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리 (10:5분 수정) #
메시지를 통해 일행과 합류한 나는, 지아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연성 씨. 그런 걸 쓰실 때는 좀 더 시간을 두고 해주셔요. 잘못하면 이도 저도 못해서 얼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아이자드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게 꽤 빨랐던 모양이다. 합류한 일행들은 겉옷이 잔뜩 젖어 있었다. 눈을 맞은 흔적이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마법으로 옷을 말려주었다. 그리곤 모닥불과 음식을 구매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옥은 등에 업고 있던 존재를 모닥불 가까이에 뉘었다. 인간과 흡사한 모습의 검은 머리 여성. 레고드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간호했다. 내가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그렇지 않아도 신관에게 의뢰한 참이오."
산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관이 도착했다.
신관은 간단하게 건강을 체크하더니, 몸이 많이 상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신관술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해졌군. 겉모습과 달리 속이 크게 상했어."
레고드가 이를 갈았다. 우리는 신관의 적절한 조언을 받아, 써야 할 약을 상점에서 구매했다. 그리고 신관술과 함께 치료해주었다.
"끝내긴 했지만 응급 처치 수준이네. 못해도 며칠은 정양해야 할 거야."
다양한 치료기술을 알고, 사용하는 사원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정말 많이 다쳤다는 뜻이다. 레고드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치료는 완벽하게 해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고맙다."
레고드와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가망이 없다면 모를까, 살릴 수 있다면 살리는 게 좋았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거나 장기가 소실 된 것도 아니라서, 포인트도 많이 들지 않았고. 게다가 치료되기 전까지 레고드를 속박할 수 있는 수단도 되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안정적인 치료를 하긴 어려웠다.
"의뢰를 재정리 할게요."
나는 일행을 불러 모았다.
의뢰의 최우선 사항인 레고드의 연인 구출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레고드와 연인을 돌보며 감시할 자, 나와 같이 약탈(?)을 계속할 자를 선별해야 했다.
우선 지아에게 레고드와 연인의 감시 겸 돌보는 역할을 맡겼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고, 한번 레고드를 제압한 적도 있다는 걸 높이 샀다.
산옥은 나와 함께 원산지를 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주목적은 내 호위다. 협회의 다른 존재들이 찾아오는 걸 대비한 보험이었다.
나머지 둘은 계약을 끝냈다. 마도비는 다음에 또 같이하고 싶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계약을 완료했다.
나는 레고드의 마법 물품의 주도권을 지아에게 이전시키고, 마법 종이와 함께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자드와 함께 위시를 역소환 시켰으니, 같이 잘 정리하고 돌볼 것이다.
그 후 나는 산옥과 함께, 데드하울을 타고 날아올랐다.
"워허! 내 살면서 이렇게 날아 볼 줄은 몰랐구만!"
신나하는 그와 함께,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우리는 근 하루가 넘어가는 이동을 하고 난 뒤에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게 낵이라는 동물인가.'
대상은 낙타와 양을 섞어 놓은 듯한 존재였다. 다리가 길고 몸이 퉁퉁하면서도 털은 짧다. 목은 당연히 길었다. 아니면 풀을 뜯어 먹을 수 없으니까.
별로 흉포해 보이진 않은 존재. 처음에는 왜 사육이 불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먹는 것을 보고 이유를 눈치챘다. 녀석들은 바위와 이끼를 한꺼번에 씹어 먹고 있었다.
'눅눅한 바위가 없으면 못 키우는 거구나.'
그럼 나도 사육하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녀석들을 싹 사냥하기로 했다.
우선 제일 먼저 습격한 곳은 역시나 사육장. 데드하울이 내려서니 모두 혼비백산하며 도망친다. 마법사의 도시와는 달랐다. 이곳에 있는 건 대부분 강제 동원된 노예였고, 해골용에 반항할 의사가 없었다.
나는 간단하게 착지해서 낵을 한 마리 죽이고, 분석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상점에서 해체용 칼을 몇 자루 사서, 가죽만 벗기게끔 만들었다.
산옥이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내 평생 동물 가죽 벗기는 마법은 처음 들어 봤수.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아는 거유?"
"제가 만든 거예요. 그쪽에 재능이 있거든요."
"가죽 벗기는 데에?"
"마법 만드는 거요."
"으음. 그건 편리하겠구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가죽을 벗기는 칼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한마디 했다.
"그럼 뭐든 필요한 건 만들 수 있는 거요?"
나는 잠시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필요한 물건은 어지간해선 상점에 있다. 내가 마법을 쓰는 건 효율과 가성비가 모두 좋아서 그런 거다. 마법 물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굳이 나에게 맡길 필요가 없었다.
그걸 말해주자 그는 머리를 긁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대부분 기계는 크고 소리가 나잖소. 그게 곤란할 때가 있단 말이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종종 마법 물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의뢰를 하면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후 움직이는 칼들이 낵의 가죽을 모두 벗겨내자, 노예들이 대형을 짜고 나타났다. 주인이란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비는 형편없었다. 대부분 활과 나무창이었고, 그나마 관리직으로 보이는 자들도 기사에 절반도 못 미치는 장비를 갖췄다. 나는 상대할 것도 없이 땅을 진창으로 만들고, 데드하울 꼬리에 벗긴 가죽을 흡착시킨 뒤 날아올랐다.
이런 느낌으로 약 다섯 개의 사육장을 털었다. 그 후에는 안쪽 험지에 들어가서 사냥을 했다. 야생의 동물은 잘 도망쳤기에 사육장만큼 쉽진 않았다. 덕분에 3일간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은 사육장 다섯 곳을 턴 것만 못했다.
"내 생각엔 슬슬 빠지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의뢰인 생각은 어떻수?"
"그렇네요. 그럼 목표를 바꿔 볼까요."
"...털 게 더 있우?"
마법 종이를 만드는데 필요한 건 많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가죽이라서 먼저 털었을 뿐이다. 나는 꽤 큰 도시 하나에 스며들어 가, 도둑 길드와 접촉했다.
접촉은 어렵지 않았다. 나 혼자서 새 여행복을 입고 두툼한 돈주머니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도둑이 찾아왔으니까. 내가 할 일은 도둑을 협박해서 본거지에 끌고 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마법 종이 제작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턴 지 약 5일 후. 이쯤 되면 내가 차원 전체를 털어먹는 다는 걸 들킬 때가 되었으므로, 그 차원을 빠져나왔다.
"이제 오셨어요?"
집에 도착하니 지아가 날 맞이해 줬다. 집안은 마법 종이를 포함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 나는 그녀를 안아 고맙다고 말해 주곤, 우선 레고드와 연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신관의 말로는 상처는 전부 나았다는데··· 깨어나질 않고 있어요. 며칠 정도 더 걸릴지도 모른다나 봐요."
그들이 있는 방문을 조용히 열어보았다. 거기엔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도플갱어와 누워서 꼼짝 않는 연인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채 문을 닫았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가죽과 다른 물건들을 정리하는 거로 신경을 돌렸다.
"그런데 이 많은 물건은 전부 어디에 쓰실 예정이어요?"
만들어진 마법 종이만 수백 장. 재료를 소모하면 다시 수백 장. 족히 수천 장의 마법 종이를 보고 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쓰게 웃으며 답해줬다.
"전부 스펠북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천룡 가묵시의 의뢰를 수행하면서 내가 어떤 게 부족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를 관통하는 조화. 단순히 기술 하나하나로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닌, 섞을 수 있는 부분을 섞어내는 방식.
나는 그렇게 만들어낸 지식이야말로, 종족을 뛰어넘는 길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걸 만드는 것으로 스펠북을 떠올렸다.
왜 스펠북이냐 하면, 역시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들기 편하고 가장 재능을 활용하기 쉬웠으며, 무엇보다 가장 잘 아는 것이다 보니 중심이 굳건했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재료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스펠북에 들어가는 재료가 상상 초월이다. 내가 목표로 하는 스펠북은, 가지고 있다면 세상 모든 지식이 손에 들어올 만큼의 물건이다. 천룡의 여의주나 마룡의 용안석보다 뛰어난 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사장과 협회장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만약 가능했다면 모든 세상이 주목할 것이다. 손에 넣는다면 발전의 끝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고로, 난이도를 현실적으로 낮추었다. 세상 모든 지식에서, 세상에 드러난 지식으로 목표를 바꾼 것이다.
참고로 자동 갱신 기능도 넣고 싶다. 그야말로 전설이라 불리는 걸 뛰어넘어, 세상에 단 하나. 더불어 어떤 존재든 탐낼만한 물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법 종이가 얼마가 있든 간에 부족했다. 그리고 포인트도. 회사에 있는 모든 책을 살 예정이었으니 당연하다.
그것을 지아에게 알려주었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며 물어보니,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어떤 존재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본능인걸요. 연성 씨의 경우에는 그게 지식일 뿐이어요.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응원밖에 없어요."
"어째서요?"
"연성 씨가 제 삶의 의미니까요."
그날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둘이서 휴식을 취했다. 나중에 위시가 놀려댔지만, 가볍게 흘려주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법이다.
"얼마 전만 해도 완벽한 치킨이었으면서 다 아는 척은."
수다쟁이 정령은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 이어간다. 대량의 가죽과 소재로 마법 종이를 만드는 것이다.
여러 가지 약품이나 건조 등의 이유로, 환영 마법을 건 채 마당에서 했다. 그리고 가져온 마법 종이와 만들어진 마법 종이는 전부 창고에다 넣어 두었다.
그 양을 확인해 보니 약 7800장. 아직 턱도 없는 분량. 나는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1억분의 1도 못 채웠는데, 지하 창고 중 하나가 꽉 찼어. 이대로는 시작하기도 전에 종이에 깔려 죽을 거야.'
공간의 부재. 그것은 내가 넘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스펠북을 만든다 하더라도 크기를 생각하면 당연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특기인 마법 물품을 이용하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공간'을 조종하는 것만큼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게임이나 소설에선 곧잘 인벤토리나 공간이 왜곡된 주머니가 나오는 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법이 기적을 일으킨다곤 하지만, 세상의 가장 변화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과 시간이 가장 난이도가 높고, 다음이 중력, 대대적 변화, 상황과 반대되는 현상을 일으키는 거다.
그리고 공간의 왜곡에는 차원 이동도 포함이다. 결국 완전히 다른 세계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거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내가 알기론 딱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회사의 시스템과 협회의 도약용이라는 녀석. 그중 도약용은 뭔지 알 것 같다. 아마 괴룡 중 하나로서, 모든 힘이 공간왜곡에만 집중된 녀석일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시스템은 아직 뭔지 몰랐다.
나는 고민 끝에, 회사의 이동 시스템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대상은 하운드. 이번 일을 보고도 할 겸, 겸사겸사 처리할 생각이었다.
'...선물 세트라도 하나 들고 갈까.'
다만, 이번에 사고를 친 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