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83화 (283/309)

< Verse 44. The End >

***

미국 실질적 수도.

빅애플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도시.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뉴욕(New York).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힙합 뮤지션들에게 뉴욕은 이러한 수식어 대신 ‘비기의 고향’, 혹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발원지’라는 별명으로 더욱 익숙해졌다.

제이지의 Empire State Of Mind가 발매되는 순간부터였다.

Me I'm up at Bed-Stuy

(난 Bed-stuy에 있어)

Home of that boy Biggie

(비기의 고향인 이곳에 말이야)

Now I live on Billboard

(지금은 빌보드에 살아)

And I brought my boys with me

(내 친구 녀석들과 함께 말이야)

상현은 회귀 이후로 몇 번, 기억 속의 노래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었다.

칼립의 2집 앨범에서 과거에 좋아하던 노래가 사라진 것이라던가, 스타즈 레코드의 3집 앨범에서 곡명은 같지만 랩은 다른 노래가 태어난 것이 그랬다.

사실 뮤지션이란 예민한 사람들이라서 약간의 변화에도 새로운 곡이 나오고, 기존의 곡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현은 반드시 나오길 희망하는, 나오지 않으면 자신을 탓할 것만 같은 노래들이 몇 개 있었다.

칸예 웨스트의 Only One이나, 제이콜의 Apparently, 그리고 제이지의 Empire State Of Mind 같은 노래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다행스럽게도 2009년 11월에 발매가 되었고, 뉴욕에 입성하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 보내는 러브레터 Empire State Of Mind였다.

“그 노래가 그렇게 좋아?”

“다 자기 취향에 맞는 노래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면 하델은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해요?”

“나? Smell Likes Teen Spirit."

“커트 코베인, 아니 너바나(Nirvana) 노래요? 의외인데요?”

“뭐가?”

“이제 십대처럼 반항할 나이가 아니라, 반항하는 십대들을 한심하게 볼 나이 아니에요?”

“남자는 죽기 직전까지 십대야. 단지 십대 초반이냐, 중반이냐, 후반이냐의 차이지.”

“무슨 차인데요?”

“초반은 자신이 철이 없다는 걸 모르고 철이 없고, 중반은 철이 없다는 걸 알면서 철이 없고, 후반은 철이 있고 싶은데 철이 없지.”

“오, 그거 말 되는데요?”

하델은 상현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커트 코베인을 떠올렸다.

영원한 록스타를 만들고자하는 자신의 열망을 LA 메탈과 함께 끝내준 영원한 록스타.

영원한 스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알려준 인물.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서서히 소멸되는 것보다 한꺼번에 타오르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을)

하델은 상현이 커트 코베인과는 다른 방법으로 영원한 록스타, 아니 랩스타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때 하델의 상념을 상현이 깨트렸다.

“그러고 보면 하델은 커트 코베인을 본 적이 있겠네요?”

“봤다 뿐이겠어? LA 메탈의 종말을 고한 게 코베인이 들고 나온 얼터네이티브 록이니까. 우리한테는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나오는 앙골모아 대왕 같았지.”

“신기하네요. 저한테 코베인은 영상이나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인데.”

“커트가 94년에 죽었으니까······ 6살 때 아니야? 나름 동시대를 살았네.”

“어우, 94년이라니. 지금까지는 잘 못 느꼈는데 이제 보니 하 사장님 엄청 옛날 사람이네요.”

“공연 준비는 다 하고 이러는 거지?”

“지금 하고 있잖습니까.”

상현이 볼륨을 낮춘 자신의 이어폰을 톡톡 건드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랩을 흥얼거렸다.

하델은 가끔씩 상현이 얼마나 대단한 뮤지션이고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상현은 음악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 음악 속의 파이브식스나 음악 밖의 파이브식스가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상현은 하델이 지금까지 만나온 여타 스타들에 비해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라도 음악을 흥얼거릴 때면 체감할 수 있었다.

그가 아주 환하게 타오르는 존재라는 것을.

그 순간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가십걸들이랑 파티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스탠다드!”

노크도 없이 골든 뉴에라의 대기실로 들어온 것은 스탠다드였다.

“콜이랑 켄드릭은 어디 갔어?”

“떨(대마초의 은어)피러.”

“근데 대기실은 왜 이렇게 칙칙해? 투어하는 내내 하델이랑만 있었던 거야?”

“스태프들이랑 임 변호사님도 있었지.”

“그래, 그것 참 좋았겠다. 너무 부럽다.”

스탠다드가 그렇게 말하고는 쇼파에 털썩 앉자 상현이 피식 웃었다.

LA에 있는 스탠다드를 뉴욕까지 부른 것은 상현이었다.

사실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관객들의 환호나 영광으로 보답을 받지만, 프로듀서들은 그렇지 않았다.

엘에이 리드나 사이먼 코웰같이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중들에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기에 늘 고독한 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서 상현은 스탠다드를 불렀다.

오늘의 뜻 깊은 무대에서 자신들의 사운드를 진두지휘해줄 지휘관으로 말이다.

사실은 이렇게 공연 직전에 도착하는 것은 말이 안됐다. 어제 와서 리허설을 하고 체크를 했어야했다.

그러나 눈이 너무 많이 오고 바람이 강해서 비행기가 줄곧 못 뜨고 있다가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다.

“리허설은 못할 것 같은데. 이미 공연이 시작해서.”

“좀 불안하긴 하지만······ 우리가 LA 작업실에서 한두 번 놀았던 게 아니잖아.”

스탠다드는 이번에 나온 세 개의 앨범 비트들을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상현의 앨범은 스탠다드가 총괄 프로듀싱을 해줬고, 나머지 두 앨범은 최종 마스터링 엔지니어를 맡았던 것이 스탠다드였으니까.

“스탠다드!”

“뭐야? 어떻게 온 거야? 비행기 못 뜬다며?”

그때 대기실 문을 열고 켄드릭과 제이콜이 들어왔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일단 최소한의 합은 맞춰보자.”

그렇게 네 명의 뮤지션들이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환하게 빛날 준비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미국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혹은 탐나는 자리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두 가지 정도의 선택지가 나올 것이었다.

그래미 어워드와 빌보드라는 두 갈래에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 미국 뮤지션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은 곳이 한군데 더 있었다.

이곳은 앞선 두 곳인 그래미, 빌보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곳이었다. 앞선 두 가지가 ‘음악’에 관련된 것이라면 이곳은 오직 ‘스타성’과 ‘인기’에 관련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뮤지션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길 바라는 세 번째는 장소는 바로,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의 카운트다운(Countdown) 행사였다.

"WASSUP NEW YORK CITY-!"

"MAKE SOME NOISE-!"

1907년부터 시작돼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뉴욕 타임스퀘어의 카운트다운 행사는 빌보드나 그래미처럼 ‘좋은 음악’을 가진 뮤지션들이 등장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뮤지션들이 등장하는 곳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을 더 크게 만들고, 해피 뉴 이어를 더 신나게 만끽하기 위해 타임스퀘어 광장을 찾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이들.

스타(Star).

그리고 그곳에 골든 뉴에라 멤버들이 포함되었다.

제이콜, 켄드릭 라마 그리고 파이브식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뮤지션들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은 뮤지션이었다.

그러나 하델이 알기로 지금까지 노란 피부를 가진 뮤지션이 카운트다운 행사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하긴 뭐 이것뿐인가. 파이브식스가 지금 걷는 길은 다 최초이며 기록이지.’

그렇게 2009년이 채 1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 골든 뉴에라 팀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제이콜이었다.

Hey, we got a good thing

Don't know if I'm a see you again,

see you again

무대 위로 등장한 제이콜이 그의 슈퍼 싱글인 Work Out을 부르는 순간부터 관객들에게서 열광적인 떼창이 쏟아졌다.

영하 5도의 추운 날씨 탓에 입김이 나왔지만 관객들의 환호는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 환호를 더욱 뜨겁게 덥히는 순간이 이어졌다.

Work Out은 본래 제이콜 혼자서 부르는 싱글 곡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후렴이 끝나는 순간 무대 뒤에서 튀어나온 상현이 두 번째 벌스를 시작한 것이었다.

-꺄아아아아악!

-파이브식스!

상현의 등장에 타임스퀘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자지러지는 함성소리를 질렀다.

난 너를 본 적 있어

며칠 전에 길에서

내 앞을 걸어가던

사람 아닌 아름다운 곡선, 그 자체

그게 바로 너였어.

훔쳐본 거 맞아. 근데 그건 네 잘못일 걸, SHIT!

영어에 조예가 있으며, <56 JFTR> 앨범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반가움에 소리를 지를만한 가사가 튀어나왔다.

지금 상현이 제이콜의 Work Out 비트에 맞춰 부르는 노래는, 56 JFTR의 4번 트랙이었던 하이힐(High-Hill)이었다.

상현은 한국에서 만들었던 랩의 소스나 가사들을 미국식 스타일에 맞게 자주 재활용하곤 했다.

누군가는 상현에게 히트곡을 우려먹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사실 라임과 플로우가 중요한 랩 장르에서 언어가 바뀐다는 것은 음악을 새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가사 내용이나 랩 소스를 지키면서 언어를 바꾸는 과정이, 새로 곡을 만드는 것보다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현이 자꾸 한국의 것들을 재활용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888 크루와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우리가 함께 성장한 시간 덕분에 내가 여기에 있을 수가 있고, 나뿐만 아니라 다 함께 할 수 있다는 숨겨진 메시지를.

High-Hill Light

허리부터 발목까지 라인

따라서 내려간 건, 시선 아닌 내 심장

이름도 예뻐 우리 꽤 가까이에 산다고

제이콜의 Work Out은 매력적인 여성을 유혹하는 내용의 랩이었고, 상현 역시 그에 맞춰 랩을 전개했다.

마침내 상현의 벌스가 끝나고 또 한 번의 훅이 돌아왔다.

그 순간 또 한 명이 등장했다.

-켄드릭 라마!

사람들이 상현의 등장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켄드릭 라마를 열렬한 환호로 반겼다.

그렇게 그래미 어워드 이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골든 뉴에라 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Work Out 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Nigga, Yellow Monkey, Flip’이었다.

골든 뉴에라 팀 이전에도 많은 뮤지션들이 타임스퀘어 광장을 뜨겁게 덥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최고의 함성이 터져 나온 순간은 아무래도 골든 뉴에라 팀의 공연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들지 않는 도시를 깨우는 존재들이며, 불 꺼지지 않는 도시를 더욱 환하게 밝히는 존재들이었다.

“Make it Hot! DJ. STANDARD-!"

그리고 그 불을 더욱 크게 밝혀주는 유능한 사령관도 함께하고 있었다.

***

-Three!

-Two!

-One!

사람들의 힘찬 카운트다운이 마침내 Zero에 이르는 순간, 타임스퀘어 광장의 가운데 설치된 카운트다운 디스플레이가 ‘Happy New Year'이라는 문구를 쏟아냈다.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며 하늘을 수놓고, 가족들의 포옹과 연인들의 키스가 이어졌다.

마침내 2010년이 밝은 것이었다.

상현은 문득 과거의 자신이 2010년 새해에 뭘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방학이라서 택배 상하차 알바를 했던 것 같다.

그때는 정말 돈이 너무 갖고 싶었고, 필요했었다.

그래서 상미까지 방치해가면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2010년 1월 1일 0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하늘에서도 잘 보이겠지.’

상현은 마이크를 꽉 잡았다.

골든 뉴에라 팀 공연은 끝났지만, 아직 그의 공연은 끝이 아니었다.

해피 뉴 이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시작되는 오늘 행사의 엔딩 공연.

그것이 남아있었다.

“준비됐지?”

“물론이죠.”

그리고 그 공연을 함께하는 뮤지션도 있었다.

누군가 상현에게 가장 좋아하는 랩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에미넴이나 빅션, 혹은 켄드릭 라마를 말할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랩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으면 상현은 당연히 이 사람을 말할 것이었다.

길바닥에서 시작해 랩 하나로 5개의 레이블을 이끄는 사장이 됐으며, 2개의 회사를 가진 사업가가 됐고, 2개의 스포츠 팀에 투자하는 구단주가 된 래퍼.

바로, 제이지였다.

오늘 카운트다운 행사의 엔딩을 책임지는 두 명의 뮤지션은 Empire State of Mind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제이지와, 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파이브식스였다.

< Verse 44. The En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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