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 파견 회사-135화 (135/207)

# 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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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빈은 짜증 났다.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서 발생한 게 아닌, 총체적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연성의 지팡이를 부수지 못한 것, 유리한 상황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 날아다니는 목표물. 파기 당하는 마법. 이 모든 게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신경을 건드린 것은 이 상황을 타개할 명확한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또 다시.'

그는 이를 갈았다.

'또 다 녀석에게 져서 도망쳐야 하는 거냐?'

거듭된 패배. 그것은 마치 낙인과 같았다. 결코. 얼마나 되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더라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증거. 그것이 레빈을 미치게 했다.

여태껏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무수한 시간과 노력으로 이륙해온 자리였다. 심지어 종족상 유리한 고지에 있는 존재마저 그러했다. 때문에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렇게 되리라 예상했기에.

그것을 깨부순 것이 하연성이었다.

비슷한 나이, 같은 종족, 시작점은 이쪽이 더 빨랐고, 환경도 우월했다. 노력이 뒤처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방향을 선회해보기까지 했다. 자신의 몸에 실험과 상처도 입혔다. 다수로 기습도 걸어봤다.

그러나 잡을 수 없었다. 레빈은 분노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걸 부정하는 것 같았다. 축복받은 장소에 진흙발로 걸어들어와 외쳤다. 내가 있는 곳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는 그저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며, 누구나 해올 수 있는 걸 해왔을 뿐이라고.

그게 싫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특별하게 여겼다. 다른 이가 쫓아올 수 없는 장소. 단순히 운만 좋은 범재 취급받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연성이 죽어야 했다.

그러나 레빈은 이길 수 없다. 온갖 수단을 썼지만 실패했다. 그것이 분했다. 너무나도 화가 나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속삭임이 들렸다.

-뭐가 그렇게 분해?

아무런 징조도 없이 들린 목소리. 하지만 그는 어떠한 수상한 점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히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었지만 어떠한 의문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 당연히 들려야 하는 거였다.

또한 그 목소리에는 답할 의무가 있었다.

-이기지 못하는 게 분해.

소리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전달되었다. 목소리가 제안했다.

-이기게 해줘?

너무나도 달콤한 음색으로 속삭인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레빈은 홀딱 빠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레빈은 혼란스러워했다. 상대방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강렬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명백하게 정신계열 기술에 당한 상황. 하지만 그것을 자각해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네년은··· 뭐야···."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간신히 저항한다.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순순히 정체를 알려주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하자면··· 협회장이겠네.

협회장. 예상외의 대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왜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접근해 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게 중요해? 이기고 싶은 적이 눈앞에 있는 거 아녔어?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레빈은 정신을 바로 다잡았다. 지금은 눈앞의 하연성을 죽이는 데 집중할 때였다.

-맞아. 그걸 내가 도울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팔을 찔렀다.

****

'뭐지?'

검은 양복이 자신의 팔을 찔렀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자해라는 행위로 이득 볼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저걸로 강력한 기술을 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저주뿐이다. 그건 자신의 고통과 감정을 원료로 삼는 기술이기에 그랬다.

하지만 저주를 쓸 거였다면, 진즉 썼을 거다. 자해보다 내가 배때기에 뚫은 구멍이 더 좋은 촉매니까.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찰라, 칙칙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어?'

연기가 엉겨 붙고, 피가 흘린 것 이상으로 퍼져나간다. 귓가에 작게 울려 퍼지는 이명은 광역 형태의 저주라는 증거다. 그것도 굉장히 고난도의.

저주와 한 가닥 연관이 있는 강령술의 달인으로서 느낄 수 있었다. 선천적 마법사로서의 감각이 필사적으로 경고를 알려온다. 막으라고. 안되면 도망치라고. 나는 우선 마법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사이보그가 대신 막는다.

방해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작전을 바꿔 사원들이 있는 족으로 날아갔다. 이제야 슬슬 높은 사람들이 왔는지, 파란 녀석과 키메라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날아가며, 파란 녀석과 키메라에게 가벼운 견제용 마법을 날렸다. 그리곤 사원들이 있는 곳에다가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요!"

모두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말대로 도망치는 이들은 없었다. 한 존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어느새 지휘체계가 잡힌 모양이다.

"지금 몰아치고 있는 상황인데 후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나 다를까 선두에 있던 존재 중 하나가 내 말에 트집을 잡았다. 아니, 트집이랄 것도 없다. 평소 때라면 타당한 의견이라 판단할만한 소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달랐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물러나요! 최소한 2~3km쯤은!"

"그럴 이유 없다!"

"알겠어요. 그럼 저하고 빠지고 싶은 존재들은 빠지겠습니다. 아이자드!"

상대방의 고집이 안타깝다. 설득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저주의 기운이 부풀어 오른다. 나는 눈보라의 정령을 안고,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몇몇 감이 좋은 존재들이 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리가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주가 유형화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양복이 있었던 자리를 중심으로 검붉은 구체가 크게 부풀어 오른 것. 얼추 1km는 될 법한 지름을 가진 그것의 모습에 나는 혀를 한번 찼다.

'운이 없으면 휩쓸리겠어.'

속도를 좀 더 올린다. 그와 동시에 검은 구체가 터졌다. 그곳에선 마치 홍수가 터진 듯, 혈액이 넘쳤다.

매우 빠르게 흐르는 액체는 내 쪽으로도 다가왔다. 아이자드가 정신력을 써서 그것을 얼려보지만, 그것도 잠시. 얼어붙은 혈액은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눈보라의 정령은 울상이 돼서 소리쳤다.

"못 막겠어!"

알고 있다. 아래에서 따라오던 존재들도 가진 기술들을 쏟아 내 봤지만, 모두 주춤거리게 할 뿐, 원천적으로 막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저주의 범위가 내 예상보다 짧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달리던 존재들이 채 휩쓸려가기 전에, 저주의 흐름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빨려 들어갔다.

아니, 빨려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빨아들였다는 게 더 어울렸다. 왜냐면 저주의 범위에 걸렸던 존재들이 혈액과 함께 끌려갔기 때문이다.

"으아아! 살려줘!"

운이 없었던 사원 하나가 혈액 속에서 허우적대며 사라졌다. 그는 여러 가지 반항을 했었지만, 소용없었다.

피가 사라진 직후. 보이는 광경은 놀랄 정도로 평화로운 형태를 되찾았다. 은근히 경사진 산맥과 군데군데 있는 나무들. 흔히 볼 법한 대한민국의 산이다. 그러나 이곳은 방금 저주가 휩쓸고 한 곳이었다.

"아이자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눈보라의 정령을 땅에 내려주고, 위로 솟구쳤다. 저주의 경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높이 오를 필요는 없었다. 저주는 눈에 확 띄는 형태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가.'

지름 1km의 거대한 피의 구체. 그것만 보자면 저주가 끝나거나, 다시 한번 피의 홍수가 펼쳐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주는 완성되었으며, 이제 결과물을 뱉어낼 거라고.

그 예측대로, 거대한 구체는 차츰 몸집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약 3m가량의 크기가 되었을 때, 터지면서 내용물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안에서 나온 형체. 그것은 거인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형태와는 많이 달랐다.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얽혀 만들어진 기괴한 오브제에 가까웠다.

팔 하나만 해도 약 다섯 정도 되는 존재가 뒤엉켜 있다. 어느 부분은 찰흙처럼 잘 주물러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었고, 어떤 부분은 또렷했다. 뭔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라서, 섞인 존재들의 형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양했다.

팔과 다리가 저 멀리 떨어져 튀어나온 존재. 얼굴만 남아 비명을 지르는 존재. 무기와 팔다리가 엉켜 들어,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 된 존재 등등. 그런 것들이 마구 뒤엉켜 거인의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키메라라고 볼 수도 없었고, 골렘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하나의 생명체라 부를 순 있었지만, 동시에 수십 개의 생명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혐오감을 느낄만한 것이었다.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다양한 소리가 들린다. 당연하다. 빨려 들어간 존재들의 대부분은 아직 살아 있었다. 형체를 잃고, 자아가 무너진 존재가 태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명은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2km 바깥에 있었지만, 그 정도 소리는 충분히 들렸다. 동시에 거인의 존재를 확인한 다른 사원들도 경악성을 토했다.

거인은 몸을 일으켜 이쪽을 보았다. 약 5m는 될 법한 거대한 형체가 그러고 있으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피하기 쉬운 자세를 취했다. 그때 거인의 입이 열렸다.

"나는 시련이도다."

[가능성을 갖춘 존재여.]

(나를 이겨라.)

-그때까지 나는 너를 쫓으리라.

거인의 목소리는 마치 산속의 메아리처럼 울렸으며, 수십 가지의 발성법과 언어를 동시에 뱉었다. 그것들이 뒤섞인 음색은 끔찍했지만, 놀랍게도 내용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나는 침음성을 삼키며 스마트 워치에 알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그와 동시에 하운드에게 현 상황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다.

"멜드멜씨. 혹시 지원받을 수 있는 강력한 존재가 있다면, 연락해 주실래요? 잘못하면 우리 둘 다 살아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이미 다들 지원요청을 했겠지만, 나만 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더 썼다. 그리곤 아이자드를 데리고서 방향을 바꿨다. 거인이 누굴 노리는지 명확해진 이상, 다른 존재들에게 신경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면 거인에게 기습할 수 있을 거란 계산에 서였다.

그리고 내가 이동함과 동시에, 거인이 발을 떼었다.

쿵!

지축이 울림과 동시에, 섞인 이들의 비명도 울려 퍼진다. 녀석은 끔찍한 비주얼과 함께, 천천히 내 뒤를 쫓았다.

'저 속도면 할만한데.'

움직이며 작성하고 있던 마법을 펼친다. 불꽃의 구체가 날아가 터진다. 속에 발화 성분을 감춰둔 그것은 거인의 표면을 맹렬하게 타들어 갔지만, 결국 약간의 화상도 입히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다만,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불이 붙은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한 존재가 미친 듯이 괴로워하다가 축 늘어진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기겁했다.

'몸에 붙은 다른 존재를 방패로 쓸 수 있는 거야? 그걸 위해서 살려둔 거고?'

한순간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애뮬릿의 정신 마법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저건 일부러 저런 거야.'

마법을 막으려면 더 좋은 방식이 있다. 굳이 이렇게 악랄하고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즉, 저것은 공격하는 존재의 양심을 찌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헛된 희망과 절망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적의 의도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을 계속 퍼부었다. 거인에 붙은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걸 무시하자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자 순간 거인의 움직임이 가속했다.

'무슨?!'

빠르게 다가와 손바닥을 휘두른다. 마치 파리라도 잡는 그 행동을 피해내자, 팔에서 붉은 액체들을 뻗어왔다. 그것을 멜드멜이 벽을 만들어 막았다.

-윽!?

그 순간 화이트 슬라임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처음이었다. 핵이 멀쩡하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그가 비명을 지른 것은. 그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접촉하면··· 안됩니다. 정신이 흔들려요. 많이 막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태가 심각하다. 나는 급가속해서 거인의 사거리에서 벗어났다. 녀석은 몸에 박힌 존재들이 저주가 적어지자, 다시 속도가 줄어든 상태였다.

'작은 마법은 쓰면 안 된다는 건가.'

녀석을 공략할 방법을 찾은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실현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마법을 쓰기 위해, 시간을 벌어줄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희망을 보았다.

스마트 워치로 휘아가 지원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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