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50화 (250/309)

< Verse 40. 미지의 요인 >

Verse 40. 미지의 요인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다원화되면서, 산업의 다양한 부분 사이로 많은 커넥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차 산업인 농업만 하더라도 ‘곡식을 재배하고, 먹고, 남은 것들을 판다’는 명제 사이로 수많은 과정들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이러한 복잡성은 서비스업인 3차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음악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음악 산업이 음악가가 곡을 만들고 귀족층의 후원을 받아 연주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현대에 들어서는 곡을 만들고, 홍보하고, 유통하고, 공연하는 과정에 수많은 회사들이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음악성만으로 승부를 보기 힘든 시스템이 완성됐음을 의미했으며, 외부 지원이 음악성의 부족분을 충분히 포장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해져도 음악은 결국 예술이었다.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시스템 밖에서 탄생했고, 시스템을 뒤흔들었다.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무명 상태에서 CD 한 장으로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음악이 예술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파이브식스, 켄드릭 라마, 제이콜의 MTB처럼.

***

2008년 5월.

이 불티나게 팔리며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발매 첫 주에만 LA에서 3만장을 팔아치우더니, 두 번째 주에는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12만장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었다.

발매 2주 만에 15만장.

888 크루의 첫 번째 믹스테잎이었던 오피셜 부틀렉이 1년 동안 3만장을 판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결과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의 판매량은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한 결과였다. MTB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있었다. 다만 물량이 없을 뿐이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MTB 판매를 전담한 베버는 하루 종일 울리는 전화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미국은 국가 내에도 시차가 있어서, 뉴욕에서 오전 9시에 전화를 걸면 LA의 베버는 한참 깊은 잠에 빠져있을 새벽 6시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베버가 자초한 고생이었다.

베버가 오랫동안 계획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MTB를 납품 받으려는 레코드샵들은 직접 베버를 통해야했다. 유일한 예외는 캄튼의 패션 센터의 사이커델릭 레코즈 뿐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좋았다.

MTB의 인기가 동부지역에서 LA 전체로 퍼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베버는 즐거웠고, 캘리포니아 주로 퍼져나갈 때는 인력을 충원하며 나름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이지, 더 게임, 케이알에스원의 멘션은 퍼져나갔고, MTB에 대한 호평이 힙합 사이트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MTB에 대한 관심이 LA와 캘리포니아를 넘어서 전미로 확장된 것이었다.

원래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묘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타인이 그것을 극찬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베버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MTB를 소규모로 풀어버리는 바람에 팬들의 갈망이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MTB를 가지고 싶은 힙합 팬들이 자기 동네의 레코드샵을 닦달하면, 레코드샵 주인이 베버를 닦달하는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결국 베버는 2주도 못 되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나 안 해!”

“왜? 오랫동안 계획해 왔다며.”

“안 해! 안한다고! 너희 회사 사장 불러와!”

상현은 낙담하는 베버에게 ‘앵커 효과를 이용한 품절 전략이 아주 주요했다.’라고 말해주었다. 베버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기뻐했다.

그렇게 베버의 포기와 동시에 MTB의 제작과 유통은 H&R INC가 담당하게 되었다.

켄드릭과 제이콜도 H&R INC와 계약 사항을 조율 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델 레인즈는 상현의 의견을 존중해서 MTB에 별다른 프로모션을 더하지 않았다. 포스터만 더 깔끔하고 멋지게 제작해서 각 레코드샵에 몇 장씩 뿌린 게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TB의 판매량은 점점 늘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켄드릭이 말했다.

“이건 뭐, CD가 아니라 Hot Cake네.”

‘불티나게 팔리다’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To Sell like Hot Cakes'이다.

미국에서 핫케익은 아주 대중적인 음식이었는데, 미국인들은 핫케익이 뜨거울 때 먹는 것을 좋아했다. 때문에 핫케익은 예전부터 구워내자마자 빠르게 팔렸다.

켄드릭은 MTB의 CD가 공장에서 구워지자마자 전 지역으로 팔리는 것을 보고 핫케익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오? 그거 좋은데?”

“그러니까. 다음 곡은 Hot Cakes로 할까?”

“싫어. 내가 솔로곡으로 만들래.”

“욕심 많은 Yellow Monkey.”

“남의 아이디어나 탐내는 Flip 주제에.”

상현과 제이콜이 서로를 놀리면서 웃었다.

켄드릭과 제이콜, 상현은 하루 종일 음악을 만드는 어두운 지하 작업실에서도 굉장한 정신적 교감을 나눴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잘되는 지금은 더욱 서로에 대한 끈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MTB의 인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MTB의 인기가 늘어날수록 켄드릭과 제이콜, 상현의 친분은 더욱 두터워져만 갔다.

H&R INC가 본격적인 음반 관리에 착수하면서 MTB는 차질 없이 전미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앨범 발매 3-4주차 때의 판매량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아직 4주차의 판매량은 완전히 집계가 되지 않았지만, 풀린 물량이 전부 소진이 되고 재 입고 요청이 들어오는 것으로 추산해보자면 적어도 70만장은 판매가 된 상태였다.

하델 레인즈는 MTB 판매가 100만장까지는 무난할 것 같고, 운이 아주 좋다면 150만장도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MP3의 약진으로 인하여 앨범 판매량은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매해 앨범 판매량 수치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만약 MTB가 1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면 ‘2008년 전 세계 음반판매량 순위’에서 30위 안에는 들 수 있다는 것이 하델의 예측이었다.

그러나 하델의 예측은 실제로 벌어질 결과보다 박한 것이었다.

2008년에 더블 플래티넘(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앨범은 11개뿐이었다.

그러니 MTB가 150만장의 앨범을 팔 수 있다면 그들은 2008년에 발매된 앨범 중에 20위권 안으로 안착할 수가 있었다.

흑인 음악으로 한정을 한다면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 순위였으며, 랩 앨범으로만 한정을 한다면 270만장을 팔 예정인 릴 웨인(Lil wayne)의 다음의 2위였다. 물론 150만장을 팔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사실 2008년은 2007년과 다르게 메가 히트를 친 랩 앨범이 거의 없는 해였다.

5월까지 나온 랩 앨범 중에 메인스트림에서 히트를 친 앨범은 없었다. 릴 웨인의 <더 카터 3>는 6월로 발매 예정일이 잡힌 앨범이었다.

스타들이 MTB를 호평하고, 힙합 팬들의 큰 관심을 받는 것에는 이 같은 이유도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살만한 앨범이 없어서 지갑을 닫고 있던 힙합 팬들이 2008년에 처음으로 지갑을 연 것이었다.

MTB에 대한 랩스타들의 호평은 제이지, 더 게임, 케이알에스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릴 웨인은 ‘6월에 발매될 The Carter 3의 좋은 경쟁자가 나와서 기쁘다. 물론 내가 이기겠지만.’이라며 호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표현했다.

MTB가 발매된 2008년 5월 첫째 주의 빌보드 싱글 1위곡이 The Carter 3의 선공개곡인 롤리팝(Lollipop)인만큼 그의 자신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더 게임과 더불어 웨스트 코스트를 대표하는 래퍼인 스눕독은 ‘켄드릭의 랩을 듣고 처음 팍의 노래를 들을 때가 생각났다’라는 맨션을 남겼다.

사이커델릭 레코즈의 김완준 사장님 덕분에 사소한 연결점이 있는 닥터 드레는 ‘흰둥이(에미넴)를 키울 때 그 아이는 록이나 시키지 그래? 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가? 그 흰둥이가 랩씬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이제 흑인에, 혼혈에, 황인이다.’라는 맨션을 남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래퍼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좋은 않은 평가를 내리는 래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한 평론사이트는 ‘이 앨범의 유일한 문제점은 데뷔작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과연 소포모어징크스(첫 번째 앨범의 큰 성공 이후로 두 번째 앨범이 망하는 것)를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평가는 MTB에 대한 관심과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미래를 알고 있던 상현은 진지하게 ‘2009년에 제이콜이 1집 앨범으로 받을 찬사’와 ‘2011년에 켄드릭이 1집 앨범으로 받을 찬사’를 합쳐서 당겨 받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뮤지션이 언제 자신이 성공했다고, 혹은 성공하기 시작했다고 느낄까?

상현은 한국에서 충분한 유명세를 맛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공연장의 관객들이 그들에게 ‘떼창’을 선사할 때였다.

그리고 MTB의 세 라인업들은 가는 공연마다 굉장한 떼창을 맛보고 있었다.

상현은 영어로 만들어진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불러주는 미국인들을 볼 때마다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불과 10개월 전만해도 그는 완전히 무시 받던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7개월 전에는 간신히 LA의 문화 안으로 편승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LA에서 굉장한 유명세를 가진 스타였다.

-꺄아아아아악!

-Nigga! Yellow Monkey! Flip!

상현은 앞으로 다가올 일이 기대가 돼서 미칠 것 같았다.

MTB는 발매 넷째 주에 빌보드 R&B 힙합 앨범차트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H&R INC에 앨범판매가 인수인계 되면서 제대로 된 집계가 시작됐기 때문인 듯 했다.

데뷔 순위는 무려 39위였다.

한 번도 빌보드 순위에 올라본 적이 없는 상현과 켄드릭, 제이콜은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이렇게 빌보드가 쉽나?”

“그러게. 아직 우리가 그렇게 스타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LA에서는 그래도 인기 많잖아. 한인 타운에 가면 상현은 슈퍼스타던데?”

그들 입장에서는 별다른 삶의 변화 없이 앨범을 내니까 빌보드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 너무나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빌보드가 발표하는 35가지의 차트 중에서 한 부분에 이름을 올린 것뿐이었다.

빌보드의 양대 차트인 모든 싱글 앨범을 대상으로 하는 흔히 ‘빌보드 핫 100’이나, 모든 정규 앨범을 대상으로 하는 ‘빌보드 200’에 이름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서브차트들 중에서 톱 알앤비/힙합 앨범(Top R&B/Hip-Hop Albums)은 탑으로 꼽히는 차트였다.

빌보드 핫 100과 빌보드 200의 양대 차트를 제외하면 첫째로 영향력 있는 차트(밴드 팬들에게는 두 번째)란 이야기였다.

결코 서브차트라고 폄하당할 것은 아니었다.

“다음 주가 기대된다.”

켄드릭과 제이콜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상현은 솔직히 빌보드 차트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완벽히 체감이 가지 않아서 좀 애매하기도 했다.

“왜? 보통 차트는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앨범차트는 순수하게 판매량 집계야. 그래서 신인들은 보통 데뷔 다음주, 다다음주에 하이를 찍을 때가 많지. 라디오 플레이 점수가 큰 싱글 차트같은 경우는 데뷔는 96위로 했다가 바로 다음주에 1위를 찍은 경우도 있어.”

그렇게 일주일 뒤.

MTB의 발매 다섯 번째 주, 빌보드 차트로는 데뷔 다음 주의 차트가 발표되었다.

***

< Verse 40. 미지의 요인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