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 파견 회사-96화 (96/207)

# 대리 #

몸이 무겁다. 발목에 1kg 정도의 모래주머니를 찬 기분이다. 당장에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지속 전이 된다면 큰 방해가 될 무게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내가 원리를 이해 못 한 채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자, 레둘라둘은 껄껄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주술의 근본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확대해석(擴大解釋)이지!"

"그리고 살아 있는 전설의 발자취는 그것만으로도 신앙의 대상!"

""우리의 행동이 곧 주술이라네!""

그러면서 몽둥이를 크게 내려찍는다. 원형으로 퍼지는 충격파. 그것을 나와 지아는 간신히 피했다.

"완전 사기네."

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긴 했지만, 별로 기쁘지 않다.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응용할 수도 없으니까.

게다가 알아도 딱히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단은 만들어지는 토템을 부수는 수밖에 없나.'

나는 빠르게 토템 쪽으로 다가갔다. 이동은 문제없다. 레둘라둘은 아직 환영을 간파하지 못했다. 다만, 글자를 쓰는 순간 들킬 거다.

'그걸 예상하고 움직인다!'

파밧!

콰앙!

한 글자. 불꽃을 피워올리는 글자를 쓰곤, 온 힘을 다해 도망친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몽둥이가 토템 근처의 땅을 내리쳤다.

"음. 한 방 먹었군. 나무에도 쓸 수 있을 줄이야."

"껄껄껄! 이거 꽤 재미있구나!"

토템에 불씨가 붙어 타오르기 시작한다. 작은 불씨였지만, 나무껍질엔 수분이 적어서 어떻게든 붙은 듯하다.

그것을 레둘라둘도 보았지만, 그저 재미있다며 웃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긴 재료비용 0원에 주먹질 한방이면 완성되는 물건이다. 어떻게 취급하든 상관이 없었다.

'난 저런 거 하나 만들려면 보석 세 개는 필요한데···.'

그것도 신의 손 때문에 줄어든 게 그 정도다. 원래라면 마법 종이에 잉크까지 필요하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마법사라면, 따따블은 기본이고.

이런 상황이니, 토템을 부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하지만 그것도 조건이 맞아야 하는 일이다. 데드하울이라도 있었다면 시도해 봤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림없었다.

'우선 어떻게든 눈을 가려보자.'

나는 코트에 넣어 두었던 예비용 마법 종이를 꺼냈다.

"멜드멜씨. 마법 종이 잡아서 고정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고정? ···그렇군요. 가능합니다. 어깨에서부터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주 좋아요."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의도를 파악한 화이트 슬라임. 그의 도움을 받아 어깨에서부터 마법 종이를 고정한다. 그리고 신의 손을 펜 모양으로 줄여서 마법 문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동 작성(moving make). 보지 않고도 글자를 쓸 수 있는 내 재능과 몸과 종이를 딱 고정해 줄 수 있는 멜드멜의 합작.

즉석에서 생각한 방법으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그리고 이 모습은 레둘라둘에게도 꽤 놀라운 듯했다.

"···예전 일을 떠오르게 하는구나. 그때가 분명 15년 전의 일이었지?"

"분명 '기계 조정자(Mechanic Mediation)'가 비슷한 것을 보여줬지."

다만, 그 놀라움은 참신함이 아니라, 과거에 비슷한 것을 봤기에 그런 거였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듣곤, 혀를 찼다.

'한번 봤다면 대책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둘은 간단한 대화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때는 분명 통째로 날려버렸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피하기까지 하는군. 껄껄껄!"

그러나 다행히 무공을 익혀서 변수가 생긴 듯하다. 나는 속으로 안심해가며 최대한 많은 문자를 종이에 써넣었다.

숫자가 겨우 두 장이라, 팍팍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방만 찾으면 좋겠는데.'

아까 언덕이 부서졌을 때, 실종되어버린 가방. 그것을 아쉬워하며 최대한 많은 글자를 채워 넣는다.

그때, 느긋하게 고민하던 레둘라둘이 다시 움직였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뭉개지. 동생아."

"알고 있소. [브리느디까!]"

작은 돌멩이. 그것을 위로 던지며 라둘이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돌멩이는 순식간에 집채만 한 바위로 되었고, 거기에 라둘이 이빨을 크게 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그 위로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운다.

"[니바프씨지!] 후우욱!"

불꽃은 순식간에 거대한 불꽃이 되고, 입바람을 타며 바위를 휘감았다.

불타는 바위. 나는 재빠르게 소리쳤다.

"파편 조심!"

지아의 환영이 잠시 움찔거리더니, 빠르게 움직인다. 레둘라둘은 바위를 후려쳤다.

"흐읍!"

떠엉! 쾅!

마치 배구공처럼 날아간 그것은 순식간에 바닥에 부딪혀, 사방으로 파편을 튕겼다.

그 범위가 꽤 넓다. 어떠한 방어막도 없었던 환영들은 사방으로 튀지는 파편을 맞고 흩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위험해요!"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와 함께 끌려갔다.

쾅!

즉각적인 공격. 그것을 피하게 해준 것은 아까 같이 지아였다. 그녀는 파편을 피하고자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진짜 부끄럽다!'

두 번이나 도움을 받다니.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작성하던 마법을 마무리 지었다.

[눈가림(blind)]

강한 마법은 아니었다. 촉매로 소모할 보석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장 방해할 수 있는 것을 고른 것이다.

물론, 레둘라둘에게 커다란 장애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걸려보는군. 동생아."

"알고 있소. [띠지 따릭따프리뿌!]"

품 안에서 다른 생물의 눈을 몽둥이에 대고,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눈이 몽둥이에 붙어서 살아 있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환영인가. 이젠 귀찮구나."

"한 번에 처리해 주마! 껄껄!"

레둘라둘이 나무 두 그루를 동시에 뽑았다. 그리고 동시에 두 개를 박으며 외쳤다.

[라띠루띠아!][보딕로리우!]

한꺼번에 완성되는 두 개의 토템. 환영들은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지만, 다른 하나의 효과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없었고, 새로운 주술에 대해 모르니 재연이 불가능했으니까.

그걸 눈치챈 레둘라둘은 전투 시작 후 처음으로 화를 냈다.

"이놈들! 도망쳤구나!"

"내가 찾겠소! [누리아 로삐디아!]"

라둘이 주문을 외우니, 몽둥이의 눈이 번뜩였다. 그것은 곧 요술로 몸을 감춘 채 달아나던 우리를 발견해냈다.

"어딜 도망가느냐! 싸움의 끝은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이다!"

"전투에서 등을 보이는 건 수치다!"

그리곤 노발대발하며 쫓아온다. 지아가 그것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조금은 늦으면 안 되는 걸까요? 이래 보여도 몸을 감추는 건 자신이 있었는데요."

"그런 적이에요. 도망치는 것에 집중하죠. 요술 벗겨주세요."

그녀가 요술을 풀자, 이동하며 써 내려간 마법문 자가 나타난다. 약 20문자. 인간을 상대로라면 꽤 아픈 마법을 쓸 수 있겠지만 상대는 오거다. 크기부터 달랐다.

'방해라도 되면 좋겠는데.'

제발 당하길 바라며, 레둘라둘의 발밑에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작은 거지, 객관적으론 몇 미터가 되는 큰 구덩이였다.

"얕은 수작을 쓰는구나!"

"이런 게 통할 것 같으냐!"

콰과각!

하지만 그는 발이 빠져도 멀쩡했고, 턱에 걸린 흙을, 차서 부숴버리는 위용을 보였다. 효과가 전혀 없는 상황. 그리고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다.

쿠웅!

"흐으읍!"

"흐아압!"

거인이 뛰어올랐다. 키만 10m. 몸무게는 몇 톤인지 짐작도 안 가는 거인이 무려 자기 키만큼 뛰어올라, 몽둥이를 힘껏 뒤로 제친다.

나는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답이 없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지축이 무너졌다. 이번엔 더 크게. 고작 100m 앞서 도망치던 우리를 잡는 다기엔 너무나도 큰 일격이었다.

다만 나와 지아의 대응도 이번에는 달랐다. 각자 튀어 오른 대지 조각들을 밟고, 알아서 착지한 것. 그리고 우리는 양쪽으로 흩어졌다. 지아가 요술도 사용했기에 실질적으로 도망가는 존재들은 약 스물이었다.

그중 일곱이 추가타에 휩쓸려 사라졌다.

"도망치지 마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우타카브라!]"

라둘의 주술이 펼쳐진다. 나는 뭐가 튀어나올지 긴장하며 돌아봤으나, 나오는 건 없었다. 그건 무생물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우어어! 전사의 힘을 보여라!"

"전설을 따르라!"

"굴욕을 씻어내라!"

쾅!쾅!쾅!

어느새 다가온 세 마리의 오거! 그들의 피부에 그려진 도료가 파랗게 빛났다. 그리곤 각자 땅을 부수는 괴력으로 환영들을 제거했다.

비록 레둘라둘에 비해 미약한 힘이었지만, 각자 환영 서넛 정도를 없앨 정도는 되었다. 그러자 남은 환영은 순식간에 셋으로 줄었다.

그리고 남은 세 환영에 각각 오거 둘, 하나, 레둘라둘이 맡아, 몽둥이를 휘두른다.

참고로 나는 레둘라둘의 앞에 있었다.

'젠장! 운도 없기는!'

콰앙!

휘둘러진 몽둥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흥분해서인지 동작이 컸다는 것. 하지만 그것을 피하고 난 다음 이어진 것은, 즉각적인 공격이었다.

'못 피한다.'

자세도 불안정했고, 너무 늦었다. 맞는 것은 확정. 그럼 내 마법과 멜드멜이 지켜줄 수 있을까? 아니. 그것도 안 된다. 방법이 없다. 내 죽음은 확정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사라지는 거야? 그럼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이 확정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세계가 느려진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에서, 사고(思考)만이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엉뚱하게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지식에 대한 탐욕 때문일 수도 있고, 현실을 부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죽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내 영혼은 떠도는 걸까? 아니면 영혼들이 모이는 세계로? 정신은 어떻게 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계속된 질문으로 스스로에 대한 관조(觀照)를 펼쳐나간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아성찰(自我省察)과 같은 행위.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 앞에 놓였다는 위기가 생각을 가속하는 것뿐이다.

'나와 다른 이가 가진 영혼의 차이는 뭐지? 개성? 쌓아온 세월? 그것들이 나라고 규정될 수 있는 건가?'

의미 과포화. 흔히 게슈탈트 붕괴라고도 불리는 현상으로 인해, 나 자신을 잃어 간다. 기억이, 세월이, 개성이, 낱낱이 흩어져 각기 다른 부품으로 보였다.

'···아니. 그 모든 것과 미래가 합쳐져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영혼의 구분(區分)을 세울 수 있었으며, 그것을 외부로 표출하게 되었다. 아니. 표출했고, 그 순간 시간이 돌아왔다.

쿠웅!

레둘라둘의 몽둥이가 나를 짓누른다. 여태까지 보다는 가볍지만, 그래도 마법사 하나는 우습게 부술 수 있는 괴력이었다.

-크흑!

"꺼헉!?"

끔찍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날아가며 돌처럼 바닥을 튕긴다. 왼팔이 부러졌다. 오른 발목이 돌아갔다. 골이 욍욍 울리고, 시야가 흔들린다. 지근거리에서 터진 대지 파편 중 하나는 옆구리에 박혔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일으키지도 못해서, 쓰러진 채 생각한다. 방금 정신적 관조에서 영혼이란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힘을 펼쳤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다. 아직 혼란스러워서 정리가 안 됐다.

다만 중요한 점은 한번 살았다는 것이고, 한 번 더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몸의 일부가 날아갔습니다! 같은 방법을 써도 못 막으니, 어서 회피를!

그러나 나는 피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이번에야 죽는다는 생각과 함께, 멍하니 몽둥이를 쳐다보던 중.

"으오오오오!"

공이 날아왔다. 꽤 빠른 속도로 굴어온 그것은 레둘라둘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콰앙!

"으음."

"큼."

물론, 레둘라둘에게 큰 타격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몽둥이를 빗기게 하는 건 성공했다.

절묘한 순간에 방해를 한 공은 몸을 펼쳐 내 앞에 섰다.

"늦어서 미안하다. 바닥에 몸이 박혀 빠지질 않았다. 이젠 내가 지켜주마."

라이오드 부장. 그는 정말 믿음직스러웠다. 딱딱해 보이는 피부와 갑옷이 더할 나위 없이 멋있게 보였다. 게다가 그는 호기로운 목소리로 도발까지 했다.

"이 더러운 오거 녀석! 비겁하게 약한 마법사를 때리지 말고, 나와 싸우자!"

사실, 도발이라기엔 형편없었지만, 다행히도 레둘라둘이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이런 도전은 70년 만이구나!"

"피하지 않겠다! 어디 받아 보거라! 껄껄!"

회액! 콰아아앙!

거대한 망치질. 먼지와 충격파가 흩날린다. 나는 디가에게 질질 끌려가며, 충격파를 피했다. 그리고 먼지 속에 집중했다.

거기엔 몸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라이오드 부장이 있었다.

레둘라둘은 그런 부장을 꺼내준다. 라이오드 부장은 그제야 몸을 펴고 일어났다.

"···천산갑족은 힘에 지지 않는···"

콰아아앙!

다시 한번 몽둥이질. 다시 한번 라이로드를 꺼내는 레둘라둘. 그리고 다시 한번 망치질.

반복이다. 레둘라둘은 정말로 상대를 박살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항해서 라이오드가 잘 버티곤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죽기 일보 직전으로 보인다.

'도와줘야 해.'

눈을 돌려보니, 오거 셋은 지아와 도칸이 아슬아슬한 전투를 벌이는 상황. 부상자라고 논다면, 결국 전멸할 것이다.

'아직 오른팔은 남아 있어.'

남아 있던 마법 종이 한 장을 꺼내 글을 쓴다. 다만, 쓰는 것은 완성된 마법이 아니다. 강하게 증폭시켜주는 거다.

'아이자드. 위시.'

"형··· 괜찮아?"

그리고 나는 정령들을 소환했다. 아이자드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부탁했다.

'둘 다 힘 좀 빌려줘.'

시간이 걸리거나, 반짝이는 보석을 쓰면, 당장 레둘라둘이 공격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나는 남아 있는 마법 종이 한 장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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