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85화 (285/309)

< Verse 44. The End >

***

상현을 잘 모르는 뮤지션이나 음반 산업관계자들은 지금까지 파이브식스란 뮤지션에게 ‘실력도 좋고, 운은 더. 좋은 뮤지션’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사용했었다.

파이브식스가 랩을 잘하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엑스펙터에서 애매한 탈락을 맞이하는 바람에 관심을 모았고, 그래미 어워드에서 관심을 호감으로 만들었으며,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잠깐의 큰 인기를 얻은 뮤지션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진 않았다.

영원할 것 같은 인기를 누리고, 전미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뮤지션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았다.

재능이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고, 인기란 재능이 삐끗하는 순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 하나의 곡만 흥행시킨 사람)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빌보드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빌보드 원 히트 원더’들(딱 한 곡만 빌보드 메이저 차트 4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사라진 가수들)이 300명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사라지고 있었다.

단순히 반짝하고 말 가수로 보기에는 해내고 있는 일들이 너무 대단했고, 지구력이 엄청났다.

한국에서의 기록까지 따지자면 2005년 중순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음악을 만들었고, 기나긴 상승곡선을 그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2010년을 여는 카운트다운 행사에서 보여준 포스는 그야말로 ‘God Of Rap’이라는 뉴욕 타임즈의 평가에 걸맞은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른 것으로 변했다.

‘과연 파이브식스가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상을 할 수 있을까?’

‘일단 랩 필드는 전부 석권하겠지.’

‘지금 추세라면 본상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의 수상 여부로 변한 것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12월 20일에 발표된 <2010 Grammy Award>의 노미네이트 명단에는 'FiveSix'란 이름이 수도 없이 올라가 있었다.

5개의 힙합 필드는 물론이고, 본상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이상현, 역대 래퍼들 중 최다 노미네이트 타이기록 달성!

-2005년의 칸예 웨스트와 동일한 10개의 노미네이트!

-랩 뮤지션 최초, 본상 4개 부분 노미네이트!

상현은 전미투어를 하느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한국은 연말부터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Lonely Road Part 2’가 R&B 필드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상현이 총 10개라는 래퍼들 중 역대 최다 노미네이트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2005년의 칸예 웨스트와 같은 수치였다.

그러나 칸예 웨스트의 노미네이트 중 3개는 래퍼가 아닌 프로듀서와 작사가로써 노미네이트 된 것이었다. 10개 모두가 래퍼로써 노미네이트 된 상현과 달리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10개의 노미네이트가 아니었다.

그 중 4개가 본상이라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래미는 대중성에 기반을 둔 음악성을 심사하기 때문에 4개 본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 된 가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1980년에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4개의 본상을 전부 거머쥐기도 했었다.

그러나 래퍼가 4개의 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2001년의 에미넴이나 2005년의 칸예 웨스트의 3개가 최다였다.

게다가 래퍼가 본상을 받은 것은 단 한 번 밖에 없었으니, 그 관심이 얼마나 클지를 짐작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한국의 일각에서는 '아무리 이상현이 대단하다고해도 외국 시상식 후보에 선정된 것만으로 언론 반응이 지나친 게 아니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4개의 본상 중 상현이 거머쥘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는 것은 였다.

작년에 Golden Nu-Era란 이름으로 베스트 뉴 아티스트에 노미네이트되었던 상현은 이번에는 FiveSix라는 이름으로 노미네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상현의 경쟁자는 없어보였다.

잭 브라운 밴드(Zac Brown Band), 케리 힐슨(Keri Hilson), MGMT, The Ting Tings 모두 훌륭한 뮤지션들이었지만, 상현이 보여준 파급력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마 잭 브라운 밴드가 확고한 언더그라운드 팬층을 기반으로 상현을 위협할 '도전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경쟁자가 아닌 도전자로.

때문에 위 뮤지션들의 회사에서는 '파이브식스는 이미 골든 뉴에라 팀으로 베스트 뉴 아티스트에 노미네이트가 됐었는데 또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라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베스트 뉴 아티스트의 선정 기준은 초대형 신인이 있지 않은 이상 항상 논란이 많았었다.

-조건에 맞는 기간 내에 저명성을 새로이 가지게 된 첫 번째 음반을 발매한 신인 아티스트에 주어집니다. 이 말인즉슨, 꼭 해당 아티스트의 첫 번째 앨범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그래미 측에서는 상현이 파이브식스란 이름으로 미국에서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기 때문에 저명성을 새로이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는 논란거리도 아니었다.

2003년에 앨범을 내고 줄곧 활동해온 뮤지션이 2007년에 갑자기 베스트 뉴 아티스트에 노미네이트되어서 본인도 황당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대중들은 상현이 베스트 뉴 아티스트에 선정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선정기준은 별다른 논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본상에 노미네이트 된 것은 상현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켄드릭 라마는 의 노미네이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제이콜은 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 회사에서 동시에 3개의 앨범을 출시한 것도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그 앨범들이 전부 그래미 어워드 본상에 노미네이트 된 것은 미국 대중음악사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같은 날 앨범을 발매하며 경쟁을 택한 세 명의 랩 뮤지션 중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앨범 판매량으로는 파이브식스의 우세, 싱글 판매량으로는 제이콜의 우세, 랩 매니아들의 지지로는 켄드릭 라마가 우세.

-H&R INC의 놀라운 상승 곡선.

-H&R INC 이미 힙합 씬 넘버원 레이블?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미 어워드에 관련된 관심은 커져만 갔다.

다행이라 해야 될지 불행이라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얼마 전 방송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의 오경 미디어 이야기는 생각보다 조용히 수습되었다.

물론 상현의 말이나 행동 자체가 핫 이슈인 만큼 완전 조용히 넘어간 건 아니었다.

이니셜 처리된 회사의 정체는 방청객에 의해서 이미 까발려진지 오래였고, 상현의 팬들은 오경 미디어를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과격 팬들은 오경의 물건을 부수는 영상을 유투브에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하델이 걱정하던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하델의 적절한 대처 덕분에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는 않았다.

상현 역시 오경 미디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미국에서 노이즈를 일으키기 위함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카운트다운 행사의 엔딩을 잡느라 하델이 손해를 본 부분들이 많은데 오경 미디어까지 나서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상현은 오경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잠시 내려두고 그래미 어워드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명예나 감투에 큰 관심이 없던 상현도 이번 52회 그래미 어워드에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반드시 트로피를 들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

모든 일이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져만 갔다.

앨범 판매량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대중들의 관심도 끊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에 발맞춰 상현, 제이콜, 켄드릭의 인기도 올라만 갔다.

그리고 그 인기는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카운트다운 행사에서 뭉친 골든 뉴에라 멤버들은 다음 행선지로 다 같이 캐나다 벤쿠버로 향했는데, 그곳에서도 자신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꺄아아아악!

-제이콜! 켄드릭! 파이브!

원래 스웨덴과 캐나다는 미국의 랩스타들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내 차트 1위에 미국 래퍼들의 랩이 올라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열광을 받은 래퍼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켄드릭은 마치 비틀즈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같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덕분에 공연을 해도, 방송을 해도, 인터뷰를 해도 재미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열광적인 반응이 나오니 말이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열흘간의 즐거운 일정을 보낸 골든 뉴에라 멤버들은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캐나다로 올 때와, 미국으로 갈 때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캐나다로 올 때는 퍼스트 클래스를 탔다면 갈 때는 퍼스트 클래스를 탈 수가 없었던 것이다.

"Fuck! 이게 뭐야?"

하델의 새해 선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H&R INC의 로고가 박힌 전용기라는 선물이.

"뭘 그렇게 놀래? 전용기는 너무 비싸서 못살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처럼."

"비싸지 않아요?"

"인원수는 셋인데 두 대 밖에 못 샀으니 비싸긴 비싸지."

셋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고소득자가 된지 오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상현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라디오 방송에서 노래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굳이 달라진 것이라면, 몸값이 더 올라가고, 좀 더 유명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는 게 달라진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프로그램 중 하나인 SNL LIVE에도 출연하고, 엘렌 쇼에도 출연을 했다.

어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골든 뉴에라 스페셜을 편성해, 일주일 내내 , , , 의 수록곡들을 틀기도 했다.

그렇다고 상현이 일만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이런저런 명소들을 돌아보며 영감을 받고, 가사를 쓰고, 트랙을 만드는 시간도 꽤 많았다.

전용기가 있다는 것은 이동 중에도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H&R INC의 전용기는 날아다니는 녹음실이었고 프로듀싱 공간이었다.

상현은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가사를 쓰고 녹음을 진행했다. 하지만 나 를 만들 때처럼 마음에 드는 트랙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상현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서 하델이 요즘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투어 내내 어지간하면 자신의 옆에 붙어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상현은 이런 적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만들고 싶은 트랙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때로는 하나의 주제가지고 여러 개의 트랙을 만들어서 어떤 걸 공개해야 될지 고민할 때도 많았다.

이렇게 몇 달 동안 마음에 드는 트랙을 못 만든 적도 없었고, 하나의 트랙을 만들다가 중간에 접은 적도 별로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상현에게는 슬럼프가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음악가에게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슬럼프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현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왜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괜찮은 것 같았다.

조금만 있으면 감이나 영감을 되찾을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그냥 괜찮았다.

'왜일까?'

상현은 정답을 찾지 못하고 투어를 계속했다.

서부 끝 쪽인 LA에서 시작해 동부 끝 쪽인 뉴욕으로 향했던 상현은, 이제는 왔던 길을 되짚으며 LA로 향하는 횡단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켄드릭이나 제이콜도 함께였다.

간혹 서로 다른 공연을 위해 찢어질 때도 있었지만, 큰 이동 경로는 비슷했다. 하델이 그렇게 스케쥴을 잡은 것 같았다.

덕분에 LA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재밌었다.

켄드릭, 제이콜과 함께하는 와중에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대신 하델이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3장의 앨범을 동시에 발매해 전미를 휩쓸고 있는 H&R INC의 문을 두드리는 뮤지션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래미 어워드의 본상에 켄드릭, 제이콜, 상현이 사이좋게 노미네이트 된 이후에는, 이미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뮤지션들의 연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델은 꽤 즐거워보였다.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축적해놓았던 에너지를 터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가 바쁜, 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H&R INC의 전용기가 LA 공항에 도착하였다.

제 52회 그래미 어워드가 정확히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

< Verse 44. The End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