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리 #
유적의 안쪽은 길지 않았다. 개중 특별히 둘러볼 곳이라고는, 리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큰 홀 같은 곳이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리치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 전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한쪽 구석에 수련장 비슷한 곳이 있소."
"망자들의 갑옷과 무기는 이 대장간에서 만든 것 같다."
"이건 함정과 키메라를 만든 흔적 같은데?"
망자들을 일으키기만 하는 일반적인 리치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모습. 만약 힘을 회복한 채, 바깥으로 나갔다면 어마어마한 재앙이 됐을 거다.
"그걸 우리가 막은 것이오."
단순히 유적을 파헤치러 왔다가 얻은 업적.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계속해서 홀을 뒤졌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마구니로드와 보디의 능력까지 사용해서 철저하게 뒤진 결과 다양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다.
"보석, 유골함, 사기에 물든 금속에 책까지··· 여러 가지가 있구려. 그러나···"
"으음. 생명의 그릇(life vessel)은 찾지 못했다."
생명의 그릇. 리치의 근원이며 불사(不死)를 이루게 해주는 마법 물품.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결국엔 찾을 수 없었다.
"말투나 준비를 봤을 때, 틀림없이 이곳이 맞을 거 같은데."
"반드시 찾아야 해요. 그런 사악한 존재가 다시 살아나게 할 수는 없어요."
"일족을 부르고, 인간들을 고용해, 이 일대를 전부 부숴서라도 찾겠다."
"···부탁드릴게요."
노아가 리치의 타도를 외쳤지만, 그녀도 다른 생활이 있는 몸이다. 결국 생명의 그릇을 찾는 일은 이 차원의 주민인 마구니로드가 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그 후, 벌어진 것은 전리품에 대한 분배였다. 우리는 마법 물품에 대한 것은 빼고, 잡다한 것을 먼저 나눴다.
"난 돈이 필요해. 보석을 받고 싶은데."
각자 물건을 챙겼다. 보디는 보석과 귀금속을. 사기에 물든 금속은 흥미가 있다며 마구니 로드가. 마지막으로 골동품처럼 보이는 유골함은 내 차지가 되었다.
"유골함은 어디에 쓸 건가요?"
한눈에 봐도 꽤 꺼림칙한 물건을 가져간다고 하자, 노아가 날카롭게 쏘아보며 묻는다. 여기에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인 중에 이런 걸 좋아하는 분이 있으시거든요. 포인트랑 바꿀 수 있을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다. 이 유골함은 학자인 버드릭에게 충분히 팔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물론 촉매로 쓸 예정이니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노아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변명거리로는 충분했다.
"···정말인가요."
"지인분께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괜한 의심을 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신관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이쪽에서 당당하게 밀어붙인 결과. 노아의 의심에서 벗어난 나는, 당당하게 유골함을 챙겼다.
"다음은 마법 물품인가."
일행들의 시선이 몇 개의 물건에 쏟아진다. 이것들은 내가 마법 물품이라고 감정을 내린 것들. 즉, 여태까지 물건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이었다.
"마법사가 먼저 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더. 마구니로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으음. 미로에서도 그렇고, 빠르게 키메라를 처리 한 것이며, 리치와 홀로 싸우고, 마지막엔 지원군과 함께 처치하기까지. 그 공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오."
도칸의 중얼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나로서는 꽤 기쁜 이야기였다. 마법 물품 중에서는 내게 필요한 게 하나 있었으니까.
"책을 가져갈게요. 강령술의 약점을 좀 연구해 봐야겠어요."
모두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적당한 변명을 해며 검은 표지의 책을 두 권 가져왔다.
사실 이 책 자체는 마법 물품이 아니다. 그러나 원래 지식이 담긴 책은 값이 좀 나가는 편이고, 회사의 상점에서는 이상하게 책값이 높아서 마법 물품 수준으로 판정된 것이다.
'가격에는 짐작 가는 게 있지만.'
그 부분은 굳이 파고들 필요가 없어 보이니 넘어가자.
"···이걸로 분배는 끝이다. 혹시 불만 있는 존재가 있나?"
"···"
"그럼 계단 입구에서 의뢰를 끝내자."
다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마법 물품을 손에 쥔 후. 우리는 필요 없는 물건을 두었던 계단 입구로 가서 짐을 회수했다. 그리고 마구니로드의 작별인사를 끝으로, 의뢰 완료를 해주기 시작했다.
"아. 마구니로드. 저는 나중에 해주시겠어요? 아래에 있던 죽음의 기사와 키메라의 시체를 연구하다가 가야겠어요."
"알겠다. 끝나고 메시지를 보내주면 그때 의뢰를 완료해주겠다."
"고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구니로드가 미궁 바깥을 헤쳐 나갔다. 망자들에게 얻은 금속들과 생명의 그릇 수색을 위해, 미로의 지도를 만든다는 모양이었다.
"이제 모두가 갔는데···"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방긋방긋 웃고 있는 여자 마법사가 눈에 들어온다.
"레인은 왜 안 가요?"
"그럼 너는 왜 안 가는 거야?"
"방금 들었잖아요. 연구하고 간다고."
"그럼 나도 같이 갈게."
"···노아씨가 기다리지 않나요?"
"우리 안 붙어 있어. 게다가 시간도 비고."
찰떡같이 붙어 있겠다는 발언.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목적이 뭐예요?"
"다들 피곤해서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너 꽤 티가 났거든. 찾은 거지? 생명의 그릇."
"···하아."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무래도 생명의 그릇을 이야기할 때, 조용히 시선을 피한 게 들킨 모양이다.
"맞아요. 중간에 있을 법한 곳을 찾았어요."
일행들과 함께 유적 구석구석 뒤질 때,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했지만 고의로 속여 넘겼다.
그 이유는 당연히 생명의 그릇이 탐났기 때문.
'쓸데가 아주 많은 물건이니까.'
리치의 사기, 정신력, 영혼 등이 섞여 담겨 있는 물건, 덕분에 리치와의 대화는 물론, 강력한 촉매로서도 쓸 수 있는 게 바로 생명의 그릇이다.
그러나 그건 강령술사인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
일반 마법사인 레인이 원할 이유가 없었다.
"레인에겐 필요 없잖아요."
"네 말대로야. 생명의 그릇은 필요 없지. 다만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혹시 운이 좋다면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녀의 목적은 정말로 그게 전부인 듯하다. 하긴 그녀의 입장과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생명의 그릇을 가져가는 것은 어려우리라.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 리치 협박하는 것 좀 도와줘요."
"물론이지."
간단한 조건을 걸고서.
유적 안. 리치가 있는 곳은 그리 엄중하게 가려지진 않았다.
"여기야?"
"네. 정확히는 이 책장 뒤에 마법진이죠."
그러나 소리로 벽 두께를 알 수 있는 마구니로드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각종 마법으로 떡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 감지 회피, 등. 탐지의 모든 것을 피하는 마법이 전부 사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마법진의 크기와 사용되는 촉매가 거대해졌고, 내가 그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좀 더 효율적으로 썼으면 작아서 못 봤을 텐데.'
제작자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마법진을 파기. 촉매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마법이 전부 사라져 평범해진 문을 열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작은 방. 안에서 비통한 리치의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500년 동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장소이거늘!
그곳 한가운데엔 사기를 내뿜는 작은 항아리가 있었다. 그 옆에서 반쯤 만들어진 해골을 보아, 우리가 찾고 있는 생명의 그릇임이 확실했다.
나는 우선 신의 손으로 반쯤 만들어진 해골부터 부수며 답했다.
"500년이나 썼으면 들킬 때도 됐네요."
-크아아악!
성의 없는 대꾸와 해골이 부서지는 이중 충격에 리치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한차례 파르르 진동한 생명의 그릇에서 조금 떨어진 채 관찰했다.
"왜 그래? 뭐 있어?"
"만지거나 충격을 주면 발동하는 저주가 걸려있네요. 뭐, 이 정도는 예상했지만요."
신의 손에서 봉황 촉매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저주의 마법진에 몇 번 문지르니, 마법 문자가 뒤틀리고 엉망이 된다. 저주는 그걸로 파기. 이제 생명의 그릇은 그냥 리치의 사기와 영혼, 정신 등을 담아 놓은 튼튼한 그릇이 되고 말았다.
-대체··· 대체 네놈은 정체가 뭐냐. 바깥의 마법은 그렇다 쳐도, 그릇의 저주는 용도 파기하지 못할 정도의 것인데!
생명의 그릇이 흔들리며, 혼란과 공포가 섞인 리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방금 그 저주는 사기보다는 혼과 정신력이 더 많이 섞인. 강령술을 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 자란 마룡이 온다고 해도, 저주가 있다는 걸 파악하는 게 고작이리라. 용은 귀차니즘으로 강령술을 배울 리가 없으니, 확신할 수 있다.
다만, 리치에겐 안타깝게도 나는 용을 뛰어넘는 마법진의 지식과 꽤 높은 수준의 강령술을 다루는 실력자였다.
덕분에 최후 방어선까지 부서진 리치는 무언가 탁 내려놓은 듯,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내 최후가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이건 기회인가?'
죽음을 생각하는 리치. 그것을 보고 있나니, 어쩌면 손쉽게 지식을 빼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해준다면 그냥 두고 갈 수도 있는데."
살며시 던져 놓는 유혹. 그러나 리치는 내 서투른 사탕발림에 넘어갈 존재가 아니었다.
-어리석긴. 네놈의 영창 파기로 보아, 강령술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 그렇다면 이 생명의 그릇에 얼마만 한 가치가 있을지도 잘 알 텐데, 놓쳐줄 이유가 없지 않나.
-오히려 이쪽에서 제안하마. 내 부활과 힘의 회복. 왕국의 재건을 도와라. 그럼 지식은 물론, 오른팔로 삼아주겠다.
명확한 핵심 찌르기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반격. 도무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 노련한 협상에, 나는 눈빛으로 옆의 레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불꽃 하나를 만들어 협박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소멸할 텐데?"
-그렇게 하라! 나 오르네리아 4세. 불로불사를 위해 강령술을 배우고 리치가 되었으나, 단 한 번도 무릎 꿇은 적 없다! 자존심을 파느니 소멸하겠다!
쓸데없는 높은 자존심! 나는 리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곳이 어디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왕의 무덤이라고 했었지.'
일반적인 리치는 영생을 위해 뭐든 하는 존재이지만, 이 오르네리아 4세는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직접 지식을 얻는 걸 포기했다.
나는 상점에서 적당한 천 하나를 사서, 마법 잉크와 보석 촉매를 이용해 사기와 의사전달(telepathy)을 막는 마법진을 그렸다. 그걸로 생명의 그릇을 싸곤, 가방에 잘 넣었다.
"아아. 아깝네. 뭔가 얻을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레인이 아쉬운 듯, 바닥을 발로 툭툭 찬다. 나 또한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다른 방법. 생명의 그릇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고민하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사용하는 게 좋아.'
생명의 그릇은 오래 놔두며 천천히 쓸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봉인해도, 안에 있는 리치가 소멸하지 않으니, 결국엔 사기를 이용해서 풀어낼 것이다.
그러다가 자칫 지구에서 부활이라도 하면, 어마어마한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
'장기 의뢰를 받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쓰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최소한 죽음의 기사. 그에 준하는 존재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싶었다.
'한동안은 장기 의뢰는 피하면 되겠지. 내 실력이면 최소 한 달은 멀쩡할 거야.'
나는 일단 판단을 보류한 채, 마구니로드에게 의뢰 완료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다음에 보자. 혹시 리치가 뭔가를 말해주면, 나도 알려줘야 해."
"그래요. 다음에 봐요."
마찬가지로 노아에게 메시지를 보낸 레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짐을 정리하고, 피 묻은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따듯한 물로 몸을 씻은 뒤, 맛있는 밥과 따듯한 잠자리에서 휴식을 취했다.
자고 일어난 후에는 심법과 좁은 방에서 접사창법의 임시 수련. 그 후에는 이번에 얻은 책을 살폈다.
'인형술의 기초. 강령술에 활용되는 연금술.'
두 가지 모두 예상외의 기술들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인형술을 먼저 보고 싶지만···.'
참자. 새로운 기술은 원래 기술을 완벽하게 만든 뒤 익히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인형술의 기초'을 치워놓고, '강령술에 활용되는 연금술'을 먼저 펼쳤다.
그러자 연금술 레시피가 나온다.
"훌륭해!"
책의 내용은 단순히 키메라를 만들 때 쓰는 연금술의 레시피뿐이었다. 효과는 쓰여 있었지만, 어떻게 사용, 적용하는지에 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충분하다. 내 머릿속, 강령술에 비어 있던 지식이 연금술로 인해 차곡차곡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팔락, 팔락, 팔락!
빠르게 책장을 넘긴다. 지식이 들어올수록, 내 머릿속에 강령술이란 것이 정리되어 간다. 세계의 일부분. 마법으로 인해 끝의 편린을 보았던 부분이 넓어졌다.
그리고 책을 모두 읽었을 때.
"아아."
나는 강령술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