했다.
지트는 파트너 셋을 퍼트려 한꺼번에 세 놈을 쫓았다. 거기까지 할 순 없었던 나는 발자국에 탐색 마법을 걸어 한 놈씩 추적했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잔당 소탕까지 마무리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타닥! 타닥! 보글보글!
장작이 타들어 가며 주변의 공기와 스튜를 데운다.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니, 휴식 겸 늦은 점심을 만드는 거였다.
다만 이것은 우리만을 위한 게 아닌, 소녀와 노파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배고파! 먹을 걸 줘!"
"조금만 기다려줘요, 할머니. 이제 곧 다 됐어요."
노파는 오래 기절해 있지 않았다. 소녀의 말에 의하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철 체력이라는 듯, 일어난 뒤에 우리가 봤던 것처럼 잘 움직였다. 덕분에 우리 걱정과 무거운 분위기도 날아갔고, 노파의 시중을 들려고 일부러 따듯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식사시간은 느렸다. 노파의 시중보다는 모두가 그렇게 했다. 노아가 의뢰를 넣어 난쟁이들이 만드는 통나무집이 완성될 때까지의 여유였다.
"정말 고마워요, 노아 언니. 저놈들을 처치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집까지···"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지."
통나무집을 의뢰한 건 노아였다. 어느새 말까지 튼 소녀를 위한 건물로, 자재와 내부 인테리어까지 싹 수리한단다. 분명 적지 않은 포인트가 들어갈 텐데도 불구하고, 소녀와 친하게 지내기 위한 결정인 모양이다.
뭐, 그 덕분에 소녀랑 말까지 터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목적은 달성했으리라. 우리는 편안한 분위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완성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네요."
해가 졌지만, 점심을 늦게 먹어 배가 부른 저녁. 우린 새로 만들어진 식탁에 모여서 계획을 이야기했다.
"우선 지트 씨, 뷔뷔르 씨. 수고하셨어요. 두 분이 없었다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이거 부끄럽구만. 난 정말로 한 게 없는 데 말이야."
노아의 의뢰. 마녀를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에 따라 이 둘은 계약을 완료하곤 헤어졌다. 하지만 나와 레인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레인은 전국의 군부대를 마법국에 연행시킬 예정이었고, 나는 노파의 상태를 보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중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당연히 노파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할머니. 낮에 쓰신 마법이 뭐예요?"
"뭐? 뭘 써? 난 쓴 거 없어!"
그녀가 쓴 마술. 혹은 저주의 정체를 안다면 단번에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건만, 안타깝게도 당사자에게서 듣긴 어려워 보였다.
결국 나는 당초 노림수대로 저주를 배우기로 했다.
"잘 부탁해요."
"저, 저야말로···."
마녀의 지식은 책만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지식의 계승에 대해서는 꽤 신경을 쓰는 편이라, 도난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놓은 탓이다. 덕분에 나는 소녀 마녀. 루리에게 마법을 배워야 했다.
"우선 기초부터 알려드릴게요."
솔직히 말해서 루리의 수업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가르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깊이 있게 익힌 게 아니라서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 상황을 비교하면 1+1=2가 루리의 수업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1+1=2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과정을 알고 싶은 거다.
물론 정확한 공식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지식이 선결되어야 하지만, 거기에 대해 물어봐도 소녀 마녀는 알지 못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실전으로 보여주면서 설명을 듣고, 탐색 마법으로 심화연구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약 3일 뒤. 나는 마녀가 쓰는 마술에 대해서 대충 감을 잡을 잡게 되었다.
요지는 세상의 규칙을 부수고 일시적으로 조합하는 것. 규칙을 일그러트리는 마법과는 발동 방식이 다른 거였다.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결과도 판이하다. 마법사가 '허공에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를 '허공에서 불이 붙는다.'로 바꿔서 허공에 불꽃을 생성한다면, 마녀는 '허공에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에 대해서 '얼음은 저쪽에 춤추고 있어!' 같은 형태를 만들어 낸다는 것.
마법은 과학적 사실을 많이 비틀수록 어렵고, 마술은 과학이 섞일수록 어렵다. 따라서 마술은 기괴하면서도 위력적인 편이지만, 종류가 무척이나 적었다. 과학적 사실에 의존하지 않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니까.
루리가 보여준 기초 마술도 그랬다.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눈 결정체. 어째서인지 마디마디가 살아 움직이고, 한가운데에 외 눈깔이 달려 있으며, 냉기에 취약한 비 생명체. 도무지 이걸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만들어내는 게 마술이었다.
그러나 이 마술의 기초를 이해해야 저주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겨우 삼일이라···. 솔직히 기가 좀 죽는데."
"···레인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생각하는 데요."
혼자 마술의 이론을 연구하는데, 레인이 옆에 주저앉으며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히려 황당한 이야기였다. 나는 마술의 이론을 익혔지만, 그걸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술은 빗자루, 로드, 고깔모자를 여성의 관절이나 신체 구조로 움직이는 게 많아서, 나는 다룰 수 없었다. 마녀의 비율에 여성이 높은 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고로 이쪽은 이론만 익힌 반면, 그녀는 심심하다는 이유로 마술을 진짜 배웠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지금, 그녀는 소녀 마녀의 절반 수준에 도달한 상황. 그런 사람이 이론만 빠삭한 사람에게 부럽다고 하는 건 어떨까 싶다.
실제로 소녀 마녀는 레인을 가르치며 매우 침울해져 있었다. 자신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재능이 있단 걸 알았으니까. 정말 배부른 투정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이론만 보자면 차이가 심하잖아!"
"아니, 이론만 배우는 거 하고 실제로 하는 거 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그걸 가지고 비교하면 어떡해요? 루리가 기죽은 거 안보여요?"
"그건 너 때문이잖아! 마술을 뜯어서 기초부터 파고들지 않나, 어느새 마술을 짤 정도까지···."
딱! 딱!
"윽?!"
"아얏?!"
우리의 말다툼이 격해지려 할 때, 머리에 작은 충격이 느껴졌다. 때린 사람은 노아. 그녀는 한기가 담긴 눈으로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재능 있는 연놈들은 자랑하지 말고 닥쳐주세요."
"···네." "···응."
노아가 한쪽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루리를 가리키며 말했기에, 우린 조용히 수긍하며 물러섰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이며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 둘이서 협력하면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을까요?"
"···해볼 가치는 있어 보이네."
하나의 기술을 파헤치기 위한 공동전선. 그 뒤로는 마술을 파헤치는 속도가 올라갔고, 배우기 시작한 지 열흘쯤 되었을 무렵, 우리는 루리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또한 나는 저주의 분석에 들어갔는데, 이쪽이 마술보다 쉬웠다. 마녀가 사용하는 저주는 주술과 비슷한 감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마녀의 기술이다 보니, 제물이나 사용법이 크게 달랐지만,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열흘이 더 지나고. 전국에 병사들이 마법국에 끌려가고, 레인과 노아도 더는 시간을 낼 수 없어 돌아갔을 때.
나는 노파가 쓴 저주에 대해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정말 맞을까요?"
"응. 확실해."
루리와 내가 살펴보는 건 오래된 고서였다. 마법으로 관리되는 책장 속에서도 많이 닳은 책. 그것의 한 부분에 노파가 쓴 것과 흡사한 저주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 양복이 변했을 때의 저주. 그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녀들의 원조라는 존재가 만든 건데요. 그걸 풀어헤친다는 게 가능한 건가요?"
마녀의 지식은 보존되어 온 것이다. 특정 조건 아래 소수에게만 전해져 오다 보니, 발전보다는 퇴화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다. 그런 고로 이 저주는 전 차원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초보자가 다루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그래도 해봐야지 뭐."
포기란 단어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