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 파견 회사-30화 (30/207)

# 사원 #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자마자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전보다 더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한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한기 속을 그냥 버틸 생각이 없었다.

[안과 바깥을 자른다. 둘은 서로 분리되니, 양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 -단열(insulation)-]

냉기에서 버틸 수 있도록 일부터 만들어온 두루마리를 찢었다. 루비를 세 개가 써서 만든 마법이니만큼, 못해도 한나절 이상은 지속될 것이다.

"···빨리 왔네."

마법이 발동되자마자 눈보라의 정령이 나를 발견하고 찾아왔다. 그는 무심하게 중얼거렸지만, 눈에서 약간의 기대감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식물을 보여주러 온 거야?"

"네. 모든 준비가 끝났거든요."

순간, 정령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그 반짝임은 사라지고 의심과 불신만이 가득 차오른다.

"여태껏 추위에 강한 식물들을 보여준 존재들은 있어. 이곳에 키워보려 한 존재들도. 전부 실패했고."

"전에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명성 높은 존재나, 무수한 세월을 보낸 존재도 하지 못한 일이야. 그런데도 넌 할 수 있다는 거야?"

부정적인 말투로 묻는 눈보라의 정령.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 잘 보고 계세요."

그리곤 곧장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물건 꺼내 들었다. 그것은 내 다리 길이만 한 쇠파이프 형태의 원통이었다.

그것을 쥐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동물 한 마리 살지 않는 산에서 녹색 식물을 키우기 위한 마법. 그 시작은 이 원통이었다.

'이번엔 마법진이 작지 않다. 펜으로 그리는 건 어림도 없어.'

마법진은 마법 문자를 엮어 만들어낸 기적이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만능은 아니다. 상황과 대상, 마법 수준에 따라 적당한 형태와 걸맞은 선의 굵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적정선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선천적 마법사. 이번에 사용할 마법으론 최소 손가락 두 개 수준의 굵은 선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그리는 도구를 만드는 것만 해도 투자는 필수. 이 원통에 들어간 액체가 얼지 않고 규칙적이며, 균등하게 떨어지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한쪽에서부터 사용한다.

그러자 원통 안쪽에서 휘발유가 떨어진다. 눈 위에 살포시 떨어진 그것은 그대로 얼어붙으며 흔적을 남겼다. 그 상태로 원통을 움직이자, 균일한 선이 생긴다.

그 선은 이윽고 문자가 되어 눈밭을 채워간다.

선의 굵기가 굵기인 만큼, 한 글자의 크기도 평소 때와는 다르게 커다랗다. 그것을 빠르고 신속하게 써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헝클어지지 않았나 주의 깊게 살피고, 혹여 발자국이 마법 문자를 훼손하지 않는가도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반경 10m 크기의 마법진. 그것을 보며 나는 작은 한숨을 뱉었다.

"끝난 거야?"

옆에서 눈보라의 정령이 다가와 물었다. 무언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희미한 기대감이 비쳐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겨우 한걸음 떼었을 뿐이다.

"이제부터입니다."

눈앞의 마법진은 마법 잉크 같은 역할을 위해 만든 거다. 이제부턴 이걸로 잉크를 대신할 것을 만들 거다.

나는 각종 보석을 용암의 정령에게서 얻은 촉매와 함께 배치했다. 그리곤 시동어를 외운다.

[유지하며, 고정되고, 규칙에 따라 흘러라. -정지된 불꽃의 흐름-]

그러자 촉매들이 마법진에 녹아들며, 기름을 녹이고 불을 붙였다.

한주먹 높이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바닥을 녹이지 않았고, 주변으로 번지거나 눈보라에 의해서 꺼지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마법진이 그려진 선 안에서만 타올랐다.

"불은 좋아하지 않는데."

옆에서 눈보라의 정령이 투덜댄다. 그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반응이기에, 가볍게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용도로만 쓰고 끌 겁니다."

"불꽃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어떻게"

"이렇게요."

나는 원통으로 마법진의 끄트머리에서 바깥을 향해, 선을 그었다. 그러자 불꽃이 그 선을 따라 흘러나온다. 그렇게 눈밭 위에 글자를 쓰니, 불로 된 글자가 하나 탄생했다.

눈보라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제대로 된 마법이구나."

"이런 마법은 보신 적 없으신가요?"

"내 앞에서 불꽃으로 그림을 그리는 존재는 못 봤어. 심지어 마법을 펼치지 못하는 존재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환경 때문에 제대로 된 화염 마법을 본 적 없는 듯하다.

조금 호기심 어린 느낌으로 불꽃을 보는 눈보라의 정령. 그 모습을 보고 있나니, 이제야 그가 사람의 모습을 취한 정령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호언장담했다.

"정말 마법다운 마법을 보여드리죠."

선을 긋는다. 그 뒤를 불길이 따른다. 나는 때로 보석을 던지거나, 시동어를 외웠다. 그러자 불길은 물길로 변하고, 그것이 또 다른 잉크가 되어 선을 따라 흐른다.

다시 한번 마법진을 그리며 시동어를 외치자, 이번엔 물줄기가 얼어붙는다. 그것은 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내 선을 뒤쫓아가며 흔적을 남겼다.

얼음으로 그린 마법진이 완성되고 한 번 더 시동어를 외자, 이번엔 불줄기와 물줄기, 얼음이 섞여 흐른다. 서로 섞일 수 없는 요소들이 하나 되어 흐르는 것을 잉크 삼아, 마법진을 그린다.

다만, 이번 것은 전에 그린 세 개의 마법진을 아우르는 크기다. 삼각형 위치로 자리 잡은 마법진을 엮어 가며, 거대하고 화려하며 신비한 문자를 써 내려간다.

때로는 불, 때로는 물, 때로는 얼음이 되는 잉크를 세심히 다뤄가며 만들어지는 마법진. 그것이 어느새인가 그 크기가 1km에 달했을 때.

나는 겨우 마법진을 완성했다.

"허억-. 허억-."

걸린 시간만 해도 장장 9시간. 마법진을 그리는 도중 간단한 씹을 거리와 마실 거리 외에는 입에 넣지도 않은 채, 마법진만을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은 복합진(複合陣).

마법진이 마법진을 만들고, 마법진 속에 마법진이 구성되어 부속품처럼 연결된, 다수의 마법진이 얽히고설킨 대마법.

총 47개의 마법진이 연결된 초대형 작품이 내 결과물이었다.

털썩.

'지친다.'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배 속이 빈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신력의 피로가 월등했다. 지금 당장 자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 그러나 아직 마무리가 남았다.

'숲의 정령이 준 촉매.'

그것을 마법인 가장 한 가운데 놓는다. 그리곤 시동어를 외웠다.

[-순리대로 흘러갈지어다-]

그저 짧은 한마디. 이미 속에 구성된 마법진들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축약. 숲의 정령이 준 촉매가 마법진에 녹아 들어간다. 그리고 불길이 열기 없는 쇳물 같은 느낌으로 변하자, 모든 마법이 끝이 났다.

"···이게 다 된 거야?"

어느새 다가온 눈보라의 정령이 묻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성입니다."

하지만 내 말에도 눈보라의 정령은 표정을 피지 못했다.

"저기, 네가 어떤 걸 한지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그냥 거대한 마법진 뿐이야. 식물은 대체 어디 있어?"

아아. 과연 그런 거였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져온 배낭에서 씨앗들을 꺼냈다.

다양한 종류가 섞인 꽃씨들. 나는 그것을 마법진 위에 흩뿌렸다. 각가지 모양의 작은 씨앗들은 제멋대로 흩날려 눈밭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꽃들이 만개(滿開)했다.

종류도 색깔도 뒤섞여 멋스러운 느낌은 좀 떨어졌지만, 눈 위에 핀 꽃들은 그런 걸 잊게 해줄 장관이었다. 주변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한풍이 불고 있었지만, 꽃들은 하늘하늘 몸을 흔들 뿐 꺾이지 않았다.

차가운 눈이 꽃잎과 이파리에 쌓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으며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와아···!"

그 신비한 광경에, 감정 표현이 적었던 눈보라의 정령도 놀라 감탄을 토하고 말았다.

"자, 정령님도 해봐요."

눈보라의 정령에게 장갑과 씨앗을 건넸다. 장갑을 끼고 씨앗이 죽지 않도록 냉기를 최대한 억누른 정령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뿌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 식물이 자라난다.

나무의 씨앗은 몸을 키워 뿌리를 깊게 박아 푸른 잎을 피웠고, 꽃과 풀의 씨앗은 눈과 섞여 자라났다.

"아하하!"

그 광경에 신이 난 눈보라의 정령이 마구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가져온 씨앗을 몽땅 넘기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할 일을 덜었네.'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지쳐서 씨앗 뿌리는 건 귀찮았는데, 다행히 눈보라의 정령은 즐겁게 일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마치 이불빨래를 아이들한테 밟으면서 놀라고 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씨앗 뿌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 어느 순간 정령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아···"

망연한 얼굴로 씨앗 주머니를 털어보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뿐. 어느새 씨앗이 동나고 만 것이다. 정령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눈밭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더 심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맞는 말이다. 식물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마법 효과는 아직 30분은 더 간다. 하지만 나는 고의로 일정 지역만 심을 수 있을 정도의 씨앗만 가져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은 것은 천천히 길러 보시죠."

"···어떻게?"

"이 식물들에서요."

나는 눈밭에서 당당히 서 있는 식물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눈보라의 정령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곤충이 없으면 식물은 번식하지 못해."

지당한 말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허술한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

"이곳 식물들을 바람에 맞춰, 꽃가루를 날릴 겁니다. 확률은 무척 낮긴 하지만, 4~5개 정도의 씨앗을 만들 수는 있을 거예요."

일반적인 식물의 생태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씨앗의 개수다. 하지만 이곳은 문제없었다. 씨앗들은 멀리 날아갈 필요도 없었으며, 마법진 안에 떨어지기만 하면 자랄 수 있다.

또한, 어린 싹이 상할 이유도 없으니, 씨앗이 적다 한들 문제 되는 것은 없었다.

"그것들은 천천히 커갈 거예요. 그걸 보는 것도 꽤 즐거우실 겁니다."

"···이곳에서 식물이 자란다고···?"

정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식물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약 20m 가량의 구역만이 정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식물들은 자라고, 성장하며, 퍼져나갈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눈보라의 정령은 멍하니 정원을 보았다.

"한번··· 만져 봐도 될까?"

조용히 조건 중의 하나를 말한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되어 있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를 뽑지만 않으시면 문제없어요."

마법의 효과는 마법진과 닿아 있어야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말을 이해한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곤, 가장 큰 나무에 먼저 손을 대었다.

"···와아···"

원래라면 서리가 껴야 정상일 식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령은 신기한 듯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나무를 훑다가, 괜찮다는 것을 느끼곤 손바닥을 대었고, 이내 나무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얼음이 아니야···"

눈보라의 정령. 뭐든 만지는 것을 얼려버릴 정도의 냉기를 지닌 존재로서, 그가 만져본 감촉이라곤 차갑고 딱딱한 얼음이 전부였을 터.

그런 존재에게 식물의 감촉이란 생소하기 그지없는 감각일 것이다.

"까칠까칠해! 그리고 따듯하고, 단단하면서 물렁물렁해!"

감촉과 강도, 재질을 즐기며 눈보라의 정령이 기쁘게 소리쳤다. 그 모습에는 어느새 냉랭함은 사라지고, 겉모습의 맞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이 복합진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내 한계를 끌어냈다는 말은 사실이니까.

"저기, 이 마법진 얼마나 오래 가는 거야!?"

한창 기쁨을 누리던 정령이, 퍼뜩 생각난 듯 물어왔다. 나는 만족스러워할 만한 대답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사실을 말해주었다.

"한 500년 정도는 문제없을 거예요."

보증기간 500년. 마법진의 수명으로서는 획기적인 기간. 사실 촉매를 일반적인 형태로 활용하면 결코 이런 기간이 나올 수 없었다. 나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다수의 마법진이 엮인 복합진의 형태. 이건 그냥 마법의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게 아니다. 에너지의 순환을 위해서 만들어진 형태였다.

'이게 힘들었지.'

이 복합진 위에서 자라난 식물들은 물과, 햇빛, 그리고 숲의 정령이 준 촉매에서 힘을 받아 성장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하면 얼음이 되어 잘게 부서져 마법진을 타고 흐른다. 그러다가 용암의 정령이 준 촉매에 닿으면, 그것은 곧 촉매의 연료가 된다.

이건 식물이 환원하는 방식을 마법으로 강제 재현한 형태였다.

식물이 성장하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다시 식물의 원동력이 되는 자연의 섭리. 나는 그것을 최대한 닮은 방식으로 재현시켰다.

그 결과가 이 복합진.

500년의 시간 동안 아무런 간섭 없이도 스스로 순환하는 마법. 그리고 사실상 짧은 수명을 가진, 작은 세계라 봐도 무방한 걸작이었다.

"500년··· 그리 길진 않구나···"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세월도 눈보라의 정령이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면 별로 긴 세월이 아니다. 나는 아쉬워하는 눈보라의 정령에게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마법진의 원리나 발동 방식, 수리 방법 등에 대해서 적어 드릴게요. 나중에 마법사들에게 의뢰를 넣으세요. 그럼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해결되자, 눈보라의 정령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갑작스럽게 말했다.

"나랑 계약하자."

"···네?"

생각지 못한 제안에,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이중적으로 충격받았다.

"형이 마음에 들어. 계약하고 싶어."

성별이 헷갈린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남성체였을 줄이야! 거기에 고위 정령이 먼저 계약을 요청해 오기까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내 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좋아요."

서로의 동의. 인간과 자연의 태생인 정령이 서로의 영혼을 묶는 것에 합의한 순간, 계약이 성립된다.

그리고 나는 신세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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