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원 #
나와 레시는 퇴근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것 참 웃기네요. 적들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 여유롭게 움직인다니."
"호위인 제가 안전을 보장하죠."
"그거, 제 두루마리가 뭔지 듣고 결정하신 거 아닌가요?"
"이런 들켰군요!"
시잖은 잡담을 하며 여유롭게 길을 걷길 얼마간. 어느새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기습해오면 대처할 수 없으니까."
"···걱정 마요, 선셋. 적들이 상당히 자신만만해 있거든요."
"그게 무슨···"
레시는 말과 동시에 한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두운 골목길 안. 무언가가 꾸물대는 것이 보인다.
저벅. 저벅. 기척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발소리. 레시는 조용히 활을 당겨,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쏘았다.
"엇차!"
땅!
그러나 들린 소리는 금속성. 화살이 막힌 명백한 증거에 나와 레시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골목길 안쪽의 사람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호위가 여자라길래 가볍게 봤는데, 꽤 실력이 있는 활잡이일세?"
약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온몸을 가린 철갑옷과 내 팔뚝만 한 대검을 어깨에 걸친 그는, 껄렁한 자세로 우리를 보며 물었다.
"리브뤼엣 공장에서 일하는 마법사하고, 고용된 호위 맞지? 아, 대답 안 해도 돼.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 너희를 처리하고, 아니면 한 번 더 하지 뭐."
경박한 웃음과 가벼운 태도. 게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다. 일반적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선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미친놈이라던데. 조심 좀 해야겠다.'
그리곤 슬금슬금 나타난 검은 복장의 남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원거리 공격이 주특기인 레시에겐, 그들의 포위망이 부담스럽겠지만,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경계하느라 그것을 막지 못했다.
"아저씨가 기사인가 보군요?"
"기사 말고 이런 갑옷을 입고 다니는 녀석이 어디 있어. 자유 기사인 엔틀이다. 내 고용주가 널 좀 납치해 달래서, 몸소 와줬으니 고마워하라고."
"···그거 참 정말 정말 고맙네요."
비꼬듯이 말한 내 대답에, 그는 씨익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래. 잘 알았으면, 얌전히 항복하는 게 어때? 기사 앞에서 마법사와 활잡이라니.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는 건 알잖아?"
몰갓의 상식에 따르면 그게 정상이긴 하다. 하지만 나와 레시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들. 상식 밖의 존재이며, 대책까지 세워 놓은 우리가 남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거절할게요."
"잘 생각해 보라고. 일만 하면 삼시 세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고. 아, 혹시 옆에 여자 때문에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내 밑에 깔려서 애교만 부리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으니까. 어때? 매력적이잖아?"
방금 그 발언으로 남자의 성향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리브뤼엣이 자유 기사는 규율을 버티지 못하고 나온 녀석들이라 하더니, 저 남자는 하반신 관리가 안 된 모양이다.
"선셋. 저 남자가 뭐라 지껄이는 거죠?"
레시는 번역 도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말을 짤막하게 번역해주었다.
"저한텐 노예 직위를, 레시한텐 애첩 자리를 제안하네요."
"Fuck you!!"
번역되지 않은 욕설. 그녀는 가운뎃손가락과 함께, 격렬한 거부 반응을 표출했다. 그리고 곧장 엔틀에게 화살을 쏘았다.
"어이쿠! 이거 위험하잖아."
"Shut up!"
엔틀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 화살을 쳐 날렸다. 레시는 그런 그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텐데, 닥치라는 말과 함께 화살을 계속 날렸다.
한발. 한발.
빠른 속도로 화살이 날아갔지만, 엔틀은 능숙하게 쳐내거나 막으며 레시와의 거리를 좁혔다.
"하! 아주 앙칼지구만! 나중에 깔려서 앙앙대는 게 아주 기대되는걸!"
한 발짝, 두 발짝. 한발 또 한발.
둘의 거리가 좁혀든다. 그는 징그러운 미소를 진하게 지었다.
"붙잡으면 어떻게 해줄까? 여기서 시작할까? 아니면 거리로 좀 나갈까? 어느 쪽이 취향인지 말만 해!"
한 발짝, 두 발짝. 한발, 그리고 두발.
"···앙?"
단번에 쏘아진 두 개의 화살 중 하나는 떨어졌지만, 한발의 화살은 엔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미간을 꿰뚫었을 위치. 아깝게 빗나간 회심의 공격에 레시가 혀를 찼다.
"머리에 박을 구멍을 만들어 주려 했는데!"
머리에 뭘 박나요? 지금 이 아가씨가, 조금 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눈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궁금하다. 이게 원래 그녀의 성격인 걸까?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영업 정신이 아닐 수 없다.
"핫."
잠시 멈춰있던 엔틀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자세를 바꾼다. 전에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건들댔다면, 이번에는 양손으로 검을 잡아 제대로 자세를 취한다.
"이거 예상치도 못한 재미가 있겠는걸? 어디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그 말에 레시가 한 번 더 활시위를 당긴 순간. 엔틀이 발을 디뎠고, 그의 몸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읏?!"
5m는 있음 직한 거리가 단박에 줄어들었다. 레시는 빠르게 화살을 쏘았지만, 엔틀이 몸을 비틀자 갑옷에 튕겨 나간다. 바짝 붙은 거리. 검을 휘두르면 끝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강철 구두로 레시의 정강이를 힘껏 찼을 뿐이다.
"날 너무 얕봤어!"
하지만 레시도 만만치는 않았다. 엔틀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그의 가슴을 박차고 공중제비를 돌아, 거리를 벌린 것. 그러나 둘의 표정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었다.
'레시가 밀려.'
방금의 공방. 엔틀이 레시를 죽이려 했다면, 끝났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가 자신의 하반신을 위해 움직였기 때문. 저 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혀를 한번 찼다.
'예상보다 기사의 능력이 더 높네.'
사실 거리를 벌릴 수 있다면, 레시에게도 승산이 있다. 하지만 엔틀이 거리를 순식간에 줄인 기술을 가졌으니, 그 방법은 요원했다.
'검무(劍舞, sword dance)라고 했던가?'
부르는 방법은 각자 다양한 것 같았지만, 회사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것 모양이다. 나는 어제 상점에서 찾은 내용을 떠올렸다.
'기사가 특정 동작을 취하는 걸로, 폭발적인 움직임을 발휘하는 기술.'
내가 아는 판타지와는 전혀 딴판인 기술이다. 이쪽은 '내 오러를 받아라!' 하면 '난 오러 블레이드다!' 하면서, '경지'와 '마나'의 양으로 수학 공식처럼 딱딱 승패가 결정되던데.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그렇게 쉽게 돌아가진 않을 모양이다.
'몰갓의 검무는 빠름에 특징을 뒀어.'
이곳은 마법사가 득세하는 세계. 기사가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서 마법사를 먼저 죽이는 것밖엔 없었다. 따라서 이곳의 검무는 오로지 속도에 맞춰져 있었다.
원거리 공격을 특기로 하는 레시에게도 그리 좋지는 않은 상황.
실제로 지금 그녀와 엔틀의 공방은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호위도 곧 쓰러질 것 같은데, 얌전하게 항복하는 게 어때, 형씨."
그러자 주변을 포위하고만 있던 남자들도 슬금슬금 움직인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서워서 가까이 오지도 못 하면서 입만 사셨네요."
그들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분노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크로스백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치자, 남자들이 혼비백산했다.
"무, 무슨 마법이지?!"
"몰라! 일단 엎드려!"
'무슨 수류탄이라도 본 것처럼 행동하네.'
뭐, 따져보면 저들에겐 비슷한 물건이긴 하겠다. 나는 엎드린 그들을 무시한 채, 레시를 보며 외쳤다.
"도와줄게요!"
그리고 두루마리를 찢으려는 순간, 눈앞에 엔튼이 나타났다.
"아-. 이 자식이. 한창 기분 좋을 때 망치지 말라고."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검. 그래도 죽일 의도는 없는지 방향은 내 팔을 향했지만, 위험한 공격이란 건 다름이 없었다.
'빠르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몸부림친다. 눈과 정신은 어떻게든 따라가는 것 같은데, 몸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팔이 검에 잘리기 직전이 되었을 때.
파라락!
대비해 좋은 수가 펼쳐졌다.
엔틀의 눈앞에 떠오르는 두루마리. 특정 조건으로 발동되게 해 놓은 기능이 정확하게 발현된 순간이었다.
"!?"
빛을 내며 발동하는 마법진의 모습에 엔틀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마법이 어떤 건지 모르는 이상, 직격당하는 건 위험했으니까. 그게 공격형 마법이 꽤 많은 이 몰갓 차원이라면 더더욱.
나랑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아주 당연한 행동. 그러나 그것은 내 함정에 제대로 걸리는 행위였다.
*
'이게 뭐야?'
마법을 피하고자, 회피용 검무까지 사용했던 엔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시야가 차단되었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 봐도, 먹물처럼 검게 칠해진 짙은 안개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는 방금 터진 마법이 눈을 가리는 마법이었다고 확신하며, 혀를 한번 찼다.
'쳇! 잔재주를 부리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부상에 가깝다. 그는 마법사의 손을 베어버렸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재빨리 청각에 집중했다.
보이지 않는 시각을 대신해, 임시방편이나마 써보려는 생각에서였다.
'환영 마법에 대비해 청각은 단련해 두었어.'
환영은 마법사들이 기사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방법. 그것에 대비해, 귀로 상황을 파악하는 훈련은 기사에게 필수 항목이었다. 물론 환영은 일부를 구분해야 하는 상황이고, 지금은 전부를 파악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멍청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리지 않는다.'
남들이 다 조용히 있어도, 자신의 갑옷 소리는 들려야 했다. 그러나 몸을 비틀어도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마비되었다는 것.
'빌어먹을 마법사 놈이!'
엔틀은 이를 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발의 늘씬한 외국 미녀를 품을 기대감에 가득 찼던 흥분이 분노로 바뀐다.
차라리 대놓고 싸워 졌다면 속이라도 시원하겠건만, 그건 그것도 아니니 짜증만 치밀어 오른다.
그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꺼번에 처리해주마."
기사가 다양한 방법으로 무력화되었을 때, 최후의 발악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는 검무들이 몇 개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의 주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있었다.
물론 이걸 사용하면 마법사가 죽겠지만, 이젠 알 바 아니다. 이대로 있으면 그가 당할지 모른다. 마법사에 대한 건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집은 어떻게든 살겠지.'
싸워보니 몸놀림이 꽤 날렵하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녀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의 효과가 떨어진 후엔, 그가 사로잡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엔틀은 정해진 동작을 취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몇천 번 몇만 번 연습해서 몸에 익힌 동작들. 눈 감고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움직였고.
당연하다는 듯 미끄러졌다.
"···엉?"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자신의 몸이 바닥을 구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짚었고, 다시 한번 미끄러졌다.
"이···게···"
그제서야 엔튼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졌으며, 청각이 막히고, 바닥에 미끄러지는 현상. 시야를 가린 걸 빼면, 다들 애들 장난에나 이용될 법한 마법들이다. 그러나 그 마법 세 개가 합쳐지자, 20년을 단련한 기사가 무력화되었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어설 수조차 없는 바닥에서, 물고기처럼 퍼덕이며 분노를 토했다.
회사 Tip.
검무에 대하여.
검무란 사람이 특정 행동을 취함으로써 특정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이는 몸으로 발휘하는 마법이라 할 수 있으며, 사용자가 '효과' '동작' '발현 의지'를 정확하게 표출했을 때 발휘된다.
그 기능은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몸으로 가능한 행동밖에 하지 못한다는 제한이 있다. 즉, 오러를 뿜는다거나, 검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육체의 피로와 정신력의 피로가 동시에 쌓이니, 막 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