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38. 던전(Dungeon)(完) - 10권 끝 >
엘에이 업(LA UP).
오늘의 관객들 중 888 크루를 알고 사람이라면 ‘LA UP’이란 글자를 보고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곡인 광주 업을 알고 있다는 뿌듯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888 크루를 ‘좀 더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뿌듯함이 아니라 전율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888 크루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성공하는데 광주 UP의 역할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LA UP이라니?
‘한국’을 ‘미국’으로 바꾸고 ‘광주’를 ‘LA’로 바꾼다면, 자연스럽게 상현의 행동에서 의미심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광주 UP은 888 크루의 이름을 전국으로 퍼트린 곡이었다.
888 크루는 무등 경기장의 준 플레이오프 공연 덕분에 힙합 더 바이브에 섭외될 수가 있었다. 또한 중요한 순간들마다 광주 UP이 888 크루의 힙합적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주었다.
힙합 안에서 888 크루를 띄운 곡이 ‘퍽 더 쇼 비즈’라면, 대중적으로 888 크루를 띄운 곡은 ‘광주 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기존 가수들에게 광주 업을 주고 부르라고 했다면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이었다.
‘한국이 얼마나 좁은데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불러요?’
‘광주에서만 활동할 거예요?’
예상되는 거부반응.
그리고 이것은 일견 합당한 지적이었다.
상현이라고 이런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광주 업을 부를 때는 아무 것도 재지 않았다. 단지 부르고 싶으니까 만든 것이었다.
LA UP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현은 LA에 거주한지 채 1년이 안됐고, 그런 그가 LA 업을 부르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상현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봐, 저 놈은 그냥 LA를 마케팅으로 이용하는 거라니까?’라는 비난의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아, 몰라.’
하지만 부르고 싶었다.
너무나 부르고 싶었다.
제 2의 고향으로 삼게 된 LA에 대한 찬사를.
LA UP! LA UP!
Flowers, Sunshine LA UP!
LA UP! LA UP!
Flowers, Sunshine LA UP!
미국의 도시들은 다양한 닉네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뉴욕이 빅애플, 혹은 멜팅 팟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LA에도 다양한 닉네임이 많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Los Angeles’라는 단어의 원 의미를 담고 있는 'City of Angels'이었다. 그러나 LA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닉네임은 ‘City of Flowers and Sunshine’이었다.
상현은 심플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훅으로 LA를 ‘꽃과 햇살’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었다.
LA UP! LA UP!
Flowers, Sunshine LA UP!
LA UP! LA UP!
Flowers, Sunshine LA UP!
맨 처음 LA의 래퍼들은 상현의 훅을 듣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후렴 가사야 이미 많은 곡에서 선보여졌지만, ‘Flowers, Sunshine’이라는 1차원적인 가사는 아무래도 유치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앞선 곡이었던 ‘The way we live’와 ‘No Color’의 랩이 워낙 화려하고 리릭컬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현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현은 2년쯤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트랩 뮤직(Trap Music)의 전 세계적인 돌풍을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처음 트랩이 활개를 치기 시작할 때 상현은 트랩이 들리면 항상 인상을 찡그렸었다.
너무나 단순한 가사와 강한 리듬만 가지고 반복되는 후렴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땠는가?
그는 퓨처(Future)의 팬이었고, 믹밀(Meek Mill)의 팬이었고, 에이셉 라키(A$AP Rocky)의 팬이었다.
여전히 붐뱁과 트랩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붐뱁을 고르는 게 상현의 취향이었지만, 트랩 뮤직의 유행을 겪으면서 상현은 후렴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의 생각에, 후렴이란 가장 원초적이고 말초적으로 주제부를 선포하는 부분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엘에이!”
-업!!
“엘에이!”
-업!!
“Flowers, Sunshine!”
-엘에이 업!!
관객들이 단 한 번 만에 후렴을 캐치하고는 엄청난 환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실 캐치하고 말 것도 없었다. 후렴은 너무 간단했고, 상현의 딜리버리는 너무나 완벽했다.
하지만 간단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투팍의 California Love가 후렴이 복잡해서 그토록 사랑을 받을까?
N.W.A의 Fuck Tha Police가 후렴이 복잡해서 FBI의 경고를 받았을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대중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주는 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LA UP의 후렴구는 성공적이었다.
공연장의 반응을 본 LA의 래퍼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벌스는 어떨까?’
그리고 마침내 벌스가 시작되었다.
천사들의 도시, 또는 위험의 도시
(City of the Angel, City of the Danger)
난 메이저의 꿈을 갖고 이곳으로 왔어
(Have a dream, In a Buildin`. I will be major)
LA는 내 두 번째 고향, 전미가 내 무대
11시간 만에 한국에서 쏘아진 Gun Scope Laser(총 위에 달린 조준경의 적외선)
한국의 랩과 미국의 랩은 수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차이 중에서도 꽤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가사를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인들은 사회적으로 병렬식 구조가 익숙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배워온 교육 과정 자체가 병렬적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탑-다운 방식의 구조가 보편적이었다. 한국의 교육과정, 사회의 풍습 등등이 탑-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차이는 당연히 음악에 영향을 주었고, 랩에는 더욱 심했다.
물론 병렬식 구조가 우위에 있고 탑-다운 방식이 열위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 멋진 랩을 함에 있어서 병렬식 구조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력이 상위 클래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느 수준 이상의 랩을 구사하는 경우에 이 같은 차이점은 무의미해졌다. 아니, 오히려 장점이 될 수가 있었다.
기존의 미국 래퍼들이 잘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죽이는 랩’을 선보이니, 대중들은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때문에 LA의 래퍼들은 상현이 선보이는, 마치 뮤지컬과 같은 기승전결식의 전개에 큰 인상을 받고 있었다.
그래, 스코프(Scope). 누군간 내 조준을 비웃겠지.
날 노란 스머프라 부르며 가가멜 흉내를 내겠지.
노란 원숭이라 불러, 근데 여긴 혹성이고 난 시져
마이크의 Scope ‘La-ser’, 이건 오타, 난 ‘LA-Sir’.
-우와아아아!
-우오오오!
상현이 랩이 터짐과 동시에 엄청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고함소리의 대부분이 남성 팬들이라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저 미친놈이 방금 뭘 한 거야?’
블랙 히피 멤버들과 함께 상현의 무대를 구경하던 켄드릭 라마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리고 그건 켄드릭 뿐만이 아니었다.
큐와 제이, 에이비소울 역시 놀라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LA-Sir라고?’
스코프(Scope : 총 위의 조준경)와 Scoff(비웃다)로 라임을 맞추는 것은 멋졌다.
그걸 스머프(Smurf)로 전개시킬 때는 꽤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노란 원숭이(Yellow Monkeys)라는 인종차별적 단어를 이용해, ‘LA는 혹성이고 난 시져’라는 펀치라인을 던질 때는 깜짝 놀랐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펀치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정점을 찍은 것은 마지막 라인이었다.
Scope Laser. 조준경에서 발사되는 레이저.
한국에서 조준된 총구가 LA를 겨냥했다는 의미.
그 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저를 절묘한 악센트를 이용해 La-Ser로 끊어 읽은 다음, 이것이 오타고 자신이 LA-Sir(LA의 기사)라는 라인으로 연결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사실 이런 라인은 눈으로 봐야지 제대로 확신이 선다.
LA-Ser와 LA-Sir는 귀로 단숨에 납득하긴 힘든 라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이브식스는, 마치 가사가 눈에 보였다가 귀로 들어가는 것 같은 딜리버리를 선보이며 래퍼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말도 안 되는 전개였고, 말도 안 되는 라인이었고, 말도 안 되는 딜리버리였다.
지금 소리를 지른 관객들은 대부분이 래퍼거나, 아니면 랩에 깊이 심취한 이들일 것이었다. 설령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도 다들 놀라고 있었고.
켄드릭 라마는 파이브식스와 만나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은 충분히 래퍼로써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때문에 켄드릭은 상현을 존중하고 있었다.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단어 사용만 봐도, 파이브식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노력뿐만 아니라 가진 바 재능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켄드릭은 파이브식스가 충분히 유명한 래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랩 문화권에서 불리한 동양인이란 부분까지 염두에 둔 평가라서, 굉장한 고평가였다.
하지만 켄드릭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해야 했다.
파이브식스는 이틀 만에 모든 역량을 파악할 수 있는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는 무대에서 훨씬 빛났으며, 엄청난 라이브 퍼포먼스를 가지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와 아우라.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Aura)를 말이다.
‘같이 무대에 서 보고 싶다.’
켄드릭은 이어지는 상현의 공연을 보면서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동안 켄드릭은 ‘라이벌’이라는 존재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큐나 제이, 에이비는 그와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
제이(제이록)와 에이비(에이비소울)은 스타일이 비슷했지만, 큐(스쿨보이 큐)나 자신은 비교할만한 곳이 없었다.
사실 캄튼의 후디들 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서 고차원의 비유와 은유가 들어간 가사를 쓸 수 있는 래퍼들은 거의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래퍼들은 힙합 특유의 로(Raw)함이 부족했고.
그러나 파이브식스에게는 둘 모두가 있었고, 켄드릭은 마침내 경쟁해보고 싶은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배척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서로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공유하면서.
그리고 이것은 비단 켄드릭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스쿨보이 큐도, 제이록도, 에이비소울도 진심으로 상현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었다.
어쩌면 상현의 LA 커튼 콜 투어가 가져온 가장 큰 결과는, 켄드릭과 블랙 히피 멤벋들에게 충동을 심어준 것일 수도 있었다.
같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스쿨보이 큐(Schoolboy Q).
제이록(Jay Rock).
에이비소울(AB-Soul).
성공할 것이 예정된 블랙 히피의 래퍼들.
웨스트런(West Run).
멜(Mell).
상현의 영향을 받아 더 나은 길로 진보하고 있는 사이커델릭 레코즈 멤버들.
그리고…… 파이브식스(FiveSix).
두 번째 삶을 살면서 불확실로 뛰어든 888 크루의 래퍼.
아직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2008년 4월의 LA는 세상을 놀라게 할 잠룡들이 웅크려있는 무시무시한 던젼(Dungeon)이었다.
< Verse 38. 던전(Dungeon)(完) - 10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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