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 파견 회사-25화 (25/207)

# 사원 #

시야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새하얀 눈밭과 천천히 떨어지는 눈이었다. 그리고.

"추, 추워!"

순식간에 몰려드는 추위!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눈, 코, 입에서 깨질듯한 냉기가 몰려들었다.

'얼굴에 서리가 끼는 추위가 이런 건가!'

외국의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종종 본 적 있던, 사람 얼굴에 서리가 끼는 장면. 보면서 막연히 춥겠다고 생각만 했던 상황이 실시간으로 내게 닥쳐오고 있었다!

발도 허벅지까지 묻혀서 그야말로 한발 떼기가 어려울 지경.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일하러 왔다. 눈보라의 정령을 만나지도 못한다면 의뢰는 당연히 실패로 끝날 터. 그럼 위약금 포인트를 지불해야 한다.

'그건 안되지.'

순식간에 뻣뻣해진 몸을 이끌고 주변을 살폈다. 의뢰인과 바로 옆은 아니라도, 대부분은 근처에 떨어졌던 걸 생각하면 이 주변에 정령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령 추정되는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

약 10m 정도 떨어진 곳.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두꺼운 털옷을 입긴 했지만, 그래 봤자 점퍼 같은 느낌으로 대충 걸친 형태다. 지퍼를 잠그지도 않았고, 모자를 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다리 부분은 꽤 얇아 보이는 바지다.

마치 패션처럼 겨울옷을 걸친 것 같은 모양새. 나는 그 사람이 정령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정령이겠지?'

사실 정령을 외모로 판단하는 건 성급한 일이다. 객체마다 그 모습이 천차만별이라, 다른 생물의 모습을 따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 곳. 계속 눈이 떨어지는 이곳에, 저런 옷차림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가보자.'

거의 확신을 담고,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곳을 헤쳤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피부와 금발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게 보인다. 그 모습에 나는 이 사람이 정령임을 확실시했다.

고글 주변에도 서리가 끼기 시작하는데, 머리카락이 얼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나는 덜덜 떨리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누, 눈보라, 정령님이신가요?"

"...회사 사람?"

정령은 흘깃 이쪽을 보곤, 작게 말을 흘린다. 내 질문이 씹히긴 했지만, 이야기가 짧아지는 건 환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아. 시, 식물을 보여드리러... 와, 왔어요."

"보여줘."

가벼운 말투. 게다가 보여 달라고는 했지만, 딱히 기대하는 눈치 같아 보이진 않는다. 눈보라의 정령이라서 성격도 차가운 걸까? 속으로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몸은 곧장 카메라를 꺼냈다.

'설마 안 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너무 추워서 기계가 오작동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순식간에 얼어붙는 건 아닌 모양. 조금 소리가 커진 느낌이 있었지만, 카메라는 문제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마법.

눈밭 위에 나무와 풀들이 비춰졌다. 하얀 도와지에 그림을 그리듯, 눈밭을 가리는 식물들. 거기에 향기와 흙도 뿌리자, 마치 진짜로 주변에 식물들이 자란 듯한 모습이 되었다.

시각과 후각, 이 두 가지의 자극에 눈보라의 정령도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뭔가 좀 더 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저 내가 만든 환영들을 조용히 바라만 보는 게 전부. 오히려 내 쪽에서 뻘쭘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마, 마음에, 안 드시나요?"

"마음에 들어."

정령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정령의 겉모습이란, 개성과 성격의 표현이다. 어떤 모습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이, 한 가지를 정한 것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형태가 인간이라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터. 가시지 않은 의문에,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원하시는, 모습이신가요?"

정령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푸르고 맑은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냉랭함을 느낀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답을 바라듯이 눈을 마주쳤다.

그런 내 모습에 정령이 무언가 결정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지고 싶어."

그리고 굉장히 곤란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고 싶어.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으니, 나무가 여기서 자라고 그 밑에서 앉고 싶어. 꽃이 잔뜩 자라서 옹기종기 피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것들을 쓰다듬어 보고 싶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그건 분명히 눈보라의 정령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어 물었다.

"왜, 의뢰는, 보는 것만 하셨나요?"

이렇게 상세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의뢰 내용엔 '보고 싶다'가 아니라 다른 표현이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포기했어."

그건 단순히 내려놓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싫지만 억지로 단념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나는 세월을 살아왔어. 그동안 무수한 존재들에게 이 부탁을 해왔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식물들을 봐왔어. 어떤 이는 살아있는 식물을 가져왔고, 어떤 이는 이것처럼 환영을 보여줬지. 하지만 그 누구도 내 주변에서 식물을 자라게 하지는 못했어."

이곳은 어마어마한 추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아마 사람이 얇은 옷을 입는다면 그대로 저체온증에 걸려, 수십 분 내에 사망할 정도의 온도다.

이런 곳에서 식물이 자랄 수 있을까? 그 답은 허허벌판인 주변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구에서도 1년 내내 눈이 오는 곳에는 식물이 자라지 못해.'

그 어떤 곳도 춥기만 하지는 않다. 때로는 따듯한 빛이 들어야, 식물이든 뭐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저 혹한만이 있는 곳에는 죽음뿐. 이건 자연의 섭리다.

게다가.

"한번 만져주시겠어요?"

내가 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정령에게 건넨다. 그리고 정령의 손에 닿은 물건은 하얗게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이 추위에서도 더 떨어질 온도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광경. 이 눈보라의 정령은 얼핏 보면 사람 같지만, 내용물까지 같은 건 아니다. 즉, 이 정령의 내용물은 극한의 눈보라가 뭉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주변보다 더 낮은 온도의 몸을 가져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식물을 만지기 위해서는 최악이다.

'식물을 얼려 죽이고 싶지는 않겠지.'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도 했다. 아마 이 정령이 바라는 것은 자신이 만져도 멀쩡하게 자라는 그건 녀석일 터.

그렇다면 조건은 더더욱 까다로워진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가능한 걸까?'

일단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상점에서 검색해본다. 그러자 눈 속에서도 자란다는 식물이 몇 개 떠오른다.

혹시 이 중에 해결책이 있진 않을까? 나는 목록에 떠오른 것 중, 가장 추위에 강해 보이는 것을 뽑아 물어보았다.

"빙설초, 아시나요?"

"알아. 어떤 존재가 가져온 적 있어. 하지만 그거 여기선 못 자라. 흙이 저 밑에 있거든. 그 위는 전부 단단한 얼음이야."

그러고 보니 의뢰에 만년설이라 쓰여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냥 상징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면 실제로 그 시간 동안 눈이 쌓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안쪽은 눈의 무게로 인해 딱딱하기 그지없는 얼음이 되었을 터. 상점의 물품에선 흙 없이도 자라는 식물은 없었으니, 상점의 물건으로 해결된 일은 아닌 듯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상점 물품으로 끝나는 일이, 오랜 세월이 걸쳐 안 깨졌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 일은 긴 세월 동안 회사에서도 제대로 해결한 이가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일에 대한 의심이 덜컥 몰려온다.

'이거 불가능한 거 아니야?'

회사에는 무수한 종류의 존재들이 몰려든다. 분명 그중에는 나 같은 선천적 마법사도 있었을 테고, 인간 이상의 존재들도 즐비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이 정령을 만족시킨 이들은 없었다.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이 솟구치지만, 우선 방법을 찾는다.

'식물에 냉기를 부여해 볼까? 아냐. 그건 빙설초랑 다를 게 없어. 내성도 마찬가지일 테고. 애초에 흙과 물이 제대로 없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 있기는 한가?'

여러 가지 예를 떠올려가며 상황에 맞춰보지만,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이리저리 꼬아도,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이 지형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 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눈보라의 정령이 이곳에 있는 이상, 지형을 바꿀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불가능해.'

포기하자. 이럴 때도 있는 법이다. 마법이 거의 만능이라 하지만, 완벽한 능력은 아니니까. 촉매가 없으면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제한이 있듯이, 무언가의 한계가 있고 끝이 있는 학문이다.

그러니 이 일은 이쯤 하자. 다행히 정령도 환각을 보곤 조금은 만족한 모습이다. 아마 여기까지만 해도 별 3개에서 4개는 무난히 받을 수 있으리라.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정령에게 의뢰가 끝났다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머릿속에 한마디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냐.'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 내가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할 수 없는 게 더 많았다. 당장 조련사 기술만 봐도 쓸 수 없지 않았던가.

물론 마법으로 변형하면 비슷하게는 쓸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래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조련사의 기술에 다른 신호가 들어간 것은, 그것이 더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마법으로 그것을 흉내 낸다 한들, 완벽하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순 없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머릿속의 울림은 끊이질 않는다. 계속해서 그 소리를 듣자, 어느 순간부터 마치 억지를 부리는 듯한 느낌까지 들기 시작한다.

그러자 문뜩 의문이 솟아오른다. 미래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걸까? 그냥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었다면, 곧바로 마법부터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말을 했기 때문에 정령술을 먼저 배웠고, 마법이 그다음이었다.

비록 배운 정령술을 유용하게 쓰긴 했지만, 솔직히 그거 굳이 배울 필요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의 의미라도 있던가.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모르겠다. 미래의 내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사실 마법도 재능이 있어서 남들이 못하는 것을 했을 뿐이다. 그 정도 할 줄 안다고 해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울리는 이 목소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래의 나는 정말로 내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정령술도, 조련사의 기술도, 그 외 수많은 다른 것들을 할 수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걸까?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한번 믿어보자. 마침 적당하게도 내 눈앞엔 훌륭한 벽이 있다. 이걸 마법으로 부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끝을 펼쳐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서 가능성이 떠올랐다.

'가능할까?'

희미하게 떠오른 방법.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모든 걸 걸어볼 수밖에 없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모르는 사이 꽤 오랫동안 이곳에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품에 넣어둔 핫 팩이 어느새 식었을 정도이니,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몸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정령을 보며 말했다.

"한 번 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눈보라의 정령은 조용히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금 환영에게 눈길을 주며, 묵묵히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해."

"고맙, 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곧장 집으로 이동했다.

시야가 방으로 변한 직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었다.

'이미 차가워져서 의미가 없어.'

많은 사람이 쉽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두꺼운 털옷이 열을 낸다고 믿는 거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온의 효과지, 솜이나 털 자제가 열을 발산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두 가지. 열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와, 열이 빠져나가지 않게 할 따듯한 이불 같은 거다.

'일단 이불부터!'

옷을 벗어 던지고 바로 이불을 꺼내 둘렀다. 분명 식었을 이불이지만, 내 몸이 너무 차가워서 그마저도 따듯하게 느껴진다.

다음으론 전기렌지. 빨갛게 빛나며 열을 내는 그것에 천천히 손을 데우며,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팔팔 끓는 물을 적당한 통에 넣어서, 심장부터 천천히 열을 퍼트려 나갔다. 그걸 몇 개 정도 만들어서 이불에 적당히 품고, 집 한구석에 자리 잡아 몸을 녹이는 데 집중했다.

그러길 약 20분. 뭔가 몸이 뻣뻣하긴 하지만, 다행히 어디 한군데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다음에 갈 때는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어.'

나는 다음에 들릴 때를 생각하며 스마트 워치를 켰다. 그리고 다른 의뢰 중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혹한 속에서도 자랄 수 있는 진짜 식물들을 가지고 말이지.'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마법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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