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원 #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는 식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점에서 나온 식물들조차, 조금 추운 곳에서 자라는 게 전부였을 뿐. 게다가 그런 식물들은 대부분 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해, 앙상한 나뭇가지 정도만 자라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눈보라의 정령이 사는 그곳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영양분부터 풍부해야겠지.'
먹어야 힘이 나는 건 모든 생물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식물의 먹잇감을 될 영양분을 공급하는 환경이었다.
'물을 안정적으로 마실 수 있는 환경과, 햇빛을 받을 수 있어야 해.'
다행히 그 부분은 어렵지 않았다. 눈보라의 정령이 있는 곳은 물이 굉장히 풍부한 곳이었으니까. 햇빛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눈이 계속 오긴 했지만, 해가 뜬 상태에서 내렸으니까.
'그럼 우선 물 부분을 해결해보자.'
나는 됩짓에게 얻은 보석 주머니를 뒤져서 적당한 품질의 루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딱 좋겠어.'
그곳에서 물을 공급하는 방법은 눈을 녹이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나 이때, 화력이 너무 강하면 바닥처럼 다져진 얼음도 녹아내릴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온도의 열을 넓게 퍼트리는 게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어중간한 순도의 루비가 제격이었다.
'일단 물은 간단히 해결됐는데···'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은 만들었다. 그렇다면 다음으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을 만족시키고 싶다.
'그렇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뿌리겠지.'
식물이 영양분을 받아들이는 장소. 그러나 그 혹한의 땅에서는 뿌리를 파고들어봤자, 있는 것은 얼음뿐. 몸을 단단하게 지탱해줄 흙은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야 있을지 알 수 없다.
상황을 바꾸고 싶어도, 바닥이 얼음인 것은 환경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식물을 바꿔보면 어떨까.
'뿌리로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몸을 지탱하는 용도로만 쓴다면?'
그냥 얼음 덩어리를 붙잡기만 하는 용도. 딱딱하게 굳은 얼음을 단순히 붙잡는 용도라면 그리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다. 물론 냉기에 얼어붙은 뿌리가 부서질 수도 있겠지만, 나무의 크기를 줄인다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의 최대치를 5m로 고정하자. 그리고 뿌리는 키만큼만 들어가는 거로 하고.'
한번 성장해 고정된 뿌리는 영양분을 거의 차지하지 않게 한다. 마치 사람의 손톱이나 발톱처럼, 죽어 있는 세포가 딱딱하게 붙어 있는 느낌으로. 그러면 몸을 지탱하기엔 충분하리라.
다음은 영양분을 받는 장소. 이것은 지면 근처에 뿌리 하나를 두어, 물길을 만들면 괜찮을 것이다.
'이러면 일단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완성이야.'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아마 간신히 자라는 게 고작이겠지.'
최대치를 5m로 맞춰 놓았지만, 실상은 3m만 자라도 잘 큰 게 되리라. 식물이 크게 움트기 위해서는 힘이 모자라다. 그건 마법진만으로 이루어내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강력한 촉매가 될 것이다.
'식물에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성질의 촉매가 필요해.'
그리고 마침 나는 그 촉매를 구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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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종류 : 사내 의뢰 - 일반
장소 : 프리디아
종족 : 정령
의뢰자 : 숲의 정령
직급 : 사원
의뢰 내용 : 고블린 처치.
설명 : 숲에 들어와 자연을 해치는 고블린들을 처리
조건 : 자연의 손상이 적은 형태로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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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촉매를 얻을 장소를 살필 때 찾았던 의뢰. 처음엔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의뢰였지만, 지금은 두 번째가 되었다.
'아직 뭔가를 죽인 적은 없어서 꺼림칙하지만.'
언제까지 살생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회사 의뢰의 60% 가량이 살생이 필요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겨우 고블린이잖아. 행운이라 생각하자.'
고블린이라 하면, 판타지 소설에서 최약체로 꼽히는 단골 아니던가. 아마 정령이 폭력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의뢰가 나왔을 뿐, 처치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겠지만.'
나는 혹시나 모를 서바이벌 사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먹을 것과 마실 것, 조금 두꺼운 옷과 담요를 챙겼다. 그곳에서 쓸 마법 종이와 보석, 그리고 잉크와 펜은 필수로 가진 상태였다.
'조금 무게가 나가지만, 문제 있을 정도는 아니야.'
이래 보여도 백팩 하나에 다 들어간 데다가, 군장과 비교하면 무거운 축에 끼지도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등산복과 운동화를 신은 뒤, 의뢰를 수락했다.
[그- 대- 는- 누- 구- 인- 가-.]
시야가 돌아온 직후,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말한 사람을 찾기 위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은 온통 울창한 숲뿐. 별다른 생명체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아무 방향에 대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의뢰를 받고 온 하연성이라고 합니다!"
[의- 뢰-.]
마치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되새기는 목소리. 그리고 다음에 들려온 것은 분노 섞인 외침이었다.
[기-생-충- 같-은- 고-블-린-들-을- 잡-아-주-러- 왔-는-가-!]
아무래도 정령은 고블린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인 듯하다.
"맞습니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몸-속-에- 고-블-린-이- 있-다-!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다-오-!]
고블린이 몸속에 있다고?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번 더 물었다.
"몸속이라면 어디인가요?"
[몸-속-은- 몸-속-이-지-. 너-도- 몸-속-에- 있-지- 않-더-냐-. 그-들-이- 날- 부-수-고- 파-먹-으-며- 자-리-잡-는- 것-이- 싫-다-. 어-서- 처-리-해-다-오-.]
"나도 몸속에 있다고?"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수풀이 우거진 숲은 우리나라의 산과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다. 모든 식물이 최소 내 무릎까지는 오고, 흙은 부드러운 데다 덥고 습했다. 나는 이 기후에 대해서 한마디로 설명할 단어를 알고 있었다.
'열대우림.'
지구에서도 있는 환경. 그리고 어느 정도 예측한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숲의 정령이 말한 자신의 몸이란 게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머릿속으로 말이 전달되는지도.
'숲 전체가 정령의 몸이구나.'
말 그대로 가장 정령다운 모습을 한 숲의 정령. 왜 그가 고블린을 기생충이라 표현했는지도 이젠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 고블린을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나는 결국 한 번 더 정령을 불러야 했다.
"정령님, 고블린은 제가 있는 위치에서 어디에 있는 건가요?"
[까-다-롭-군-!]
약간의 짜증 섞인 음색과 함께, 식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몸을 기울여서, 한 방향에 길을 만들어 내었다.
[빨-리- 처-리-해-다-오-!]
"알겠습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정작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나는 이곳에 처음 온데다가, 생각보다 환경이 고블린 쪽으로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꽤 무서운데?'
적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 예상보다 강렬했다. 그러고 보면 당장 쓸 수 있는 두루마리도 저번에 만들어둔 신경 마비 마법밖에 없었다.
고블린을 몰래 살펴보고 상황에 따른 마법을 만들려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꽤 어리석은 생각이다.
'리브뤼엣때와 다르게 회사 기능으로 도망치면 안 되니까.'
그때는 출퇴근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쓰면 의뢰 실패다. 그런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고블린을 찾는 마법 같은 걸 만들어 볼까? 아니, 그래도 이동하는 걸 지속해서 찾으려면 촉매가 꽤 많이 들어갈 텐데. 뭔가 좀 더 넓게 시야를 볼 수 있는 게 있었으면··· 아, 맞다!'
거기까지 생각하곤, 나는 내 머리를 치고 말았다.
'위시하고 흙먼지가 활약하기 딱 좋은 곳이잖아!'
멍청하게도 좋은 무기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곧장 위시와 흙먼지를 소환해, 일정이상 크기의 생물을 발견하면 연락하게 하곤, 될 수 있는 한 떨어져 빙글빙글 돌게 했다.
그 거리가 약 반지름으로 20m.
내가 모르게 고블린이 접근한다 하더라도, 최소 20m 바깥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안심감을 주었다. 그리고 공포감이 사라지자 진행 속도는 전과 다르게 빨라졌다.
그리고 운 좋게도 고블린을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놔!"
"누가, 누가 제발 살려줘!"
다만,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사람?'
내가 먼저 눈치챈 것은 사람의 소리로 들리는 비명이었다. 깎아지듯 떨어지는 절벽 아래. 약 30m가량의 높이와 50m는 됨직한 거리에서 고블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길제길제길!"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싫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검을 들고, 가죽 갑옷 같이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가 발악하듯 외친다. 그 뒤에는 하얀 옷과 짧은 지팡이처럼 생긴 것을 든 여성과 활을 쏘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고블린들은 흔히 판타지에서 표현하는 모습과 같았다. 녹색 피부에 작고 못생겼으며, 귀와 코가 길쭉한 데다 입이 쭉 찢어진 모습.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모습의 작은 괴물들이 얼추 50이 넘게 있었다.
형세는 고블린들이 많은 숫자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었다.
'제길! 다른 사람이 있을 거란 소리는 없었잖아!'
예측하지 못한 상황. 나는 곧장 마법 종이 한 장과 펜, 잉크를 꺼내 들었다.
'조건은 자연을 해치지 않을 것,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할 것. 고블린들을 내쫓거나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세 가지 조건 중에 맞는 마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용할 마법을 떠올린 나는, 곧장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흐아앗!"
"꺄아악!"
챙! 챙!
귓가에는 비명과 쇳소리가 들렸지만, 지금만큼은 잊어버리고 집중한다. 필요한 건 정확도와 속도.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말자. 최선을 다해 팔을 놀린다. 최고급 마법 종이라서 울퉁불퉁한 바닥에서도 거의 빳빳이 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됐다.'
작성 시간은 5분. 내가 생각해도 뭔가 굉장히 빠른 느낌으로 만들어낸 마법을 곧장 사용했다.
"식물의 옭아매기(plant entangle)"
에메랄드 하나가 소모된 마법이 펼쳐지자, 갑작스럽게 자라난 식물이 고블린들을 얽어맸다. 녀석들은 꽥꽥대며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지만, 식물의 손길을 벗어 날 수는 없었다.
"!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식물이 고블린만 공격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곧장 길을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안돼! 리엔느가!"
다만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안쪽을 가리키며 다른 둘의 옷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나머지 둘도 망설이는 표정이 되어 발걸음을 멈춘다. 아마 마법이 얼마나 갈지 고민하는 거겠지.
하지만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3분이면 사라진다! 빨리 도망쳐!"
결국, 내가 그들에게 상황을 외쳤다. 목소리를 들은 셋은 움찔하더니, 검을 든 남자가 입술을 깨물곤 흰옷의 여자를 낚아채며 달려나갔다.
"안돼! 리엔느! 리엔느!"
애처롭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흰옷의 여성. 그 눈길을 더듬어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이 한 명 더 보인다.
손에 장갑처럼 보이는 물건을 끼고 있는 여성.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욱!"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 사람이 세 조각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명확하게 확인한 나는, 곧장 자리를 떴다.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위치를 들킨 것도 있었지만, 시체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리고 방금 장면으로 인해 깨달았다. 회사의 의뢰 중에서는 명백하게 위험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저 괴물들은 인간을 죽이고 뜯어먹는 존재들이란 것을.
"우웨엑!"
고블린이 발견된 곳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나무 하나를 붙잡고 속을 게워냈다. 그러나 곧장 위시를 이용해 냄새를 막고, 입속을 헹궜다.
'토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충격받았다고 속을 계속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인간은 아니더라도 늑대가 죽는 것은 한번 보지 않았던가.
나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사물의 냄새가 있으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론 고블린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다양한 마법들을 떠올리고 지웠으며, 비틀어갔다.
머릿속에 무언가를 죽이는 게 꺼려지는 감각은 어느새 사라졌다. 사람을 먹는 괴물 앞에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먹혀도 이상하지 않아.'
이곳에서는 당연한 상식. 그러나 나에게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마주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머릿속에 넣어둔 무의식적인 윤리관을 벗어 던졌다.
'효율. 효율만 생각하자.'
어떤 덫을 쓰든 간에 숲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효율적으로 고블린을 죽이자. 그 말을 머릿속에 되뇌면서, 계속 마법을 생각했다.
회사 Tip
정령의 직명(title)에 대하여.
정령들이 힘의 크기와 특징으로 불리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정령을 어떻게 부르는지 알기만 해도, 그 힘의 측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령의 척도가 오직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정령들의 경우, 형태와 힘이 다른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백곡류(百曲流) 강'의 정령이 있다고 치자. 그럼 이 정령은 '폭포'과 비교하면 어떨까?
일반적으로 강의 힘은 폭포를 이기기 어렵다. 그러나 백곡류라는 자연적 특징과 내력이 붙으면서 일반적인 '폭포'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앞에 붙은 수식어, '백곡류' 같은 경우를 직명(title)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직명은 자연계 정령에게만 붙는 게 아니라, 정령계의 정령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자연계 특징이 아닌, 정령계의 특징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