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리(12/16일 전면 수정했습니다.) #
일그러진 시야가 돌아왔다. 그러자 회색빛의 방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금속과 인공적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한 곳. 주변에는 동그란 기계들이 떠서 움직이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건 미래 시대인가?'
하운드의 방에 들린 것은 이번이 총 세 번째다. 나는 그동안 겹치는 장소를 들려보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 보니, 그저 방이 많구나 하며 넘어갈 뿐이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제 생각보다는 훨씬 자주 만나서 놀랍지만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우선은 앉으시죠. 음료를 내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계들이 움직여 의자를 빼주고 차를 내왔다. 나는 앉긴 했지만, 차를 마시진 않았다. 대신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어떤 의뢰기에 저를 보자고 하신 건가요?"
"성급하시군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걸 잠시 봐주시겠습니까?"
하운드는 테이블의 어느 부분을 조작했다. 그러자 눈앞에 홀로그램이 솟아오른다. 세계지도처럼 어떠한 차원을 펼쳐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몰다륵'이란 차원입니다. 대륙 면적은 지구의 중국만 한 수준에, 다양한 소수 종족이 각자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곳이죠. 조금 낙후된 곳입니다만, 저희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곳입니다."
"몰다륵···. 그렇군요."
차원의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고민해 봐도 떠오르질 않는다. 결국, 별거 아닐 거라며 적당히 흘리곤, 지도의 모습을 살폈다.
대륙은 하나였다. 모습은 한쪽이 움푹 들어간 동전과 같은 느낌.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겠지만, 멀리 봐서는 그랬다.
"이 차원에서 문제가 생겼나요?"
"맞습니다."
그가 테이블을 몇 번 더 조작하니 띄엄띄엄 붉은색 작은 점들이 나타난다. 그 숫자는 다섯 개. 하운드는 그것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과장급 하나. 대리급 둘. 주임급 둘. 모두 이 차원에서 뽑힌, 주민들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자리라. 그 말이 꼭 실종이나 사망선고처럼 들린 건 착각일까. 확인을 위해 물었다.
"···실종인가요?"
"명백한 사망입니다. 단말기로 정보를 얻었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잠시 머릿속에 생각을 가다듬고 묻는다.
"그럼 앞으로 그 차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동이 막히나요? 직원을 더는 뽑지 않는 건가요?"
"현 상황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요."
옳은 말이다. 한번 실패했다고 그곳에 손을 뗄 수는 없으리라. 회사의 이득도 이득이거니와, 입장도 있을 테니까.
다만, 지금 불안한 점은 하운드의 말이 미래형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조사원들을 보내지 않았군요?"
"이제 막 보낼 참입니다. 인원으로는 약 다섯. 각자 한군데씩을 맡길 예정입니다."
그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분위기로 보아 나를 조사원으로 보낼 생각인가 본데, 혼자 하는 건 너무 어려웠으니까.
'뭐, 그것도 내가 맡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조사원을 맡아달라는 거였다.
"하연성씨에게는 이분. 주임급의 조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서류 하나를 건네주는 하운드. 나는 이미 맡을 생각이 없었지만, 일단 예의상 서류 정도는 보았다.
그리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서류의 첫 장. 인물설명에 붙어 있는 사진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후우."
나는 조용히 서류를 내려다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정신 보호 마법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심적 동요가 있었다. 언제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내 주변에서 발생할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고 부탁하는 건가요?"
"회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을 하연성씨에게 맡기는 이유는 마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서류를 더 보니, 사인은 마법적 요인이 높다는 게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선천적 마법사로서, 나만큼 마법에 잘 아는 존재도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내 선정 요인이라곤 할 수 없었다.
"회사에는 용족 분들도 계시지 않아요?"
인간이 나보다 더 마법에 뛰어난 존재들. 숨 쉬는 것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하운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용족이 인사사고에 움직이는 것은 부장급부터입니다."
규정인가. 하긴. 그의 계급은 주임급이었다. 만약 용족이 조사한다 하더라도 가장 나중에. 대충 하게 되리라.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 일. 냥트이족의 몰랑드옹이 죽은 일에 대한 조사를.
물론, 감정에 휘둘려 맡을 생각은 없다. 몰랑드옹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그렇다고 같이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지금 내 감정을 표현하자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돌연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과 흡사했다.
정신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라면, 절대 이성을 잃을 수준은 아니다.
"···만약 의뢰를 맡게 되면 어떤 걸 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보상도요."
그렇기에 이 의뢰와 보상에 대한 정보를 먼저 받기로 했다. 이 부분이 부실하거나 모자란다면, 과감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하운드는 거침없이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우선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같은 차원에 파견된 다른 조사원들과의 연락입니다. 인원은 의뢰를 하겠다고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어떤 존재가 죽였는가, 입니다."
그는 서류의 한 부분. 아까 나도 봤던 사인을 가리켰다.
"마법으로 죽었다고 하지만, 세상에 그런 존재는 적지 않습니다. 그 대상을 좁히는 게 이번 일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나는 손을 들어 질문을 하나 했다.
"회사 소속 여러 명이 죽었다고 하셨죠. 협회의 소행 아닌가요?"
"그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을 배제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당사자들이 '휩쓸렸을' 가능성이 있어서 말이지요."
준비된 듯한 대답. 그것을 들곤,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겼다.
"'휩쓸렸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그건 세 번째 일과 함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더 있는 모양이다. 나는 궁금증을 억누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세 번째는 죽인 이유를 찾는 겁니다. 물론, 협회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무차별적인 공격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차별적인 공격?"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는 한 번 더 테이블을 조작했다. 그러자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던 곳에서, 시간이 떠오른다.
"사망 시간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약 5~10일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 정도면 조사원을 파견해, 뭔가를 알아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의문을 품으며 바라보자, 하운드는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때, 회사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몰다륵 차원에서는 그럭저럭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각각의 차원은 사정이나 문화가 다르다. 회사의 인원들이 뛰어나다는 건 사실이지만, 죽는다고 해서 무조건 이상하게 생각할 순 없었다.
"조사가 들어간 것은 세 번째 사건부터입니다. 죽은 존재가 과장급 인원이었기 때문이죠."
과장급. 그 이름은 절대 낮지 않았다. 대리인 나보다 한 단계 윗줄인 것이다. 보진 못했지만, 최소한 숨겨진 한 수는 있었을 터. 게다가 긴급 의뢰를 신청한 기색도 없었다 한다.
"다만, 직접적인 인원을 파견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차원에 있는 존재들에게 조사 의뢰를 맡겼을 뿐이죠."
그러나 그들도 곧 죽고 말았다. 한 차원에 회사의 인원이 전부 없어진 후에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가 많이 느린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희의 고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번에는 운이 없었죠."
"그게 무슨··· 아. 그러고 보니, 한번 특별 의뢰가 몰아친 적 있었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하운드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어쨌든, 조사원들이 보내 놓은 자료가 조금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공격당한 것은 회사의 존재들이 상주하는 곳만이 아니다.'라더군요. 소문에는 다수의 몬스터에 의한 습격이라고 합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용이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보죠?"
"그걸 알아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음···"
확실히 조사 의뢰라서 그런지 정보가 좀 부실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어쩔 수 없으리라. 더 정보가 있었다면 조사원을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 보니 위험도를 잴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저울질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보상은··· 어떻게 되나요?"
"이걸 드리겠습니다."
하운드가 건넨 것은 '음유시인의 악기(樂器)술'이라 적힌 책이었다. 굉장히 두꺼운 책 세 권에, 부록도 딸린 것이 내용은 충실해 보였다.
여기에 부가 설명이 이어졌다.
"아시겠지만, 상점에서 판매되는 지식은 검열되어 있습니다. 회사의 성향과 맞지 않은 부분은 삭제되어 있고, 뇌에 부담되지 않게 단계별로 나뉘어 판매되지요. 가격이 높은 건 덤입니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사실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알고 있었다는 듯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는 기능을 쓰고 있습니다만. 하연성씨에게는 오히려 불편하겠지요. 가진 포인트를 생각하면, 단번에 너무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건 검열이 이뤄지지 않은 물건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참고로 일반적인 의뢰의 보상이 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꽤 매력적인 보상이다. 마침 조련술을 하면서 핸드벨을 익힌 상황. 거기에 음악으로 러쉬를 강화하는 기술을 떠올려 봤을 때, 이건 반드시 필요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매력적이긴 하되, 과장급이 죽는 일을 할 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그러자 이런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챘다는 듯, 하운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고로 그 물건은 회사에 소속된 몽마(夢魔)가 자신의 장기로 내 세운 기술입니다. 악기술로는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죠."
회사 소속의 작품인가. 그렇다면 그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 존재는 계급이 어떻게 되나요?"
"과거 상무이사까지 갔던 존재입니다. 지금은 부장으로 강등당했습니다만."
나는 잠시 침묵했다. 눈앞의 하운드 부장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보상은 확실하군요."
로하드의 합체 수준의 기술이라면,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로써 모든 패는 확인했다. 나는 얻은 정보로 머릿속으로 조합하곤,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할게요."
아슬아슬하지만 리스크보다 보상이 크다는 생각. 그리고 상대가 마법을 썼다면, 못해도 빠져나올 수는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조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다섯 군데가 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임시 리더가 깐깐하긴 합니다만, 일 처리는 수준급이니 같이 잘 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시작은 언제부터 하면 되나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몇 가지 조건이나 이야기를 더 나누곤, 최종적으로 회사 시스템으로 의뢰를 받아 수락했다.
종류는 특별 의뢰였으며, 의뢰 해결 횟수와 포인트는 따로 지급되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거래할 수 없는, 음유시인의 악기술은 선지급 받았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끝으로 하운드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집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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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양복을 마치 평상복처럼 입고 있는 남자. 레빈은 어두운 장소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지?"
그는 어떤 차원에 반쯤 갇혀있는 신세였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검은 돌. '도약용(跳躍龍)의 비늘'을 레비린토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일이 있어서, 어린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거였다.
"젠장! 그 빌어먹을 녀석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다니!"
레빈은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존재. 하연성을 떠올렸다. 그 녀석 때문에 치욕스럽게 보호받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이젠 더 이상 안 진다."
그 후로 절치부심 실력을 갈고닦았다. 협회의 인원 중, 하연성을 잘 알거나 당한 녀석들을 끌어모아 파티까지 만든 상태였다. 물론 레빈의 마음속으론 혼자 싸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설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무기··· 빌어먹을. 그딴 녀석이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실력이 아닌 장비의 차이. 그는 저번의 패배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해결방법을 찾아 장비를 구해봤지만, 질적인 차이를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별수 없이 다른 존재들의 힘을 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이런 곳에 처박혀 있으라니!"
"우어어···"
그는 발에 걸리는 것을 힘껏 찼다. 그러자 차인 생명체가 몸을 뒤튼다. 7m가 넘어가는 거체. 팔뚝이 건장한 사람의 몸을 뛰어넘으며, 그 자리에서 통나무를 뽑아 한 손으로 휘두른다는 대형 몬스터.
오거(Ogre)는 남자에게 얻어맞고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릴 뿐, 뭐라 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한 입 거리도 안 될 인간이, 왕의 손님으로 온 존재였기 때문이다.
"흐. 어린아이가 쓸데없이 성을 내고 있군."
"어리군 어려."
"···제길."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말투. 레빈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표출하진 못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협회의 간부를 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꽤 까칠한 질문을 던졌다.
"레둘라둘님은 언제까지 이런 작은 차원에 있을 겁니까?"
"이곳의 시간은 빠르지. 그러니 느긋해도 괜찮다."
"부수고, 씹고, 즐기고.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렇군요."
'느긋해서 좋겠구나, 이 늙은아!'
그는 속으로 욕하면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것이냐?"
"어린아이는 갈 때 허락을 받고 가야지. 하하핫!"
레빈은 한차례 이를 갈았다. 협회의 간부라면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였지만,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정말 폭발할 것 같아서였다.
"···산책입니다."
그 한마디를 내뱉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바깥에서 적당히 스트레스 해소나 하고 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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