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300화 (300/309)

< Verse 47. On & On >

Verse 47. On & On

상현이 한국을 떠났던 것은 2007년 2월이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12년 1월이었다.

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마냥 어리게만 느껴지던 상미가 벌써 대학교 졸업반이었고, 20대 중반이었던 형들의 나이는 어느새 앞자리가 3으로 변해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카페에 모여서 888 크루란 존재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던 이들은 이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랩스타가 되어 있었다.

음악을 포기하려 했던 인혁은 더 이상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여전히 그들이 같은 동그라미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

상미는 오랜만에 평창동의 작업실로 향하며 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디야?”

-길 위에 멈춰있어. 차가 너무 막혀서 한 시간정도는 걸릴 거 같은데?

“그러니까 빨리 좀 출발하라니까. 벌써 퇴근시간이잖아.”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 상현이가 몇 시에 온다고 했지?

“기사 보니까 여섯시쯤에 도착한다던데? 바로 온다고는 했는데 공항에 기자들이랑 팬들이 쫙 깔렸다니까······. 아마 넉넉잡고 열시쯤 오지 않을까?”

상미가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보니, 막 5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3시 10분쯤 도쿄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 동해 위를 날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아직 시간 많네.

“응, 그러니까 조심해서 천천히 운전해.”

-차들이 워낙 기어가고 있어서 사고가 나고 싶어도 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조심하라면 조심해. 아, 올 때 케이크 사오는 거 까먹지 말고. 민지 언니랑 미주 언니도 같이 오고 있지?”

-응. 아까 픽업했어. 지금 다 뒷좌석에서 자고 있다. 이건 뭐 운전수가 따로 없네.

“불만이면 인혁 오빠 차타고 오던가.”

-어후, 그 형은 어떻게 된 게 몇 년이 지나도 운전이 늘지가 않아? 888 크루 성실함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게 인혁이 형의 운전솜씨잖아.

“하긴 클럽 호미 이후로는 한 번도 공연에 늦은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인혁 오빠는 운전을 못하는 것보다 운전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문제야.”

-민지 누나가 말려도 씨알도 안 먹히잖아.

상미와 준형은 오랜만에 클럽 호미 공연 때를 떠올리며 인혁을 신나게 씹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험담 아닌 험담을 하던 상미의 눈에 골목 너머의 작업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다 왔다. 먼저 가서 청소나 하고 있어야겠다.”

-같이해. 먼저 하지 말고.

“대충 치우고 있을게. 빨리 오기나······ 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호랑이가 제 말하니까 온 거 같아서. 저기 주차하고 있는 거 인혁이 오빠 차 같은데?”

-진짜? 웬일이야? 강남 스튜디오에서 출발한다더니 어떻게 벌써 왔지?

“혹시 어제 밤에 출발한 게 아닐까?”

상미의 농담에 준형이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검은색 세단에서 한 무리의 시커먼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딱 보니까 인혁이 오빠 욕하고 있네.’

상미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888 크루의 우민호와 김환, L&S의 리더 방민식, 그리고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이 상미의 눈에 들어왔다.

인혁은 아직 차에 있는 것 같았다.

“오빠!”

“어? 상미야. 빨리 왔네?”

“원래 대학생은 방학에 한가한 법이잖아요.”

“크, 대학생 좋겠다. 나도 대학생일 때가 있었는데.”

주차를 끝낸 인혁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신명나게 듣고 있던 구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뻔뻔한 모습에 방민식이 혀를 찼다.

“박인혁 이 자식은 법대가 아니라 다른 대를 갔어야해.”

“네? 어디요?”

“운전대, 이 새끼야.”

“형, 이제 내년이면 반 일흔이에요. 진짜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체통 좀 지키세요.”

“······죽고 싶냐?”

언제나 그렇듯 그들은 모여 있으면 시끌시끌했고, 그걸 정리하는 것도 언제나 그렇듯 상미였다.

“그만 놀고 빨리 들어가서 청소나 해요.”

“근데 상미야. 우리가 상현이 온다고 청소까지 해야 하나? 어차피 돈도 많은데 호텔에서 머물면 되는 거 아니야?”

“투어 중에야 호텔에서 머물겠지만 투어 끝나면 집구할 때까지 머물 곳이 있어야죠.”

“신문에서 본 대로라면 호텔에서 한 10년 살아도 이자가 더 붙을 것 같던데?”

“······오빠.”

“응?”

“겸사, 겸사, 치우면, 좋잖아요.”

잠깐 반론을 들었던 인혁은 상미의 서늘한 눈빛에 ‘그래 겸사겸사, 그거 판사검사보다 좋은 거지!’라며 앞장서서 작업실 도어락을 눌렀다.

서율예고와 가까운 곳에 있던 888 크루와 밴드 L&S의 공동 작업실은 이제 잘 사용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미가 졸업하던 해이며, 888 크루의 정규 2집 앨범 <비공식적인 기록-1>이 발매되던 해까지만 사용했었다.

그 다음 앨범부터는 강남에 새로 차린 스튜디오를 주로 이용하곤 했다.

이런저런 음악 활동을 위해서도 그게 편했으며, 이제 베테랑이 된 그들에게 사운드 퀄리티란 플러스 알파가 아니라 기본 소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의 패기 넘치는 신인 때는, 또한 아직 한국 힙합이 태동 단계에 있을 때는 좋은 음질이란 플러스 알파였다.

팬들의 입장에서 좋은 랩을 가져오는 게 최우선이었고, 그런 좋은 랩이 음질까지 좋으면 추가점이 붙는 형식이었다.

당시의 한국 힙합은 언더그라운드를 슬슬 벗어나려는 성장기였기에 명확한 기준이 없었고, 평균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888 크루의 이름을 제대로 알렸던 오피셜 부틀렉을 지금 들어보면 음질적인 면에서 아쉬운 점이 꽤 많았다. 우민호가 며칠 밤을 새며 고민하고 다듬은 사운드지만, 그때는 초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팬들은 ‘음질이 조금 아쉽긴 한데 그런 부분을 무시할 수 있게 랩이 너무 좋다.’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888 크루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거고.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888 크루 이전, 혹은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던 이들 중 도태될 이들은 전부 도태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당당히 베테랑이란 칭호를 붙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888 크루 이후에 음악을 시작한, 보통 888 키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루키들은 베테랑들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기 때문에 888 크루 역시 작업실을 벗어나서, 전문적인 스튜디오와 전문적인 엔지니어들을 고용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사운드 팩토리’를 구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888 사운드 팩토리의 공장장은 상현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채대한이었다.

채대한은 맨몸에 기타하나 들고 뉴욕으로 건너가 음악을 배워왔던, 관습 따위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채대한이 오경 미디어에 소속된 것은, 막대한 병원비가 드는 병에 걸리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음악으로 충분히 돈을 벌 자신이 있었지만, 고정 수익은 또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년 전쯤 채대한의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그쯤이 마침 채대한과 오경 미디어의 재계약 시즌이었다. 더 이상 오경 미디어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당시 채대한은 쇼 비즈니스 이적 시장에 나온 최대어였다.

가수나 연기자는 언제 무슨 일로 하락곡선을 그릴지 모르는 ‘주식’이지만, 제대로 된 히트 메이커 작곡가는 ‘연금’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채대한은 연금 중에서도 평생연금, 혹은 연금복권급의 작곡가였다.

성격이 좀 지랄 맞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 지랄 맞은 비위만 잘 맞춰주면 적어도 분기별로 히트곡을 하나씩 뽑아줬으니 말이다.

그래서 채대한을 잡기 위해 엄청난 수의 엔터테인먼트들이 나섰다. 대형 기획사뿐만 아니라, 허리끈을 바짝 졸라맬 각오를 한 중소 기획사들도 채대한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러브콜은 짝사랑이었다.

채대한은 그 어떤 러브콜에도 응답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러브콜을 보냈다.

‘너희가 원하는 사운드, 원하는 비트, 원하는 레코딩 전부 제공할 테니까 나랑 같이 작업할래?’

‘그럼 저희는 형한테 뭘 해드려야 하는데요?’

‘스튜디오 하나 차려줘. 내가 원하는 위치에, 내가 원하는 장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엔지니어들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그래요. 아, 근데 스튜디오 이름은 저희가 정해도 되죠?’

‘맘대로. 뭐로 하려고?’

‘뭐겠어요? 888 사운드 팩토리죠.’

‘상현이나 너네나 촌스러운 건 비슷하네.’

888 크루와 채대한은 억 단위의 돈이 오가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계약서나 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계약서는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되고 나서야, 깜빡했다는 듯이 뒤늦게 작성했을 뿐이었다.

이때가 딱 상현의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가 전미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888 크루가 몇 년 동안 벌어놓은 돈의 절반 이상을 투자하면서 스튜디오를 제작한 것에는 의 영향도 분명 있었다.

888 크루 멤버들은 를 듣고 두 가지 면에서 엄청나게 놀랐었다.

우선 상현이 엑스펙터에서 음악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깨달음이 곧장 앨범으로 반영될 줄은 몰라서 놀랐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들 역시 성장을 거듭했고 이제 상현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저만치 훌쩍 도망가는 상현의 뒷모습에 도전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그들이 경쟁상대는 언제나 거울속의 888 크루였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 놀랐던 점은 사운드의 퀄리티였다.

의 이전 앨범이었던 은 제이콜과 상현이 블랙 히피의 작업실에서 직접 만든 앨범이었다. 그래서 사운드적인 면에서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888 크루 멤버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했었다.

물론 상현의 프로듀싱 역시 수준급이기 때문에 MTB가 사운드적으로 부족한 앨범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뛰어난 앨범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아, 우리가 그동안 해온 노력이 미국에서 충분히 먹히는구나.’

그래서 888 크루 멤버들은 이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탠다드라는 걸출한 프로듀서가 큰 그림을 담당하고, H&R INC의 전문적인 백업이 들어간 는 MTB와는ㄴ 차원이 다른 앨범이었다.

랩에서도 발전이 있었지만, 사운드적인 면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랩이 발전했다면, 사운드는 진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888 크루 멤버들은 전혀 돈을 아끼지 않은 채로 888 사운드 팩토리를 만든 것이었다.

전문가 중의 전문가인 채대한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스튜디오를 차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힙합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해도 ‘랩쟁이’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스튜디오를 만드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 있었다.

힙합은 샘플링 위주의 음악이었기 때문에, 쥐 잡으려고 소 잡는 칼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달랐다.

‘채대한의 마음에 든 가수들만 888 사운드 팩토리를 이용할 수 있다.’라는 극악 난이도의 조건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888 크루의 스튜디오에 외주를 맡기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중국이나 대만의 초대형 가수들이 앨범 제작을 위해 그들의 스튜디오를 찾는 것은 이제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심지어 사운드적인 면에서 한국보다 몇 배는 진보해있다고 평가받는 일본에서도 888 사운드 팩토리의 이름은 높았다.

돈 쓸 일이 없는 채대한은 자신이 버는 돈의 대부분을 장비의 교체에 사용했고, 새로운 장비가 나오면 그게 제 아무리 고액이라도 일단 사용해봐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전문적인 사운드 스튜디오.

이게 888 사운드 팩토리에 붙은 수식어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한 것은 상현뿐만이 아니었다. 상현이 미국으로 떠나있는 5년 동안 888 크루 역시 매일 매일 성장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일단은 오랫동안 안 쓴 이곳을 청소를 해야 한다는 거지.’

인혁은 이런 엄청난 결과물이 청소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렇게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던 인혁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는 도어락에 지문 자국이 찍혀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평창동의 작업실은 순환도로와 가까운 도심지 외곽에 위치했기에, 888 크루가 유명해진 이후에는 위험한 면도 있었다.

주변의 인적이 드물어서, 나쁜 의도를 가진 팬들이 너무 쉽게 찾아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와서 누른 건가? 근데 여기 이제 안 쓰는 거 다들 알 텐데?’

인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1층 거실의 쇼파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뭐야? 상현이 아니야? 어?! 맞는데?”

“그게 무슨······ 어?!”

“뭐야, 오빠. 왜 여기 있어?”

가장 먼저 상현을 발견한 인혁이 호들갑을 떨고, 이 자식이 또 무슨 장난을 치나 싶었던 이들도 깜짝 놀랐다.

뒤늦게 상미가 달려왔다.

“으음.”

그때 상현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오빠, 오빠. 일어나.”

상현이 잠에서 깨지 않자 상미가 다시 한 번 깨웠다.

그러자 반쯤 눈을 뜬 상현이 웅얼거렸다.

“Shut the fuck up······.”

“······.”

“······.”

“······지금 저한테 닥치라고 한 거죠?”

상미의 물음에 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5년 만에 만난 혈육의 첫 마디가 셧더퍽업이네.”

상현은 그저, 잠결에 주변이 시끄러우니 켄드릭이나 제이콜이 시끄럽게 구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난 몇 년처럼 말이다.

상미는 상현의 등짝을 후려갈겨 잠을 깨우려다가,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오빠의 얼굴에 화가 풀려버렸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화는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반가웠을······.

“Get the fuck out of here······.”

“여기서 꺼지라는데?”

결국 상미는 상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극성 취재진을 피하기 위해 입국시간을 속인 뒤 서프라이즈한 등장을 꿈꿨던 상현은, 결국 상미에게 한 대 얻어맞은 채로 5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 Verse 47. On & On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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