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리 #
내가 고른 것은 천이었다.
'종이는 양이 적고, 금속은 쓰기 애매해.'
마법 종이는 분명 좋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좋다. 하지만 질 만큼이나 양도 중요한 물건이다. 스펠 북을 만들 때도 수십장을 쓴 것처럼, 한꺼번에 쓰는 것도 드물지 않다. 아니, 그편이 평범하다.
물론, 이번처럼 특수한 상황에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보다는, 확실한 마법 물품을 하나 더 만드는 게 나았다.
'금속은 결국 금속이니까. 제대로 된 마법 물품을 넣으려면 결국 보석이 필요하고, 장신구도 너무 많으면 거추장스러우니.'
그러므로 천을 택했다. 적당히 얇아 보이는 느낌이, 속에 와이셔츠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듯하다.
'마법의 충돌을 걱정해야겠지만, 나라면 상관없지.'
하운드는 손을 휘저어 나비들이 천을 가져오게 했다.
"요정이 키우던 식물로 짠 천입니다. 마법을 받아들이기 더없이 좋은 재료니, 유용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그럴게요."
나는 받은 천을 잘 챙겼다.
"그럼 볼일은 이걸로 끝인가요?"
"아, 마지막으로 드릴 게 있습니다. 아마 하연성씨 소지품으로 보여서 가져왔습니다만."
"오?!"
그가 마지막으로 챙겨준 물건은 내 가방이었다. 안을 확인하자, 빠진 물건 없이 모두 들어 있었다.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지아가 날 지키면서 그 근방을 뒤지기엔 무리였다. 그리고 사건이 끝난 후에는 다시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 반쯤 포기하고 있던 물건이 돌아왔으니, 굉장히 기뻤다.
"이번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간단하게 물건을 정리한 뒤, 오랜만의 무공, 신통력, 조련술을 점검했다. 신통력과 조련술은 문제없었는데, 무공의 경우는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휘아에게 상담하니, 단순한 연습 부족이라고. 이류의 경지에 들어섰으니, 더욱더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데드하울의 회복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 파손으로 뼛조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상점에서 팔기는 했는데, 값이 꽤 비쌌다.
'가루가 됐든, 뼛조각이 됐든 있기만 하면 마법으로 고쳐줄 수 있을 텐데.'
다만, 성능이 조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데드하울의 뼈는 '생명의 그릇'을 써서 강화한 특제라 완전히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손실된 부분에 그 기운을 나눠줄 수는 있지만, 미세한 성능 하락은 감수해야 했다.
'그다음은··· 제작 의뢰인가.'
그 외에도 악기술이나, 정령에게 내공을 주는 것, 새로 얻은 천을 마법 물품으로 만드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일 들이 있었지만, 지금 가장 먼저 할 것은 의뢰였다.
'간 손님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포인트가 풍족하다면 모를까, 지금은 부족한 상황. 이미 이틀을 허비했으니 빨리 수락하는 게 좋았다.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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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의뢰 주문
발신자 : 베그리드 뒤바르띠오
출신 : 오나리우스
종족 : 인간
의뢰 내용 : 마법 물품에 대한 상담
메시지 : 마법 물품에 대해서는 최고라고 들었네만. 꼭 이야기가 듣고 싶으니, 연락해 주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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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냥 상담인가.'
낙심했다. 물론, 상담 내용에 따라서는 값을 받을 수도 있다. 상황에 맞는 마법진은 천금보다 비쌀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매번 나오진 않을 테니, 결국 마법 물품을 만드는 게 가장 좋았다.
'무엇보다도 특기인 보석 세공을 쓸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 나한테 직접 들어온 물품 제작 의뢰는 없어. 결국, 소문을 좀 더 내야 한다는 소리니, 약간 시간 내주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유명해져서 일이 바빠지면 다르겠지만, 아직은 유명세를 키워야 할 때다. 나는 상담에 응하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얼굴을 볼 것인지 아니면 메시지로 상담할 것인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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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수신자 : 베그리드 뒤바르띠오
내용 : 직접 만나면 훨씬 좋겠네! 내 쪽에서 갈 수도 있고, 대접도 할 수 있으니, 편한 데로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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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는 집어넣고, 내용 면으로만 보면 환대받는 느낌의 메시지. 나는 집안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정돈되어 있다. 지아가 계속 정소해 주고 있기 때문에, 대접은 문제없었다.
'그럼 초대하는 쪽이 좋으려나.'
그편이 실력을 보여주기에도 좋았다.
나는 데드하울을 지하실로 잠시 보내고, 지아에게 손님이 올 거라고 말해 준 뒤,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어지더니, 메시지 한 통이 더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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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수신자 : 베그리드 뒤바르띠오
내용 : 두 명이 가도 괜찮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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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이나 두 명이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내가 가볍게 수락하자, 공간 일부분이 일렁인 후,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화려한 옷과 망토. 그리고 왕관을 걸친 건장한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마법사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둘 다 남성으로, 수염이 하얗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연세였다. 그러나 둘 다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게, 뒷방 늙은이 같진 않아 보였다.
'···둘 다 높은 사람 같아 보이네.'
예상외의 사태. 한 명은 아무리 봐도 왕이고, 다른 한 명은 마법사다. 복장으로 판단한 거긴 했지만, 거의 9할은 맞을 거라 생각된다.
덕분에 속으론 꽤 당황했지만, 이곳이 내 집임을 상기하니 평범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반갑네. 나는 베그리드 뒤바르띠오라네. 이름이 기니 베그리드라고 부르게나."
"마르비엥 로롤하이라고 합니다. 마르비엥이라 불러 주십시오."
"마법 물품 제작자 하연성입니다. ···세간에는 '용의 마법사'라 불리는 선천적 마법사입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거기서 나는 일부러 선천적 마법사임을 밝혔다. 마법사가 있다면 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비엥은 크게 놀라며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군요. 하긴 그렇지 않으면 용을 이기기엔 어렵겠지요."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나도 좀 알려주게."
"이야기가 길어지니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은 저분이 마법에 대해 굉장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맡기지."
일반적인 군신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의 신뢰 관계. 왜 두 회사원이 함께 다니는지를 단편적으로 확인하곤, 그들을 소파에 안내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고맙네."
"저는 괜찮습니다."
베그리드는 앉고, 마르비엥는 그 뒤에 섰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채로, 지아에게 음료를 받았다.
"드시면서 하세요."
"고마워요, 지아 씨."
"아, 인사를 해야 하나 보군. 고맙네."
내 모습을 보며, 똑같이 인사를 하는 왕.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화에 대해 받아들이는 게 익숙해 보인다. 아무래도 적잖은 의뢰를 해온 모양이다. 아마 경험 많고, 인맥도 많을 게 분명했다.
'그런 존재가 무슨 상담인 거지?'
나는 궁금증을 참지 않고 곧장 물었다.
"상담을 원하신다 하셨죠. 어떤 걸 물어보려고 연락해주신 건가요?"
"으음. 간단한 일일세. 최근 내 적군에 새로운 무기가 들어왔는데, 그걸로 크게 당했다네. 그래서 그 무기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정보를 얻었는데··· 우리 마법사들이 해석하는 것에 실패했네. 불가능한 일이라더군."
베그리드가 말하자, 마르비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군사 300 이상이 날아갔습니다. 그런 마법이 겨우 5초 만에 가동될 리 없지요.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300 이상이라."
마법사에겐 미안하지만, 그런 물건 만들 수 있었다. 발동 시간 5초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거기엔 조건이 하나 있었다.
"무기의 크기는 얼마 한가요?"
바로 마법진을 얼마만큼 쓸 수 있느냐는 것. 이런 내 질문에 왕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고에 따르면 좌우 면적이 10m가 넘고, 높이고 5m나 되는 물건이라더군."
"아아. 그렇군요."
그 말에 나는 적잖이 마음을 놓았다. 그 정도라면 만들고도 충분히 남을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정확한 물품의 영상은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흐음···"
뒤에 있던 마르비엥은 낮은 신음성을 내었다.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한 게 꽤 상심인 듯하다.
반면 베그리드는 무릎을 탁탁 치며 크게 웃었다.
"하핫! 역시 가능한 모양이군. 이 친구가 아는 건 많아도, 제대로 된 경험이 부족해서 말이야. 내가 말했지? 마법사를 투입해서 연구하면 뭐가 나오든 나온다고!"
마치 공돌이를 갈아버리는 듯한 발언에 신하가 말을 아꼈다. 대신 그는 나에게 질문 한 가지를 더 던졌다.
"혹시 경이 그런 물품을 만드신다면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 머릿속에서 다양한 방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마 파괴력. 즉 폭탄이나 포격과 비슷한 성질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것에 맞춰 대답해 주었다.
"하루 정도 꼬박 작업하면 되겠군요."
"···믿기 어려운 수준이로군요."
선천적 마법사라 소개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부정하지 않은 게 다행인가.'
나는 차를 한 번 더 홀짝이곤,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더 자세하게 물으실 건 있으신가요?"
"···이 이상은 맨입으론 안 될 것 같군."
'···들켰네.'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했는데, 왕의 눈에는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지. 최소한 그 무기에 대한 해결책이나 방어법이 필요하네."
"으음. 그건 실물이나 공격 장면을 봐야지 알 수 있는데요."
아무리 나라도 이야기로 듣고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들이 원하는 해결책이 '공격을 피해라'같은 게 아닌 이상,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자 베그리드는 품을 뒤져서, 작은 봉과 같은 마법 도구를 꺼냈다.
"영상이 담겨 있네. 썩 보기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한번 보고 확인해 봤으면 좋겠군."
'···수정에 비친 장면을 저장하는 마법인가.'
동영상과는 원리가 조금 달랐다. 그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이건 말 그대로 그때 일어난 모든 것을 저장하는 거다.
동영상이 사진을 찍는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면 확인할 수 없거나 흐릿해지는 데 반해, 이것은 개인의 동체 시력이 출중하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수정에 비쳐 보이는 걸 담는 거라, 화질이 썩 좋지는 않네.'
한번 확인했는데, 수정의 크기도 작아서 보기가 불편했다. 왕은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제대로 된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
'보정을 좀 해볼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어느새 다가온 지아가 물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꼬리를 살랑이는 그 모습에는 '제가 하고 싶어요!'라는 무언의 의욕이 느껴졌기에, 나는 자기도 모르게 부탁하고 말았다.
"어, 마법 종이를 한 장 가져다주시겠어요?"
"여기 있어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매에서 마법 종이를 꺼냈다. 복장이 다소곳한 단색의 개량 한복 같은 느낌이니, 부피로 볼 땐 문제가 없지만, 여태까지 아무렇게나 움직였던 걸 생각하면, 뭔가의 요술을 부린 모양이다.
"고마워요."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건가?'
속으로 그녀의 적극적인 자세의 의문을 가지며, 나는 적당한 마법진을 그린 후, 다시 한번 마법 봉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홀로그램이 뜨면서 커다란 화면이 송출된다. 수정에서 비친 그림이니만큼, 조금 삐뚤어진 곳이 있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편했다.
"오오. 멋지군."
"이런··· 걸, 그냥 이 자리에서···"
감탄하는 베그리드와 떡 벌어진 입을 감추지 못하는 마르비엥을 두고, 영상을 관람했다.
거대한 무기. 그 형태는 커다란 직사각형 두 개가 쌓아진 형태였다. 아래 것은 넓고 납작했으며, 위의 것은 너비는 작은 대신 높이가 좀 있었으며, 길었다.
얼핏 보면 대포와 비슷한 느낌의 무기. 그러나 발포를 본 순간, 나는 착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게 뭐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기에서 빛이 났으니, 뭔가가 발포되었다는 건 알겠는데, 눈에 비치는 포탄은 없었다. 효과도 직선거리에 소닉붐이 일어난 난 것 같은 게 전부. 불꽃이나 강렬한 빛 같은 건 전무했다.
'이런 마법이 있던가?'
속으로 떠올려봤지만, 전부 비효율적인 것들뿐이다. 바람을 압축해서 엄청 빠른 속도로 포탄을 날리면 되겠지만, 그럴 바에는 쇠를 날리는 게 효과적이다.
공기 저항값에서 이득을 좀 보긴 하겠지만, 그리 높진 않다. 어차피 공기가 딱딱하게 뭉쳐진 이상, 저항값은 비슷하게 받는다.
만약 이걸 순수하게 마법으로 만들었다면 적은 바보고, 아니라면 내가 잘 모르는 기술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건··· 마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마법이 아니라면 효과적인 대처법을 알려주긴 어려웠다.
'마법 종잇값이 아깝지만··· 포기해야겠네.'
뭔가를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못 하겠다고 이야기 하려는 순간.
'음?'
화면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