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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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빈은 몸을 끌듯이 움직였다. 메이르 다오프의 약을 빼앗아서 치료하긴 했지만, 온몸의 피부가 벗겨진 상처다. 전용의 치료약이 아니면 완치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의 피부는 반쯤 녹은 듯한 형태로 재생되어 있었다. 당연히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레빈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어,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 뒤를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메이르 다오프가 따라온다. 레빈의 협박. 거기에 대해 반발했다가, 얻어맞은 것이다.
물론, 만약 순순히 협력한다 해도 맞았을 것이다. 레빈은 그를 믿지 않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으니까.
따라서 그는 메이르 다오프와 종속 계약을 맺었다.
악마의 계약서에서 얻은 영감으로, 마법적 복종의 계약서를 만들어 낸 것. 하지만 어떠한 존재라도 정신 마법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이번 계약은 순조롭게 됐지만, 앞으로 주기적으로 갱신시켜줘야 한다.'
악마와 달리, 육체가 있는 메이르 다오프는 지속해서 정신 마법에 저항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 레빈은 그를 수시로 때릴 생각이었다.
'그럼 언제가 노예근성이 박혀들겠지.'
모두가 그랬다. 그의 아버지. 독점의 지배자가 다른 존재들을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같았다.
폭력, 물질, 이성(異性), 마약, 세뇌, 권력.
모든 존재가 유혹될만한 것들을 자신만 가질 수 있게 품어 놓고, 조금씩 풀어 지배한다. 레빈은 그런 방식을 아주 잘 알았다.
다만 여기서 마법적 속박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는 앞으로 메이르 다오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민하며, 질문에 답해줬다.
"오거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의 현재 목표는 하나. 도약용의 비늘이었다.
'짜증나지만 이 빌어먹을 차원을 나서려면 꼭 필요하다.'
될 수 있으면 간부인 레둘라둘의 것이 좋았지만, 오거의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들은 친위대와 비슷한 것으로, 꽤 괜찮은 물건을 가지고 다녔으니까.
참고로 메이르 다오프에게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지만, 너무 작고 위험한 1인용이었다.
"그, 그렇군요."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계약으로 정신까지 속박된 메이르 다오프는 이유조차 묻지 못했다. 그저 레빈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걸었을 뿐이다.
그러고 얼마나 걸었을까? 난데없이 대지가 흔들렸다.
우르릉.
길진 않았다. 산새들과 동물들도, 진동이 울린 후에야 다급히 도망쳤다. 즉, 자연적인 지진이 아닌, 인위적인 지진. 레빈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떠올렸다.
'레둘라둘이군.'
협회의 간부. 레둘라둘은 싸움을 좋아한다. 타고난 용력과 전설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업적과 세월을 보내오고도, 안주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싸움을 하는 건 드물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레빈으로선 자연스럽게 자신의 복수 상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죽는 것도, 이기는 것도 안 된다.'
하연성은 복수의 대상. 그리고 레둘라둘은 존재만으로 전설적인 존재다. 그 시체가 넘어가기만 해도, 하연성의 전투력은 펄쩍 뛰리라. 레빈으로서는 어느 쪽도 용납할 수 없었다.
'가서 보다가 여차하면 끼어든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판단. 그러나 레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만의 목표가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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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란 것은 본디 시간이 필요한 기술이다. 마법 물품을 둘둘 감아서 줄일 순 있지만, 없다면 꼼짝없이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그걸 마법 종이 한 장만으로 줄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해.'
그러니 다른 힘을 이용한다. 운이 좋게도 지금 거기에 맞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다. 나는 아픈 몸으로 빠르게 마법 종이를 작성했다.
'됐···다.'
억지로 쓴 마법 종이 한 장. 이제는 이것을 쓸 타이밍만 잡으면 된다.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레둘라둘에게 시선을 돌렸고.
콰아아앙!
동시에 라이오드가 한 번 더 땅에 박혔다가 뽑혔다.
"으···."
몸이 축 쳐져 있다. 팔다리와 꼬리가 경련하는 것이 보인다. 몸을 어떻게든 둥글게 말아 보지만, 조금씩 풀리는 게 보인다. 여태까지 버틴 것도 갑옷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말 튼튼하구나!"
"아주 호기로운 녀석이다! 껄껄!"
레둘라둘은 크게 웃으며 라이오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번 더 내려치기 위해, 몽둥이를 들어 올린 순간.
'지금이다.'
"위시."
나는 휘파람의 정령을 불렀다. 사고를 전달받은 정령은 자신의 힘을 가감 없이 풀어 놓았다.
쿠화악!
거센 바람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회오리처럼 몰아치다가, 이내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돌아온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니, 레둘라둘의 몸을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치는 사각형이 완성된다.
명백한 이상 현상. 그러나 나는 저 힘의 형태에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그대로 재현했구나.'
인공적인 바람. 인공적인 환경. 그 상태에서 먹은 힘을 뱉어 놓은 것이기에, 저런 형태가 나온 것이다.
'다행히 위치 정도는 움직일 수 있는 것 같고. 잘됐어!'
바람의 방은 세로로 서 있는 상태로 발현되었다. 따라서 큰 거인의 몸도 들어갔다.
"바람이 한정적이군."
"이건 또 재미있는 일을 하는구나! 껄껄!"
그 형태가 무척이나 특이했는지, 레둘라둘이 망치질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위시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유롭긴!'
명백한 공격의 징조임에도 불구하고, 레둘라둘은 빠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이해는 간다. 위시의 바람은 강했지만, 오거의 질긴 피부를 찢진 못했으니까. 그건 나도 알았다.
그러니 거기에 다른 것을 추가한다.
"아이자드."
광역 눈보라. 그것을 위시의 폭풍에 맞춰 사용한다. 바람의 사각형에 눈보라의 폭풍이 가세하자, 사각형 안에 냉기가 끊임없이 돌았다.
오직 안쪽만. 바깥으론 거의 새나가지 않는 냉기는 온도를 급속도로 떨어트렸다. 그에 레둘라둘의 피부에 얼음이 붙는 게 보였다.
동시에 내 정신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간다.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며 각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한 마법을 사용했다.
[습기와 물이 너를 숨 쉬게 하리라. -물고기의 피부-]
내 마지막 한 수. 그것은 거인의 피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거였다.
쩌적! 쩍!
"으음?"
"이건···"
냉온 속 촉촉한 피부. 그것은 당연히 빠르게 얼어붙었다. 그냥 눈이 쌓여서 온도를 빼앗는 게 아니라, 피부와 함께 동결된 것!
'저렇게 직접 얼면, 누구도 쉽게 움직일 수 없어!'
옷을 적게 입은 걸 이용한 작전! 그것은 훌륭하게 먹혀들어, 몇몇 부분을 제외한 거대한 오거의 몸 전체를 얼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꽈지직! 콰직! 후두둑!
"제법이구나."
"하지만 부족하다."
거인은 움직인다. 얼음이 부서지며 피부가 벗겨지고, 그 속에 다시 냉풍이 스며들었지만, 걸음걸이에 불안함은 없었다. 명백한 실패. 나는 이를 악물었다.
'더 어떻게 해야 하지?'
시간, 환경, 상황 등을 고려해 최대한으로 사용한 마법이다. 이 이상은 더 쓸 게 없었다. 강령술, 악마 소환술, 조련술, 그리고 무공까지. 남아 있는 건 같이 쓸 수 없었다.
"형!"
그때, 아이자드가 소리쳤다. 나와 영혼으로 연결된 눈보라의 정령은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내공을 줘보라고?'
지금 힘이 부족한 건 명백한 사실. 그러니 그것을 메우기 위해, 자연력(정령력)에 가장 가까운 내공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박이야.'
잘못하면 아이자드와 나 둘 다 위험해진다. 그런 생각을 보내자, 눈보라의 정령은 간단한 해답을 내주었다.
-아니면 형이 죽어!
'내 목숨 때문에 네 목숨도 건다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아이자드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내공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눈보라가 변했다.
휘오오!
가늘고 긴 형태의 눈보라. 여섯 갈래로 나눠진 그것은 위시가 만든 바람까지 빨아들이며, 마치 뱀처럼 레둘라둘의 몸을 휘감았다.
쩍! 쩌적!
바람이 휘감은 부위마다, 거인의 몸이 얼어붙는다. 그는 저항하듯이 몸을 움직여 얼음을 부쉈지만, 눈보라는 적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거칠고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결국.
"오오···"
"호오···"
거인을 집어삼켰다.
레둘라둘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 모습이 거대한 동상처럼, 업적을 나타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만한 적을 물리친 상징처럼.
그러나 이만한 힘을 쓴 나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몸이 무겁다.'
눈이 감기고, 정신이 조금씩 끊어졌다 돌아온다. 몸에 활력을 주던 내기는 텅 비어, 몸도 무거웠다. 상처가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거기에 아이자드의 고통이 흘러들어온다. 내공은 눈보라의 힘을 강화했지만, 그의 정체성을 흔들어 버렸다. 그 충격은 치명적인 내상과 맞먹는다. 정령이라 자연스럽게 회복은 되겠지만, 근 한 달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미안 형··· 나 돌아가서 쉴래."
"그래. 수고했어."
정신도 어지러운 상태에서 아이자드를 돌려보냈다. 레둘라둘도 완전히 얼었으니,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을 거다.
'죽이는 건 생각도 안 할 테니, 10분만 얼어 붙었···.'
빠지직.
내가 바란 것과 비교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흐르고.
동상에 금이 갔다. 조금씩 흔들리며 움직이고, 얼음 조각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크와아아아!"
"우어어어어!"
쌍두의 거인이 부활했다.
"너무하다···. 진짜로."
있는 힘 없는 힘 모조리 털어 썼다. 그런데도 겨우 몇 분이 고작이다.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레둘라둘을 쳐다보았다.
"아주 훌륭했다! 멋진 승부였다!"
"좋은 재능이다! 좋은 판단이다! 우리에게 이만한 상처를 준 그 힘! 자랑해도 좋다!"
물론, 거인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피부 곳곳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얼어붙어 중상처럼 보이는 곳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저것을 때릴 힘이 없다. 아니, 지금 이곳에 있는 존재 중, 저 거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다.
레둘라둘도 그것을 알기에, 열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칭찬했다.
"그러나 승리는 나의 것이다!"
"자비로 고통 없이 보내주마! 껄껄!"
위로 올라가는 몽둥이. 그것이 떨어졌을 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
스컥! 쿠웅!
거대한 몽둥이의 절반이 날아간다. 달려진 단면의 앞. 그곳엔 장포를 입은 40대 남성이 서 있었다.
레둘라둘의 몽둥이를 대번에 잘라버린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웃으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군. 난 회사의 '이사' 계급에 있는 청전이라네. 이래 보여도 최대한 빨리 온 거니, 용서해 주게나."
청전 이사는 너무나도 평범해 보였다. 로하드와도 달랐고, 이사급이었던 걸로 추측되던 하운드와도 달랐다.
그저 특징 없는 인간.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그가 가진 거대한 내공의 크기를. 경지의 수준을.
'아아.'
순식간에 마음이 안정되었고.
'저런 것도 있었구나.'
정보를 머릿속에 넣는 것과 동시에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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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는 오거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마음만 같아서는 연성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적당히 강하면서 많은 적이 더 성가셨다.
하지만 그 상황은 순식간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콰아아앙! 쩡! 떠덩!
갑작스럽게 전쟁이 일어났다. 지아가 놀라며 바라보니, 그곳에는 어떤 인간과 레둘라둘이 치열하게 싸우는 현장이 보였다.
'지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아직 오기로 한 시간은 좀 남았으니까. 하지만 곧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움직였다.
'빨리 오면 좋은 거지.'
그녀는 오거들이 싸움을 보며 멍해진 틈을 타, 도칸과 함께 빠졌다.
"음?! 어떻게 할 생각이오?"
"도망쳐야죠!"
현명한 판단. 오거들은 지원 온 남자와 레둘라둘이 호각으로 다투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추격해야 하는지, 도와야 하는지 판단을 못 한 것이다.
덕분에 지아는 무사히 도칸, 연성, 라이오드를 회수했다. 다만, 치료를 못 해 뉘어만 놓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실례합니다. 회사의 조사원들이시죠?"
그때. 누군가 일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30대 중반의 호감형 남성. 도칸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곧장 품속에서 약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에서 대기하고 있다 보니···. 덕분에 청전님을 빨리 안내하긴 했습니다만."
가장 경계심이 약했던 도칸 부터 치료하는 남자. 지아는 도칸의 상태가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 연성의 치료를 먼저 부탁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입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저희 임무는 끝났습니다. 뒤처리로 라이오드 부장님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에 라이오드를 뺀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지아는 연성의 상태가 심각한 걸 알았기에, 더더욱 안심했다.
"일단 급한 건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좀 더 안정을 취하며 천천히 치료하시죠."
"혹시 먼저 돌아갈 수 있나요?"
지아가 물어보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오드를 보았다. 임시 리더를 맡은 그는, 이번 일을 완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지."
"감사해요."
지아는 라이오드의 조작을 끝으로, 흐려지는 시야에 몸을 맡겼다.
그녀가 사라진 후. 라이오드는 다른 일행들을 차례차례 돌려보냈다. 그리고 치료까지 마친 끝에, 혼자 남은 그는 조용히 청전과 레둘라둘의 싸움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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