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40. 미지의 요인 >
***
LP판에서 휴대가 간단한 카세트테이프로.
카세트테이프에서 음질이 좋은 CD로.
CD에서 비용이 없다시피 한 MP3 파일로.
이것이 1970년대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음악매체의 변화였다.
미국의 레코드 협회 가 발표한 2007년의 음악소비 매체 비율에 따르면, CD 사용의 비율은 전체 음악소비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RIAA의 조사는 ‘돈을 내고 구입한 음악’을 범위로 설정한 조사였다. 무료로 다운된 어마어마한 수의 MP3 파일은 제외되었다는 말이었다.
실제적인 CD 사용의 비율은 전체 매체 중 25-30% 정도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음반 판매가 죽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수치였다.
단순히 300만장이 팔릴 앨범이 100만장으로 줄어들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300만장이 팔릴 메가 히트 앨범은 여전히 150~200만장씩 팔리지만, 30만장이 팔릴 앨범들이 1만장씩 팔리는 ‘양극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였다.
양극화의 시대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자생력은 점점 약해져만 갔고, 기획사들은 더 이상 음악만 믿고 모험수를 던지는 일이 줄어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신선함으로 무장한 언더 뮤지션들이 메이저로 올라오는 일이 줄어들었고, 비슷비슷한 뮤지션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2년쯤 뒤의 한국처럼 모든 가요계가 기획사가 만들어낸 가수로 점령당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미국의 대중들도 ‘요즘 음악은 거기서 거기야.’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뉴 페이스를 바라는 대중들의 관심과 수요가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뉴 페이스의 뮤지션을 더 극적이고, 더 안정적으로 대중들 앞에 내놓는 방법.
영국에서 건너온 엑스 펙터 유에스(X-Factor US)가 폭스(FOX)사를 끼고 미국에 대대적으로 런칭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 상황이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델 레인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보통 프로모션이 싸우는 상대는 대중의 무관심이다. 즉 프로모션이란 대중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리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H&R INC는 대중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H&R INC, 혹은 하델 레인즈가 싸우는 대상은 ‘파이브식스의 속도’였다.
원래 하델의 계획에 따르면 상현은 커튼콜 투어를 끝내고 뉴욕으로 가서 활동을 했어야했다. 뉴욕에서 이름을 알린 후에는, 뉴욕에서 촬영이 시작되는 엑스 펙터 유에스(X-Factor US)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상현이 성질 더러운 플랜 페이퍼의 하이프맨으로 투어에 참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계획, No Color 프로젝트.
사실 이 프로젝트의 제 1 타겟은 대중들이 아니었다.
대중들 역시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대상은 투어가 끝나면 X-Factor US로 투입될 EMI 뮤직과 소니 뮤직의 스태프들이었다.
누군가는 커튼 콜 투어에 참여한 스태프들 중에 고위 간부가 거의 없다며 의아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방송을 잘 모르니까 하는 말이었다.
촬영의 진짜 ‘현장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은 제작사 고위 간부가 아닌 현장 스태프들이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직접 무대를 만들며, 직접 대본을 쓰는 스태프들이 어떤 마음으로 출연자를 보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가진 No Color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그것도 하델의 생각보다 훨씬 크게. 그리고 빠르게.
하델은 상현에게 오프닝의 기회를 주고, 여러 힙합 사이트들에 동영상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잘 풀릴 줄은 몰랐다.
물론 기대는 있었지만, 아무리 잘 되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현은 그러한 한계를 깨부쉈다.
‘다음 단계가 훨씬 쉬워지겠는데?’
X-Factor US에는 하나의 부제가 있다.
바로 America Dream이다.
‘No Color 프로젝트’와 이어질 ‘America Dream 프로젝트’란 이름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현은 하델의 계획과 다르게 뉴욕이 아닌 LA에 남길 원했다. 커튼 콜 투어에서 얻은 성과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하델은 흔쾌히 상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LA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기반을 좀 더 다질 수 있으니, LA 뮤지션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콜라보레이션이 하델 레인즈의 계획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America Dream 프로젝트의 목표는 명확했다.
전미의 대중들에게 상현의 이름을 알리고, 얼굴을 알리고, 랩을 선보이는 것. 인지도를 높이는 것. 좀 더 세밀하게 설정하자면 X-Factor의 경연곡 중 하나를 빌보드 차트에 올리는 것.
그러나 문제는 상현이 이 모든 것을 MTB로 이루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델의 계획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높게.
17. Mix Them : Black.
22. No Color(FiveSix Solo)
29. Ni**a, Yellow Mon**y, F**p
993,120 Units
MTB가 발매 8주차에 세우고 있는 놀라운 기록들이었다.
하델의 생각에, 17위를 기록하고 있는 앨범 차트 <더 빌보드 200>은 더 위로 올라갈 여지가 있었다.
2008년은 릴웨인을 제외하면 예정된 메가 힙합 앨범이 없었다. 기대작들은 대부분 상반기에 나왔고,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것은 비단 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리한나, 어셔 등을 제외한 블랙 뮤직 앨범들 역시 포함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정말 운이 좋다면 MTB는 앨범 차트 탑 10까지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콜드플레이(Coldplay)의 가 너무 강했고, 소울풍의 뮤지션들이 너무 강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더피(Duffy), 리오나 루이스(Leona Lewis) 등등.
‘아마 12위나 13위로 하이를 찍겠지. 정말 운이 좋다면 10위에 한 주 정도는 걸칠지도…….’
더 올라갈 여지가 있는 앨범 차트에 비해서 싱글 차트는 최고조를 찍은 것 같았다. 오른다고 해야 1-2단계가 오를 것이었다.
빌보드 핫 100은 ‘라디오 플레이 점수’가 높기 때문에, 프로모션 푸쉬를 받으면 20위권 정도는 쉽게 안착할 수가 있었다. 기존의 메이저 가수들은 10위권까지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o Color’가 22위를, 'Ni**a, Yellow Mon**y, F**p'가 29위를 차지고 있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MTB는 생짜 신인들이 그들의 노래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으니까.
또한 프로모션으로 올라간 곡들은 하락폭이 엄청났다.
탑 텐으로 데뷔를 했음에도, 바로 다음 주에 5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가수들에게 꽤 큰 창피였다.
그러나 MTB의 싱글들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하델은 MTB의 싱글들이 하락을 하면서도 50위권 안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진솔한 음악들은 그럴 수 있었고, 그럴 자격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앨범 판매량은 99만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미 플래티넘(100만장)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150만장은 무리일 것 같았다. 아마 120-130만장 정도에서 수렴할 것이었다.
하델의 고민은 이런 대단한 기록들에서 시작되었다.
상현이 커리어를 쌓는 속도가 H&R INC의 프로모션 계획을 앞질러 간다.
사실 하델이 진행한 엑스펙터 물밑 작업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물밑 작업이라고해서 부당하게 승리를 쟁취하는 형태는 아니었고, 제대로 실력을 보일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형태였다. 더불어 몇 가지 이슈 포인트를 만들어놓는 것.
‘하지만 준비한 것이 아깝다고 위험한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잖아?’
무명의 뮤지션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지만, 뜨고 있는 뮤지션은 위험을 피해가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상현이 LA에서 공연을 하고, 작업을 하며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하델은 꽤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정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봐, 파이브.”
“어우, 하 사장님 오랜만에 보네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제이콜 매니저 때문에 뉴욕에.”
“아, 그렇지. 계약은 협의 됐나요?”
“이제 사인하는 일만 남았지만 그게 제일 어려운 법이지.”
상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델은 왠지 그 모습이 ‘그렇겠네요’라기 보다는 ‘나도 그 마음 잘 알죠’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물어볼 게 있어. 엑스펙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때문에 그러시죠?”
“혹시 랩하는 게 질리면 말해. 내가 COO(기업 내 사업을 총괄하는 최고운영책임자)로 취직시켜줄 테니까.”
상현의 통찰력에 우회적인 감탄을 표한 하델이 답변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상현이 입을 열었다.
“준비하신 건 죄송한데, 아무래도 참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골든 뉴 에라 친구들과 함께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국에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적절한 표현이야. 죄송할 건 전혀 없어. 나도 양쪽 다 각기 다른 메리트가 있어서 고민하던 거였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델이 홀가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뮤지션이 똑똑하니까 이런 점이 좋군.’
통찰력과 판단력이 자신 못지않으니, 선택의 기로에서 뮤지션의 호불호를 반영할 수가 있었다.
더 엑스펙터는 상현의 말대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었다.
오디션에 참여하는 순간 상현에게 ‘상업적인 래퍼’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 위험한건 MTB 역시 더 엑스펙터 출연 직전의 물밑작업으로 여겨질 수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품는 이들은 미국의 힙합 매니아들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니아층을 무시하고 더 엑스펙터에 참여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쇼미더머니>에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나가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한국은 서브 컬쳐 씬이 워낙 작아서 언더그라운드에서 10년 음악 한 것보다 몇 달 동안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힙합을 가볍게 즐기는 ‘대중’이 ‘매니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중’과 ‘매니아’의 비중이 한국처럼 극단적이지 않았다. 90% 이상의 흑인들이 힙합 음악의 준 매니아 수준이라는 것만 생각해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유의미한 조사 지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과 영부인 역시 힙합을 사랑했다.
한국의 대중과 매니아의 비율이 9 대 1 이상이라면 미국은 7대 3정도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상현의 더 엑스펙터 출연은 으로 힙합 매니아들을 홀딱 홀려놓고는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바꿔버리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상현이 더 엑스펙터에서 망했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잘됐을 경우에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많은 것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거기에 MTB가 성공하니 리스크가 엄청나게 올라가고 리턴은 상대적으로 낮아진 상황이었다.
‘그래. 출연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하델은 상현의 결정에 따라 더 엑스펙터의 출연을 고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상현은 의견을 번복했다.
“하 사장님. 이게 사실인가요?”
상현이 가져온 것은 어제 새벽에 나온 인터넷 뉴스의 1면을 장식한 하나의 기사였다.
“글쎄? 난 못 들었던 이야기인데, 한 번 알아볼게.”
잠시 뒤 하델은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상현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말했다.
“엑스펙터에 출연해야겠어요.”
“이 뮤지션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고 싶어서?”
“네.”
“글쎄. 난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이 친구는 팬도 많은 만큼 헤이러들도 많아서. 이미지를 알잖아?”
“제가 미국에 오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상상이 이 사람과 같은 무대에서 서는 거였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쉽게 기회가 찾아와서 당황스럽기도 하네요.”
상현의 말에 하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쉬울 리가. 6단계 정도는 통과한 다음에 거기서 또 선택을 받아야하는 건데?”
“어려우면 더 좋겠네요. 그럼 더 불확실해지는 거니까.”
하델은 상현이 높은 지식수준, 냉철한 이성,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즉흥적인 면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동안 쭉 지켜본 상현은 절대 충동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 냉철한 이성과 강한 충동은 양립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파이브식스만의 독특한 음악이 탄생하는 걸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하델은 처음 상현이 엑스펙터를 고사하는 것이 리스크가 무섭기 때문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상현은 단지 충동이 생기지 않은 것뿐이었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힙합 더 바이브에서 질리도록 경험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상현은 월드스타힙합에서 The X-Facotr US 출연을 밝혔다.
상현의 인터뷰는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M : 이미 LA 언더그라운드뿐만 아니라 빌보드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굳이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위험한 길을 택한 이유가 뭐야?
FiveSix : 에미넴과 한 무대에 서고 싶어서요.
PM : 에미넴?
FiveSix : 엑스펙터의 탑 12부터 4명의 유명 가수들과 콜라보레이션할 기회가 생긴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걸 본 순간 엑스펙터의 출연을 결심했고요.
PM : 오직 에미넴 때문에?
FiveSix : 네. 그가 제 영웅이고, 제가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는 것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겠죠. 하지만 제게 있어서 몇몇 뮤지션들은 어떤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 나는 이 사람의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내가 과연 이 사람보다 랩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거요.
PM : 그럼……?
FiveSix : 네. 에미넴을 이겨보고 싶어요. White Trash와 Yellow Monkey가 흑인 문화를 두고 붙는다면 미국 대중 음악계에 어떤 메시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흑인 문화에서 탄생한 랩이란 장르는 이미 블랙을 떠나 월드와이드라는.
흑인 문화권의 랩씬에서 ‘백인 쓰레기(White Trash)’로 전미의 랩씬에 충격을 안겨줬던 에미넴.
마찬가지의 랩씬에 ‘노란 원숭이(Yellow Monkey)'로 등장한 파이브식스.
상현의 당돌한 인터뷰는 많은 서브 텍스트를 생성해내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Verse 40. 미지의 요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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